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기억의 조각들은 눈을 질끈 감고 집중해 뒤져보아도 방금 부수어진 파도의 포말이나 군데군데 찢겨나간 모자이크 기법의 사진처럼 짜맞추기도, 실체를 알아보기도 힘들다. <애프터썬>의 관객들은 누군가 고통스럽게 되밟는 회상의 과정을 관객 자신들의 현실보다 더 선명하고 구체적인 화면 속에서 아무 모호함도 없이 또렷하게 지켜 볼 기회를 얻는 셈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타인의 삶은 과하게 노출되는 반면 자신의 내면적 삶을 덮는 조리개는 닫힌 채 머문다. 그렇게 안전하게, 하지만 거짓되게.
타인의 선택을 판단함에 있어 보이는 과단성과 자신의 삶을 성찰함에 있어 보이는 비겁함 사이 불균형을 해소하기위해, 우리는 각종 예술의 도움을 받아 타인의 자리에 자신을 세워보지만 빈약한 상상력은 구체적 현실에 힘을 뻗지 못한다. 상상력에 현실 속 경험의 자양분이 적절한 양만큼 더해질 때 우린 타인의 삶 앞에 겸손해질 수 있고, 자신의 삶에 솔직할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소피에게 부족했던 그것이 캘럼에겐 과했던 것이다. 하여 소피는 계속해서 상상하고 질문할 수 있었고, 캘럼은 눈을감고 입을 닫았던 것이다.
소피는 캠코더를 들고 현재를 기록한다. 소피의 과거 기억은 현재를 압도하지 않는다. 캘럼은 캠코더에 기록된 과거를 돌려보다 중단하기를 반복한다. 캘럼의 현재는 과거에 압도되어 있다. 캘럼은 안에서 밖으로 밀어낼 것들만 잔뜩 가졌다.소피는 밖에서 안으로 들여올 것들을 잔뜩 발견한다. 캘럼은 자신을 노출시키는 소피의 캠코더를 견딜 수 없다. 내면의 조리개를열어 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즉 자신이 아닌 타인의 삶을 응시하는 사람에게 “게나 바닷가재의 생각”[1]을 품은 사람이나 다름없다.
공항 출국장에서 마침내 캠코더가 캘럼의 손에, 소피가 프레임 속에 들어온다. 이미 소피와의 여행은 과거가 되었으니까 가능한 시점의 전환이었다. 캘럼은 소피의 현재를 찍는 것이 아니라 벌써 과거가 되어버린 소피와의 여행을 그리워하고있었던 것이다. 캘럼이 소피를 배웅한 뒤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선 현실과 상상이 서로 빠르게 교차된다. 그곳은 젊은 날의 캘럼을 소피가 이해하기 위해 다시 찾아간 장소이기도 하다. 혼란 속에서 두 사람은 마침내 포옹하지만, 휴가지에서 춤추며 했던 포옹과 같지 않다. 이 간극이 메워질 수 없기에 소피는 캠코더를 돌려보아야 하고, 우리는 또다른 영화를 끊임없이 찾아야 한다. 내안의 복잡한 것을 보지 않기 위해 바깥의 복잡한 것에 시선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플래시와 암전 사이, 그리고 현실과 영화 사이. 구체적 현실이 두려워 상상 속으로 빠져들어보지만 그곳에 줄곧 머무를수 없는 노릇이다. 도망쳐 온 곳에서 묻어나온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휴가지의 정서처럼. 춤과 마약과 노래와 카페트가 잠재우지 못한 시끄럽고 커다란 것들은 밤바다의 거센 파도소리 정도로만 덮을 수 있을 뿐이다. ‘거리의 사람들’에게 필요한 ‘사랑’이 그들에게 찾아와 준다면, 등돌린 채 흐느끼는 사람을 돌려 앉혀 함께 울어줄 단 한 명의 사람이 있다면, 타인의 자리를 세워 두기보단 우리의 자리를 마련하는 일로 족할 것이다.
[1]<구토>, 장폴 사르트르, 문예출판사, 2020, 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