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르네바 Oct 22. 2024

고독을 대하는 세 가지 방법

차이밍량, <애정만세>

편의점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지지만 말끔한 샤오강의 모습을 보아줄 타인의 눈이 없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그의 눈이 촉촉한 건 맞부딪는 바람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빈 물병만큼이나 초라하고 내용없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견딜 수 없을 때, 얇은 손목과 날카로운 칼이 함께 선사해 줄 확실성을 마다할 이유가 있을까? 옆방에서 격한 사랑을 나눈 두 남녀는 그 확실성에 객관적인 보증까지 세워 둔 셈이다. ‘넌 홀로 죽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망설인다. 자기 자신만을 비추는 빛이 그를 내면의 고독으로 내몰았지만, 바로 그 빛으로 인해 선명한 색채를 갖는자신의 몸을 끝장 낼 수가 없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일이란 스스로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모종의 보편적인 동정심이 불러일으켜지기때문이다. 불을 끄고 암흑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생생한 객관적 사물로서 몸은 사라지고 내면과 같은 색을 띠게 된다. 더 이상 망설임은없다.



여럿이 한데 모여 먹고 마시며 웃고 떠드는 동안, 각각 홀로 앉아 있던 아룽과 메이가 남기고 간 잔과 컵이 두 사람 만큼이나 개별적이고 분리되어 보인다. 그래서 차마 영화를 같이 보자고 제안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남자는 계속 따라갈 미련이, 여자는 다가갈 결단이 필요했다. 미련과 결단이 만나 남자와 여자는 나란히 설 수 있었다. 외로움과 욕망을 해소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아룽과 메이는 하룻밤을 같이 보냈지만 '누구세요' 물어야 하는 사이인 건 달라지지 않았다. 몸을 나누는 일이 신뢰를 나누는 것과같지 않기 때문이다. 전자는 순식간에도, 후자는 평생이 걸리기도 하는 일이다. 아룽은 자신의 직업을 솔직하게 밝히지 못한다. 메이를 믿지못하기 때문에. 자신을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여기면 어떡하나? 메이는 아룽을 다시 만날 의향이 없다. 아룽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오직 욕망으로 무장한 무서운 사람이라면? 



갈 곳은 없고 떨어지긴 싫다. 메이를 만나지 못한 아룽은 샤오강에게 어디든 좋으니 갈 곳을 묻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안치소에 ‘소풍’을 간다. 자살기도를 했던 샤오강은 죽음 이후가 궁금했다. 그에게 돌아온 대답은 이번에도 삶에 대한 것이었다. 고독한 삶이 어떤 죽음을맞게 될지에 대한 것이었다. 죽어서도 누군가는 가족이나 친구와, 부부와 한 공간에서 함께 머물지만,  가족이나 친구, 부부가 없는 사람은고작 36x36x36 크기의 단칸 정도 차지하는 데 족해야 한다. 그런데, 나의 뼈를 회수하고 보관해줄 사람은 누구일까?



누군가에겐 이사가 ‘놀이’지만 일상이 이사 같은 사람이 있다. 정박하지 못한 채 떠도는 삶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아 자유롭기보단어디에라도 속하고자 하지만 그럴 수 없는 부자유로 경험된다. 세 사람은 끊임없이 이동하며 끝내 나의 것이 되지 않을 물건들을 판매한다. 그들의  삶 자체도 그 물건들처럼 떠돌며 자신의 것으로 경험되지 않는다. 정착이든 자유든, 그 정착과 자유를, 그러니까 ‘자유로운 정착’을보고 인정해줄, 나아가 함께 나누어줄 타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아룽의 그릇에 옥수수를 떠주고, 메이에게 전화하려는 아룽에게 동전을 빌려주는 샤오강은 아룽과 나란히 서고자 한다. 아룽은 메이에게 호감을 갖고 있으나 메이가 자신과 나란히 서줄 것인지 확신이 없기에 우선 자신의 쾌락에 집중한다. 보다 확실하니까. 메이는 그 어떠한 기대도 품고 있지 않았다. 메이는 홀로 걷고 홀로 앉아 자신의 몫을 견딘다. 모두 같은 것을 원하지만 취하는 태도가 제각각이다. 고독을 대하는 세 가지 방법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애프터썬] 플래시와 암전 사이, 영화와 현실 사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