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봄유정 Nov 21. 2024

비상벨을 누릅니다

탄천을 걸어 귀가하는 날이 가끔 있습니다. 날이 좋은 때에는 늦은 밤에도 운동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곳인데, 요즘같이 갑자기 기온이 내려갈 때는 초저녁에도 인적이 드뭅니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습니다. 저녁 약속 후 근처 역에서 전기 자전거를 빌려 타고 오는 동안 연인인 듯 보이는 단 두 사람만 보였습니다. 덜컥 겁이 났습니다. 모퉁이를 돌았을 때 불쑥 누군가 튀어나오면 어쩌지. 뒤에 어떤 이가 쫓아오고 있는 건 아닐까. 유쾌하지 않은 상상이 꼬리를 물고 따라왔습니다.


그때 저 멀리서 번쩍, 하고 불빛이 깜빡였습니다. 반복적으로 깜빡이고 있어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비상벨'이라고 쓰여 있는 빨간 버튼이 주인공이었습니다. 몇 해 전, 지나가는 사람을 쫓아가 해코지를 하는 사람 때문에 CCTV와 비상벨이 설치되었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실제로 확인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위급 상황 시 비상벨을 누르면 경광등이 켜지고 사이렌이 울린다고 합니다. 누를 일이 절대 벌어지지 말아야 하겠지만, 오가는 곳에 비상벨이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든든해졌습니다. 뒤를 따라오던 험악한 어떤 이가 요란스러운 불빛과 사이렌 소리에 혼비백산해서 도망치는 상상을 해봅니다. 통쾌합니다.


머릿속에 지진이 나고 마음에 폭풍우가 몰아칠 때, 원하는 방향으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주변에서 나를 사정없이 흔들어대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도 누를 수 있는 비상벨이 있다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높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치솟았던 파고가 서서히 낮아지고 이내 잠잠해질 텐데 말입니다. 


다행히 제게는 그런 비상벨이 있습니다. 글쓰기입니다.


글쓰기는 소용돌이치던 마음을 잠재우고 제게 평온함을 가져다줍니다. 그뿐만 아니라 풍랑의 연유를 제대로 들여다보게 합니다. 잔잔하던 호수에 돌을 던진 것은 아무개였는지 나였는지, 요란스러운 빛과 소리에 혼비백산한 것이 정작 나는 아닌지 알려줍니다. 그러니 글을 쓰면 쓸수록 나라는 사람이 말갛게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글쓰기는 마음속 윤슬마저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힘들 때, 위급할 때만이 아니라, 행복에 겨울 때, 마음이 한껏 들떴을 때도 비상벨을 누르고 싶어집니다. 잔잔하게 빛나고 싶은 마음마저도 기록으로 오래오래 멀리멀리 남기고 싶은 달뜬 마음. 그들을 글로 풀면 풀수록 겸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마다 누르는 비상벨의 형태는 다양합니다.

노래방에 가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거나 땀을 흠뻑 흘리며 운동을 하는 사람, 죽은 듯이 자거나 미친 듯이 일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악기를 연주하는가 하면 뒤늦게 배운 그림에 흠뻑 빠지기도 합니다. 밤새도록 음주가무를 즐기거나, 전시를 찾아다니는 것으로 비상벨을 누르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 혹은 사랑하고 있다는 마음에 의지하기도 하지요.


제 비상벨은 두고두고 글쓰기일 것 같습니다. 수년째 열심히 누르고 있는 비상벨의 번쩍거림과 사이렌이 여전히 좋습니다. 여전히 든든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게 다 글 때문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