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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지현 Jul 04. 2018

엄마의 밥 엄마의 손길

 임신7주차에 갑작스런 사고로 정강이뼈 골절 수술을 받았다. 의사들은 고통과 두려움에 떠는 나에게 간단한 수술이라며 안심시켜주었고 수술도 잘 끝났다. 그리고 아기도 무사했다. 열흘간 입원을 했고, 집으로 돌아왔다. 제대로 걸으려면 3개월이 걸린다고 했다. 남편은 2주간 휴가를 내서 나를 간호했고, 휴가가 끝난 후에는 친정엄마가 2주정도 와서 집안일을 도와주셨다.

  엄마의 도움은 나에게 빛과 같았다. 첫째가 아직 네살이라 손도 많이가고 집안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만약 엄마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제대로 회복하기 힘들었을테다.

 아, 수술하고 입원했을때는 시어머니께서 첫째를 맡아주시고 케어해주셨다. 양쪽 '엄마'들의 희생에 감사를 표하고 싶다.

 내가 퇴원할때, 시어머니께서 '사돈께서 고생 많으시다' '친정아버지께서 혼자 밥 챙겨 드실 수 있겠느냐' 며 우리 부모님 걱정을 해주셨다. 나는 걱정하는 마음은 잘 알았지만 '두다리 멀쩡한 우리아빠 밥걱정은 안하셔도 된다'고 조금은 짜증섞인 말을 했다. 어른들의 '끼니 걱정'이 어쩔 때는 '끼니 집착'처럼 느껴질 때도 많았으니까. 그리고 엄마의 부재가 '끼니 부재'로 동급 치환 되는것처럼 느껴져서 더 씁쓸했다.

 그렇지만 시어머니의 걱정대로 엄마는 딸집에 와서 매일매일 아빠 밥걱정을 해댔다. 나는 그럴때마다 '아빠는 손이없어 발이없어' 라고 말하며 이제 밥걱정은 그만하라고 했다. 물론 그런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60년간 부엌에서 가스 불 한번 켜본적 없고 설거지는 커녕 식탁에 숟가락 한번 놓은적없는 아빠에게 뭘 기대할 수 있겠나.

  엄마가 집안일을 도와주는동안 나의 남편은 마음놓고 출근했고 돌아와서는 따뜻한 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시어머니는 내가 요청할때마다 반찬과 장류를 보내주셨다. 엄마들의 정성과 세심함과 따뜻함이란....

  2주가 지나고 나는 거추장스런 목발을 던져버렸다. 절뚝절뚝 걸으면서 다시 부엌으로 갔다. 그렇게 나는 '끼니 담당'으로 복귀했다. 일주일정도 혼자 고군분투 하고 있을때 시부모님께서 걱정이 되셨는지 이것저것 과일등을 싸들고 방문하셨다. 그리고 시어머니의 가사 노동이 주말내내 계속 되었다. 반찬을 해주시고 집청소를 해주셨다.

  시어머니는 그야말로 '돌봄 노동'과 '가사 노동'의 끝판왕 같은 존재이시다. 내가 봐도 어머님 손이 그렇게 꼼꼼하실 수가 없다. 머릿 속에 오로지 '자식의 건강과 안위'로 가득 차 온몸이 '엄마'로만 만들어진 그런 느낌이다.

 부엌에서 동분서주하는 나이드신 엄마들을 보며, 나는 감사함을 느낀다. 그리고 동시에 소파에 앉아 리모콘으로 티비 채널을 바꾸는 아빠들에게는 분노를 느낀다.

  '엄마의 손길'이라는 말따위로 따스함을 느끼도록 포장하며 가사일과 돌봄노동을 영원히 '엄마'의 영역이라고 말하는듯 해서, 그리고 나도 환갑넘어서 자식 밥걱정하며 내자식의 집에 온갖 반찬을 보내거나 아들의 자취방을 들락거리며 청소를 하게 되리라고 그렇게 말하는듯 해서.


  결혼 6년차, '뭐해먹니?'라는 엄마들의 질문에서 느껴지는 '끼니 담당' 대물림의 압박이 이제는 분노로 바뀌어 버렸다. 챙겨먹이는 몫이 언제나 '나'일것이라고 단정짓는것이. 그리고 가족을 잘챙겨먹이는것으로 나를 평가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것이.

 나의 엄마는 아직 서른넘은 내 여동생의 밥을 차려주고, 시어머니도 서른넘은 시동생의 밥을 차려준다. 제대로 챙겨먹이고 싶은 엄마의 사랑과 정성을 딸과 며느리에게 '밥상 노동 대물림' 하는 것이라면 이제는 '엄마 밥'에 대한 집착과 환상을 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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