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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산별곡 Oct 31. 2024

산 따라 물 따라

금강산 관광기

금강산 관광을 하던 시절이니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의 일이다. 오랜 기억을 열고 느낀 점을 글로 써본다. 금강산 구경을 못한 사람들에게 금강산의 윤곽이나마 보여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현대 설봉호 승선


   2004년 겨울, 37명의 동료교사들과 동계연수차 금강산으로 관광을 떠나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더구나 국가에서 정책상 비용의 50%를 지원해주었기 때문에 비용 부담도 적었다. 새벽부터 서두르는 바람에 10시 반 경 속초항 터미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객터미널 안에 있는 외환은행에서 50달러(61,250원)를 환전했다. 그리고 '금강산 관광객'이라는 표찰을 목에 걸고 '현대 설봉호'에 승선했다. 우리가 승선한 '현대 설봉호'는 파나마 선적으로 현대가 임대해서 사용을 하고 있는데, 무게는 9,000톤으로 약 700명 정도가 승선을 할 수 있었다

   선실에 가방을 두고 우리는 갑판으로 올라갔다. 12시 10분 경,  '스탠바이'라는 방송이 울려 퍼지면서 설봉호는 고요한 바다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더없이 푸른 하늘 아래, 설봉호를 뒤따라 오려는 듯 하얗게 부서지며 쫓아오는 포말을 바라보는 마음은 무척이나 싱그러웠다. 바닷물이 햇빛에 반사되어 은빛으로 빛나는 모습은 한 마디로 장관이었으며 점점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갈매기들의 군무(群舞)는 눈을 황홀하게 했다. 갑판 위에서 사람들은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 촬영을 하느라고 바빴다.

   오후 1시 반경, 승객들은 좌석실인 크리스탈룸에 모여 '관광선 안전교육 및 대피 훈련'과 '방북교육 및 관광안내교육'을 받았다. 무사히 집에 돌아가기 위해서는 금강산 관리인들에게 북측을 비방하거나 자존심을 훼손시키는 말을 하지 말고 특히 정치 얘기는 절대로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휴대폰을 가지고 하선해서는 안되며, 관광을 마치고 돌아갈 때 돌이나 나뭇가지를 가져가다가 적발되면 일단정지란다. 이거 원 참, 무서워서 어찌 구경하겠나? 그러나 천하명승 금강산을 보호하려면 그런 조치도 필요하겠지.


고성항 입항


   점점이 떠있는 섬들과 북녘의 산들이 안길 듯이 다가왔다. 가까운 산들이 먼저 자태를 뽐내며 다가왔고 멀리 있는 산들은 어슴츠레하게 신비를 감추고 있었다.

   마침내 고성항에 닻을 내렸다. 출발한지 약 3시간 반. 이 가까운 거리를 오기 위해 우리는 그렇게 그리워하며 반 세기나 기다려야 했는가? 정치나 이념을 떠나서 우리는 한 민족이 아니었던가?

  고성항은 천혜(天惠)의 항구로서 손색이 없다. 항아리 모양으로 움푹 들어가 있는 이 항구는 활을 장전한 것과 같은 모습이라고 하여 '장전항'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한때는 무장간첩선이 이곳에서 남쪽으로 출항하기도 했다는데, 지금은 관광선이 드나들고 있으니 세월의 흐름을 그 뉘가 알리요? 정박한 설봉호 앞쪽으로 통행검사소 건물이 보이고, 우측으로 남한에서 운반해 간 커다란 바지선인 '호텔 해금강'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가방과 휴대폰을 선실에 둔 채로 카메라만 들고 크리스탈룸에 모였다. 카메라도 일정 성능 이상은 소지할 수 없으며, 군사지역이어서 촬영할 수 있는 지역이 정해져 있다. 우리 '가반 3조'의 가이드는 서울 출신의 예쁜 아가씨로 현대의 정식 사원이란다. 다소 공주병이 있는(예쁜 것이 있으면 '나처럼 예쁜'이라고 표현함) 이 친절한 아가씨의 안내로 앞으로 2박3일간의 관광을 하게 된다.


온정각으로


   조별로 가이드 아가씨를 따라 통행검사소로 걸어갔다. '반갑습니다'라는 북한 노래가 인상적인 가락으로 울려퍼지고 있었다. 카메라를 검사대 위에 올려놓고 검사대를 통과한 후, 관광증에 통행검사소의 도장을 찍었다. 나중에 모 선생님은 통과할 때마다 검사소 직원들이 시비(?)를 걸어 불쾌했다고 한다. 사진이 실제 모습과 많이 달랐던 모양이다. 아니면 인상이 마음에 안들었던지.

   통행검사소를 통과한 후에 조선족 운전기사가 운전하는 '금강산 관광버스'를 탔다. 주위의 산들은 나무가 거의 없는 민둥산과 바위산들이었으며, 온정각으로 가는 통일로 좌우측에 군인들이 서서 사진촬영을 할까봐 감시하는 모습이 간혹 눈에 띄었다. 아침 했빛이 잘 든다는 양지마을과 온정리 마을을 통과했다. 마을에 굴뚝이 하나 있는 집과 두 개가 있는 집이 보였는데, 굴뚝이 하나 있는 집은 한 가구가 살고 두 개가 있는 집은 두가구가 산다고 한다.

   4,5분 정도 달려서 버스는 온정각에 도착했다. 근처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모인 '김정숙 휴게소'가 있었고 커다란 돔형 지붕의 '금강산 문화회관'이 보였다. 온정각에서 금강산 온천으로 가는 길에 잔해들만 흉물스럽게 남은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이전에 상점가였다는데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면서 철거가 된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지저분하게 내버려두는가? 유령의 집을 관광하는 것 같다.

   10분 정도 걸어서 영생탑을 지나 금강산온천에 도착했다. 1층은 온천, 2층은 미술관으로 쓰고 있었는데 온천은 내일 하기로 하고 2층에 있는 '북측 명인 미술전'을 먼저 보기로 했다. 벽마다 북측의 유명화가들이 그린 산수화들이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림 밑에는 1급 미술가니, 공훈미술가, 또는 인민미술가 등의 호칭이 이름과 함께 기록되어 있었다. 관리인에 따르면 1급  미술가 중에서도 공을 세운 정도나 많이 알려진 정도에 따라 공훈 미술가, 더 나아가 인민미술가로 분류되다고 한다. 그림에 문외한(門外漢)인 나의 눈에도 정말 잘 그린 그림들이 많았다. 그림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실물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금강산 관광에 대한 기대가 한층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 옥의 티가 있었으니, 좋은 그림에 비해 너무나 조잡한 액자! 귀중한 보물을 초라한 그릇에 담은 것처럼 어색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림 이외에도 이산가족 상봉에 대한 안타까운 기사와 사진들이 게시되어 눈길을 끌었다.

   미술전을 감상한 후, 온정각 내에 있는 관광식당에서 한식부페로 저녁식사를 했는데 직원들이 친절하고 시장한 탓인지 음식이 맛이 있었다. 어디선가 "역시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는 말이 들려왔다. 식사를 마치고 선실로 돌아와 일부 선생님들은 포커판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구룡연(九龍淵)으로


   일찍 일어나 갑판으로 올라갔다. 뺨에 스치는 상큼한 감촉과 더불어 희끄므레 밝아오는 금강산.

   조용히 읊조려 본다. "금강산이여! 오늘 그대에게 가노라."

   선내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8시경에 크리스탈룸에 모여 조별로 통행검사소로 걸어갔다. 관광버스를 타고 온정각으로 가는 도중 육로관광객들의 관광버스가 주차해 있는 것이 보였다. 시범육로관광단이 오늘 휴전선을 넘어 금강산 관광을 온 것이다. 곧  자가용으로 금강산 관광을 하는 것도 꿈은 아니리라. 

   구룡연으로 가는 길에 눈이 많이 왔기 때문에 온정각 휴게소 내에서 7달러를 주고 아이젠을 빌렸다. 반납할 때에 6달러를 돌려받는다고 한다. 온정각에서 관광버스를 타고 배나무 밭을 지나 구룡연으로 가는 도중, 주위에는 30년에서 150년까지나 된 미인송들이 쭉쭉 뻗어 수려한 자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미인송은 붉은색을 띤다고 적송이라 하기도 하고 임금님의 관을 짜는데 쓰여 황장목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눈이 많이 내려 잔가지가 견디지 못해 떨어지고 쭉쭉 뻗은 나무들이 되었다고 한다.

   고개 너머 있던 창고에서 양곡과 물자들을 수레로 운반하였기 때문에 이름 붙여진 술기넘이(북한 말로 '술기'는 수레를 의미) 고개를 지나니, 장안사, 유점사, 표훈사와 더불어 금강산 4대 사찰로 유명한 신계사터가 나타났다. 신계사(神溪寺)는 신라 법흥왕 때 절로 6.25때 폭격을 받아 파괴되었고, 지금은 3층 석탑만 남아 옛날의 영화를 쓸쓸히 상기시켜 주고 있었다. 숲속에 울려퍼지는 노스님의 불호(佛號) 소리는 나만의 환청인가? 버스는 드디어 주차장(북한 말로 '차마당')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는 걸어서 올라야 한다. 우리는 눈길에 미끄러지지 않도록 신발에 아이젠을 채웠다. 장갑도 끼고 완전 무장.


"금강산이여, 내가 간다!

신라의 마지막 태자 김충이 망국의 슬픔 안고

마의(麻衣)를 걸치고 들어간 개골산으로

나 역시 태자의 발자취를 더듬어 가노라"


   금강산은 계절마다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있다. 새싹이 돋아나고 향기 그윽한 봄을 아름다운 금강석에 비유하여 금강산(金剛山)이라 하고, 녹음방초(綠陰芳草) 우거지고 힌 구름과 안개가 감도는 여름은 신선이 사는 산이라고 하여 봉래산(蓬萊山)이라 한다. 그리고 단풍으로 붉게 타는 가을은 풍악산(楓嶽山)이라 하며, 기기묘묘한 바위들에 흰눈 덮인 겨울은 개골산(皆骨山)이라 한다. 태백산 줄기의 북부에 자리잡고 있는 이 금강산은 남북의 길이가 60km, 동서의 넓이는 40km로서 그 면적은 530 제곱km에 달한다. 금강산의 주봉은 해발고도 1,639m에 달하는 비로봉이며, 지역적 특성에 따라 외금강, 내금강 및 해금강으로 나누어지고 있다.

   가이드 아가씨를 앞세우고 산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눈이 많이 내려 바위 위에 1m 정도 새하얀 눈이 몇겹으로 쌓여있다. 3겹, 아니 5겹은 될 것 같다. 손으로 바위 위의 눈을 떼어 보니 한 겹이 그냥 벗겨진다. 시루떡처럼 층층을 이루고 있고, 어떤 바위에서는 눈이 흘러내리는 채로 얼어버려서 고드름이 줄줄이 달려 있다. 하얀 순백(純白)의 세계! 이곳이 바로 오염된 사바(娑婆)를 벗어난 선경(仙境)이 아니런가? 속세(俗世)에 찌든 인간이 성스러운 선경을 오염시키는 것이나 아닌지 조심스러워진다.


   눈 속에 찍힌 앞사람의 발자국을 밟으며 향토식당인 목란관을 지나니 산세가 아름답고 바위들이 기묘한 앙지대가 나타났다. 긴 코를 늘어뜨린 코끼리, 웅크리고 있는 거북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도마뱀, 그리고 입을 벌린 악어들이 실물처럼 보였다.

   앙지대에 이런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코끼리와 거북이, 도마뱀, 악어가 금강산 구경을 하기로 했다. 그들은 금강산 1만 2천 봉우리의 아름다운 경치를 모두 구경하자면 비로봉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는 누가 먼저 비로봉에 오르는지 경쟁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비로봉을 향해 올라가던 이 짐승들은 앙지대의 황홀한 경치에 취해서 더 이상 오르지 않고 바위로 굳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어떻게 바위들이 이런 기묘한 모습을 할 수 있을까? 함께 갔던 지리과 선생님이 화강암이 침식에 강하기 때문에 완전히 부서지지 않고 저런 묘한 형태로 남아있다고 설명을 해 주었다.


   앙지대를 지나니 산삼과 녹용이 흘러내린다는 삼록수(蔘鹿水)가 나타났다. 삼록수를 마시지 않고 어찌 그냥 지나칠 수가 있으랴! 그러나 그냥 지나쳤다. 줄지어 기다리는 사람이 많고 또 가이드 아가씨는 하산 길에 마시라며 발길을 재촉한다.

주변 풍경과 흐르는 물이 비단에 꽃수를 놓은 것처럼 아름다운 계곡에 위치한 금수다리를 건너고 일만경치가 다 보인다는 만경다리를 통과하니 산꼭데기에 모자를 벗은 노인이 앉아 있었다.

   옛날 옥황상제가 금강산을 구경하다가 구룡연 계곡의 맑은 물에 뛰어들어 목욕을 하였는데 금강산 신령에게 들키고 말았다. 금강산 신령은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물에서 목욕을 하고 있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며 옥황상제의 관을 들고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관을 잃어버린 옥황상제는 하늘에 오르지 못하고 세존봉 중턱에 매머리 채로 굳어져 버렸다고 한다.


   조금 더 가니 커다란 바위덩어리 사이로 길이 나있는 금강문을 통과하게 되었다. 금강문은 금강산의 5대 성문 중의 하나로 옛날에는 집채같은 바위가 앞을 가로막아 구룡연으로 가려면 돌아갔었다고 한다. 그런데 대홍수가 나면서 문이 생겨 구룡연으로 가는 길이 열렸다고 한다. 왼쪽에 있는 산은 마치 여러 층으로 성벽을 쌓아 올린 것처럼 보여서 성벽암이라고 불리는데 영화 '인디아나존스'에 나오는 성벽을 연상시켰다. 하늘 나라의 토끼가 세존봉에 내려와 금강산을 구경하다가 돌아갈 날짜를 어겨서 처벌을 받았다는 토끼바위가 처량한 모습으로 나그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이렇게 구경하며 점점 금강산의 품속으로 파고 들 때에 힘이 들고 점점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산길을 오르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점차 느려지고 되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가이드 아가씨는 여기까지 올라오면 힘이 들어서 숨을 깔딱거린다고 하여 이 고개를 '깔딱고개'라고 부른다고 말을 해 주었다.


   기관차 두 대가 연결된 모습의 기관차 바위가 가파른 우측 산 위를 달리고 있었고, 시내 가운데 선녀들이 내려와 춤을 추었다는 무대(舞臺)바위를 지나니 천하절경 옥류동이 나타났다. 옥류동은 옥같이 맑은 물이 흘러내려 붙여진 이름이며, 하늘에 피어난 꽃송이와 같은 봉우리인 천화대와 얌전하고 수려한 옥녀봉이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이 옥류동은 금강산의 계곡 가운데서도 첫째로 꼽히는 명소로서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절승(絶勝)을 노래하고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지금은 얼어 있지만 봉황이 날아오르는 모습을 하고 있는 비봉폭포(飛鳳瀑布)와 봉황이 춤을 춘다는 무봉폭포(舞鳳瀑布)를 지나니 우측으로 상팔담(上八潭)으로 가는 길이 나타났다. 나무꾼과 선녀의 이야기로 유명한 상팔담을 보지 못해 유감이지만, 훗날을 기약하고 관폭정으로 발길을 옮겼다. 드디어 저 멀리 높은 곳에 자태를 뽐내는 관폭정 정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정자까지 이어진 기나긴 장사진(長蛇陣), 여태까지 무아지경에 빠져 산길을 올랐더니 이제 발이 아프고 지치기 시작한다. 신발 무게가 천근 만근.. 문득 노산 이은상씨의 싯구절이 떠오른다.


"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이 밤도 허위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 수는 없다..."


젖 먹던 힘까지 내어 관록정에 올랐을 때 그 시원함, 상쾌함을 무엇에 비기랴?

주차장에서부터 4.3km. 폭포를 바라보는 정자 '관폭정' 앞에 구룡폭포가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깎아지른 절벽의 높이 100여 m, 폭포높이 74m, 너비는 4m인데다 수량이 많아 동방에서 손꼽히는 크고 아름다운 폭포이다. 그러나 지금 눈과 얼음에 싸여 완전한 모습을 감상할 수 없어서 유감이다. 폭포가 떨어지는 담소에는 옛날에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아서 구룡연(九龍淵)이라 부르는데, 수심이 13m나 된다고 한다. 신라시대의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이렇게 읊었다.


"천길 흰 비단필을 드리운듯하고

만섬의 진주알이 쏟아지는 듯 하여라"


   구룡폭포 우측 바위에 '彌勒佛(미륵불)'이라고 큰 글씨가 씌어 있는데 '佛'자의 길이가 담소 깊이와 똑같이 13m나 된다. 이 구룡연에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유점사가 있던 장소는 원래 커다란 못으로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는데, 어느 날 53佛이 들어왔다. 9龍과 53佛은 서로 자리를 양보하지 않고 재주를 부려 지는 편이 떠나기로 했다. 먼저 용이 뇌성 벽력을 일으키며 소나기가 쏟아지게 했지만 부처는 여전히 앉아 있었다. 그 다음 부처가 '火'자를 써서 못에 넣어 물이 끓게 하니 9龍이 견디지 못하고 서쪽으로 옮겨가서 살았다. 그런데 부처가 다시 서쪽에 있는 그들을 쫓아내어 9龍은 오늘날의 구룡연으로 옮겨 살았다고 한다.

   관폭정에서 바라보는 금강산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아름답다 못해 황홀한 기분, 보지 못한 사람은 모르리라. 계곡 바위 속에서 흘러나오는 수정처럼 맑은 물과 기기묘묘한 바위산의 연속, 그 아름다움을 형용할 말을 과연 누가 찾을 수 있겠는가? 곳곳마다 명승(名勝)이요, 명승마다 서려있는 전설들은 관광객의 발길을 끌어당기고 마음을 더욱 즐겁게 한다.


   관폭정에서 내려오는 길에 곳곳에서 사진촬영을 했고, 산삼과 녹용이 흐른다는 삼록수(蔘鹿水)도 잊지 않고 마셨다. 아! 그 시원한 감촉! 혓바닥을 타고 내려 오장육부를 적시는 그 짜릿함! 삼록수를 마시고 수십년 젊어져서 학생들이 친구로 알면 어떡하지?


   관폭정과 금강문에 이동식 화장실(북한말로 위생실)이 있었는데, 소변은 1달러, 대변은 4달러나 받는다. 오물을 산 아래로 운반하기 위해 관리비를 받는다지만,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데에 그렇게 엄청난 요금을 받다니, 호기심 반, 필요성 반에 의해 금강문에 있는 이동화장실을 이용했지만 영 뒤가 개운치 않다. 용무를 마치고 나오니 화장실 앞에 기다리고 있던 관리인이 "작은 걸 했습니까? 큰 걸 했습니까?" 하고 묻는다. "작은 거요." 하면서 1달러를 내밀었다. 큰 것과 작은 것을 동시에 보고 작은 것을 봤다고 말해도 누가 알겠는가? 만약 큰 것 작은 것 동시에 보면 5달러? 환경보존을 위해서 계곡물에 손도 씻지 못하게 한다. 이 정도로 하니까 금강산이 오염되지 않고 깨끗한 환경을 보존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경치 좋은 곳 커다란 바위마다 써놓은 김일성과 주체사상을 찬양하는 문구, 이것도 자연보호인가? 미인의 얼굴에 메스를 가한 것처럼 아픔이 밀려왔다.


   서둘러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오후 1시 반쯤 되었다. 버스를 타고 온정각으로 내려오는 길에 본 닭알바위와 구렁이바위는 닭알을 먹으려고 기어오르던 구렁이를 장수가 칼로 쳐서 두 동강이를 내었다는 옛 얘기를 아직도 들려주고 있었다. 관광을 축하하듯이 날씨는 너무나 쾌청했다. 가이드 아가씨는 여태까지 안내를 해왔지만 이렇게 날씨가 청명한 것은 처음이라고 말한다. 정말 어제부터 오늘까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다.


금강산 문화회관에서


온정각에서 점심 식사 후 셔틀버스를 타고 '금강산온천'으로 갔다. 온천 비용은 1회에 12달러. 2회를 할 때는 20달러였는데, 노천탕에서 바라보는 금강산의 경치도 일품이었다. 평양모란봉교예단의 공연 시간이 촉박해서 40분 정도 온천에 있다가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온정각으로 왔다. 유명인사들이 탄 육로관광버스들이 온정각으로 들어왔는데 몇몇 선생님들은 선동열 선수와 사진을 촬영하느라고 바빴고, 예쁜 소녀악단들은 자리를 옮겨가며 멋진 연주솜씨를 보여주었다. '나의 살던 고향은' 연주를 할 때는 우리는 한 민족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며 함께 노래했다.


   1시간 정도 지난 후에 25달러를 내고 금강산 문화회관으로 입장을 했다. 임백천씨의 사회로 금강산 육로 시범관광 기념식이 진행되었는데, 북측인사로는 리종혁 아태위원장, 방종삼 금강산관광사장이 참석을 했다. 먼저 정봉헌 현대회장의 회고사가 있었다. 98년 뱃길 관광 이후 현재까지 52만명이 해로를 통하여 금강산 관광을 했다고 한다. 그것이 이제 육로관광으로 발전했으니 참으로 축하할만한 일이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북핵이 문제가 되어 북미간에 냉전이 심화되고 있으니 국제관계는 아이러니컬하기만 하다. 북쪽 고성군수와 남쪽 고성군수가 모두 참석을 했는데, "고성군은 마침내 통일이 되었습니다."라는 남쪽 고성군수의 축사에 박수가 터져 나오기도 했다. 서울대 음대교수 두 분과 북측 성악배우 두 분이 신나게 노래를 부를 때는 금방이라도 통일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역시 노래는 만국의 공통어인가?


   기념식이 끝난 후, '평양모란봉교예단'의 공연이 있었다. 세계수준의 공연이 다양하게 펼쳐질 때마다 감탄사와 우뢰같은 박수가 떠날 줄 몰랐다. 공중그네, 줄넘기, 장대체조, 널뛰기, 곤봉놀이, 접시 날리기 등등 묘기가 펼쳐져 한눈을 팔 수가 없었다. 평양모란봉교예단을 구경하면 세 번을 운다는 말이 있다. '동포애 때문에 울고, 연습을 얼마나 힘들게 했으면 저렇게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안타까움에서 울고, 너무나 재미있어서 박수를 치다가 손이 아파서 운다'고 햔다. 마지막에 '반갑습니다.'라는 노래로 막을 내릴 때는 감동의 도가니였다. 공연도중에 실수를 한 배우가 있어서 걱정이 되어 나중에 가이드 아가씨에게 물어보았더니, 인민배우는 장관급이고, 공훈배우는 차관급에 해당하는 대우를 받기 때문에 괜찮다고 한다. 공연이 끝나고 온정각 관광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선실로 돌아왔다.


해금강 가는 길


   관광 마지막 날, 선실에서 아침식사릏 한 후에 관광버스를 타고 해금강으로 향했다. 강원도 통천에서 화진포까지의 지역을 해금강이라고 하는데, 숙소에서 해금강까지 버스로 약 40분 정도 걸린다. 닭을 기르는 용계리 마을을 지나니 옆길에는 주민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고 있었는데, 자동차처럼 자전거에 번호판이 붙어 있는 것이 특이해 보였다. 가이드 아가씨의 말인 즉, 도난에 대비하기 위해서란다. 자전거는 사유재산으로 한대가 2개월분 월급에 해당한다니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지나갈 때마다 북한군들이 한 명씩 논둑에 서서 감시를 하곤 했는데, 군인들은 손을 흔들어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몇 년 전에 관광객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던 한 군인이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버렸다는 얘기를 가이드 아가씨가 해 주었을 때, 우리는 그 얘기를 '해금강 괴담'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관광객을 위한 비포장 일방도로에 먼지를 일으키며 봉화리 마을을 지나갈 때 조그만 운동장에 소와 달구지가 있는 소학교와 중학교를 통과했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달구지를 보니 옛날로 되돌아간 기분이다. 어떤 학교에서는 관광버스가 지나갈때마다 운동장에서 놀고 있던 학생들이 황급히 교실로 도망쳐 들어가거나, 나무나 바위 뒤에 숨는 모습들이 보였다. 왜 그래야만 할까? 관광버스를 보아서는 안되는 어떤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관광을 하는 나는 학생들에게 미안함과 더불어 무어라 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태풍'루사'의 피해를 받아서 황폐한 마을이 나타나기도 했고, 짐을 실은 채 그 위에 7, 8명의 사람들이 타고 가는 짐차는 6.25 동란 때의 피난민을 연상시켜 주었다. 생활수준이 우리보다 수십 년은 낙후되어 있다고 느껴졌다. 주위에서 가장 잘 산다는 마을도 초라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도로 주위 마을앞에는 가끔씩 선전 문구들이 커다란 글씨로 씌어 있었는데, 그 중의 '자폭정신'이라는 글을 보고 모 선생님이 "여기서는 '자폭'이라고 하는구만. 우리는 '자뻑'이라고 하는데" 라고 말해서 버스 안은 웃음의 도가니가 되었다. 그 선생님은 이어서 "육로관광버스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사람들이 내가 유명인사여서 시범 육로관광을 다녀온 것으로 생각할거야. 그러면 내가 세 번이나 사양했지만 교육청에서 교사 대표로 육로관광에 참석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기에 마지못해 다녀왔다고 말을 해야지. 그 때 선동열 선수와 함께 찍은 사진이 큰 역할을 할거야."라며 비몽사몽간을 헤맨다.


   세 갈래 길이 나타났다. 왼쪽은 '삼일포'로 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해금강'으로 가는 길이다. 해금강으로 가는 길가에 김일성 주석이 중국에서 선물로 받아왔다는 대나무 발이 보였는데, 같이 간 두 분 지리 선생님이 "대나무의 북방한계선을 해금강까지 잡아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하며 평소와는 달리 서로 학구적인 말을 하기도 했다. 흙갈이를 한 넓은 고성평야는 농지정리가 아주 잘 되어있었다. 국가소유로 공동작업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섯!하는 간판이 유난히 눈에 뜨이는 검문소에서 군인들에게 관광허가를 받고, 민통선 지역을 지나 해금강으로 향했다. 길 좌우에는 키 작은 해송(海松)들이 융단처럼 펼쳐져 지나가가는 우리를 마중하고 또 배웅하고 있었다. 드러누우면 무척이나 포근할 것 같은 해송 숲이 지나자 우측으로 기묘한 바다 바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버스가 주차하자마자 우리는 서둘러 진창길을 내려갔다.

멀리 눈 덮인 산을 배경으로 점점이 다가오는 기묘한 바위섬들!

아! 이 광경! 태초에 창조주가 산은 금강산, 바다는 해금강을 만들어 예술의 극치를 보여준 것이리라.

문자 그대로 '바다의 금강산, 해금강'이다. 기암괴석이 천태만상으로 바다 속에 옮겨 앉아 조화를 이루어서, 해금강을 보지 않고는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알 수 없다고 한다. 그 중에서도 나선형으로 겹겹이 휘돌아 올라가는 적재적소에서 나무들이 조화의 미를 자랑하는 바위산 향로봉은 가히 '백미(白眉)'라 할 만하다. 쥐나 고양이와 같은 만물의 형상을 한 바위섬들과, 물 속의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바다 위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해만물상(海萬物相)이 아닌가?


삼일포로


향로봉 앞에서 단체사진을 촬영한 후에 우리는 가던 길을 되돌아오다가, 세 갈래 길에서 갈라져 눈 덮인 아슬아슬한 산길을 통과하여 삼일포에 도달했다. 해금강에서 4km, 버스로 약 20여분 거리이다. 버스에서 내려 삼일포 호수로 내려가니 금강원, 목란관과 더불어 3대 향토음식점으로 유명한 흰색 건물인 '단풍관'이 나타났다. 단풍관은 자연친화적인 건물로 집터에 있는 나무를 베지 않고, 건물의 2층과 3층에 걸쳐 베란다 내부를 통과한 채로 자라게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단풍관이 문제가 아니다. 눈앞에 펼쳐지는 이 호수는 인간계(人間界)인가? 선계(仙界)인가? 크고 작은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둘러싼 채로 잔잔한 호수에 그림자를 던지는 이 아름다움을 어디에 견주리. 동정호인들 이만할 것인가? 아름다음에 현기증이 일어난다. 둘레 8km, 수심 9~13m인 삼일포 호수는 금강산의 장엄한 모습에 온화하고 아늑함이 잘 조화되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소가 누워있는 형상을 한 소나무 우거진 와우도(臥牛島)와 몇 개의 바위섬들이 떠 있는 호수는 맑고 고요하여 수줍은 처녀의 미소를 연상시켰다.

   삼일포는 어떤 왕이 관동팔경을 하루에 한 곳씩 보기로 계획하고 떠났다가 삼일포에 와서는 경치에 매혹되어 3일을 놀았다고 하여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또 신라 때에 영랑, 술랑, 남석행, 안상 등의 네 신선이 3일을 놀고 갔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를 기념하여 호수 가운데 '사선정(四仙亭)'이라는 정자를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사선정 옆의 바위섬에는 네 신선이 노래하고 춤춘 곳이라고 하여 '舞仙臺'라는 글이 바위벽에 새겨져 있었으나, '無'자는 풍화작용으로 거의 없어지고 '仙臺' 두 글자만 남아 옛 일을 말해주고 있으니, 아 세월의 무상함이여! 16세기의 이름난 시인이며 서예가인 봉래 양사언이 공부를 하였다는 봉래대는 바위산으로 삼일포 호수 전경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전망대였다.


귀로(歸路)


삼일포를 뒤로 하고 아쉬운 발걸음을 온정각으로 돌렸다. 점심식사를 한 후에 몇가지 기념품을 샀는데 1인당 300불 이상은 사지 못한다.

설봉호로 돌아오는 도중에, 날아가던 매가 앉아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는 모양과 같은 'ㄱ'자 바위가 보였다. 가이드 아가씨는 매바위를 보면서 소원을 말하라고 한다.

"육로관광이 활성화되어 자유왕래가 이루어지고, 평화통일의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상팔담과 만물상, 총석정 등, 절경을 모두 보지 못하고 귀로에 오르게 되어 못내 아쉬웠지만, 다음 육로관광을 기약하며 설봉호에 올랐다. 날씨는 여전히 한점 티없이 미소짓고 있었다.


* 금강산 관광 사진 필름을 카메라에서 꺼내다가 실수로 햇볕에 노출되는 바람에 타버려서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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