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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르네바 Apr 22. 2024

걸음을 멈추고 숨소리도 멎을 때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마구치 류스케

껍질이 빨간 건 소나무, 검은 건 낙엽송. 인간은 자연에 이름을 부여하고 이것과 저것을 구별한다. 구별을 통해 나름의 앎을 형성하고, 앎은 곧 힘이 된다. 자신이 지닌 힘에 도취되어 “내가 있을 곳은 여기”라고 확신한다. 도취와 확신은 “단순한 사람들”이 전혀 단순하지 않은 자연에 불균형을 일으키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그 불균형은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온전히 알지 못하니까. 애당초 앎의 대상일 수나 있겠는가. 



극중 타쿠미 또한 자연을 알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앎은 힘이 아닌 공존의 수단이다. 가시 돋친 열매를 욕심내지 않고 사슴이 다니는 길을 걱정한다. 물을 긷고 장작을 패지만 그의 생존을 위함에 다름 아니다. 새가 떨어뜨린 깃털을 주워모을 뿐 날아가는 새에 총을 겨누진 않는다. 자연의 흐름에 맞추어 겸손한 태도를 유지한다. 



글램핑은 인간의 흐름에 자연을 맞추는 일이다. 마을 경제 활성화와 기업 보조금 앞에서 자연은 수치화된다. 자연이 소각된 도시에 비하여 어느 정도의 흐트러짐은 문제 될 일 없다는 식의 태도 앞에서 주민들은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다. 현장 담당자인 타카하시와 마즈유미는 타쿠미와 마을 사람들에게 공감하지만 어렴풋한 느낌일 뿐이다. 장작패기를 ‘체험’해보고 마을 물을 사용해 만든 우동도 먹어보지만, 그저 ‘몸이 따뜻해’질뿐 마을의 심정이 마음에 와닿진 못한다. 



타카하시와 마즈유미에게 사슴의 시체는 놀라움과 연민의 감정을 자아내나 자연 속 커다란 흐름의 일부라는 직관을 얻기엔 역부족이다. 사체로부터 눈을 떼고 돌아서는 마즈유미에게 사슴의 시선이 묻어있는 듯한 것은 바로 이러한 위선이 비-자연적이기 때문 아닐까. 긷은 물을 나르는 일은 버겁고 숲속을 걷는 일은 손바닥에 큰 생채기를 낸다. 이런 식으로 자연은 안이한 태도의 외지인을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호기로운 타카하시는? 그의 자신만만함은? 조심스러운 마즈유미가 얻은 그 정도 상처는 곧이어 타카하시에게 벌어질 일의 복선이 아니었을까. 



타쿠미와 타카하시 그리고 마즈유미, 셋이 탄 차가 뒤로 하고 있는 마을의 풍광, 어쩌면 자연. 차를 탄 사람들은 전방을 향하나 자연은 그렇게 전진하는 차를 뒤에서 응시하는 듯하다. 자연과 인간의 분리가 뚜렷하다. 그런데, 하나는 여물을 먹는 소의 눈망울에 자신의 눈동자를 맞추고, 새의 날갯짓을 흉내 내며 들판 위를 달린다. 자연과 인간의 하나됨을 하나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하나는 마을어른들이 회관에 모여 글램핑 사업에 대해 좁혀지지 않는 갑론을박을 하고 있을 때, 실내에 들어서지 않고 바깥에서 지켜만 봐야 했던 걸까? 



시종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타쿠미가 자신의 신념을 드러내기 위한 한 가지 몸짓인 듯 취하는 행동이 있다. 털모자를 벗어 드는 것이다. 털모자를 손에 쥔 타쿠미가 나직하게 외쳤던 한 마디. “문제는 군형이다”라는 것. 이 간단한 명제가 극의 마지막 순간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털모자를 벗어 바닥에 내려놓은 하나와 피 흘리는 사슴. 그 둘이 서로를 바라보는 짧은 순간. 하나는 균형을 맞추기 위해 피를 흘려야 했고 타카하시는 하나의 다가섬과 함께 쓰러져야 했다. 그것이 죽음을 의미하든 그렇지 않든, 모종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고통은 인간이 지닌 가장 자연적인 것 중 하나이니까. 



타쿠미가 타카하시를 덮쳐 목조를 때, 그가 느꼈을 어떤 충동은 그의 표정없음에 모순적이지 않다. 자연엔 표정이 없으니까. 자연과 인간의 경계선에 머물던 타쿠미가 그저 자연스럽게, 한쪽 편으로 넘어 온 순간이었다. 흐름에 따랐을 뿐이다. 하나를 업고 밤의 숲을 걷는 타쿠미의 시야에 들어온 건 어떠한 구별도 없는 하나의 자연이다. 색채를 잃은 숲은 소나무와 낙엽송의 구별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인간이 정립한 모든 개념이 무의미해지는 순간, 타쿠미는 걸음을 멈추고, 그의 숨소리도 멎는다. 



안이한 앎의 태도는 불균형을 낳는다. 인간과 자연이 올라탄 시소의 무게중심이 흐트러진다.  극의 후반부까지 그런 불균형은 단조롭게 증가하다가, 극적인 사건을 맞아 모든 것이 균형을 되찾는다. 자연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방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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