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수채화
봉숭아 학당
출석부를 펼치며
“오늘이 며칠이지?” 습관적으로 물었다.
“오늘은 6.25 인데 선생님이 그것도 몰라요?”
면박을 준 녀석은 3학년에서도 말썽꾸러기로 소문난 오서방 재덕. 어디로든 1등만 하면 된다며 줄곧 뒤에서 1등을 놓치지 않는 녀석이다. 그러면서도 어쩌다 자기보다 낮은 점수를 받는 녀석이 나오면(드문 일이지만) "에이~, 죽어라. 죽어." 라고 노래한다. 수업 중에 영포(영어를 포기한 학생)를 자칭하며 꿈나라 여행을 하든가 잡담으로 수업분위기를 흐리는데, 코메디 프로 '봉숭아학당'에 나오는 주인공을 닮아서 오서방으로 통한다. 뒤룩뒤룩 살찐 얼굴에 흘리는 징그러운 미소를 상상해보라.
‘짜아식! 곱게 대답을 하면 될 것을 이렇게 면박을 준담’
나는 조용히 칠판에 ‘6’을 쓰고는 오서방에게 읽어 보라고 했다.
“그건 ‘육’이잖아요.”
“틀렸어. 이건 ‘오’야.”
“네????????”
“조금 전에 오늘은 ‘육이오’라고 하지 않았니? 그런데 지금은 6이 ‘육’이라고 하니 스스로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냐? 오늘은 ‘6’이 ‘오’야”
아이들의 환호 속에 갑자기 거짓말쟁이가 된 오서방, ‘고소하구먼. ’
그런데 이 녀석이 앞으로 나오더니 분필을 집어 들고 칠판에 ‘10’을 썼다.
“선생님 읽어 보세요”
나는 오서방의 의도를 눈치챘다. 내가 방금 말한 것을 역이용하려는 것이다.
'이걸 뭐라고 읽어야 할까? 10이라고 하면 10.26사태를 모른다고 핀잔을 줄 것이고, 6이라고 하면 숫자도 모른다고 놀릴 것이다'
나름대로 머리를 굴리다가 학생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십”
“틀렸어요. ‘육’이에요. 선생님이 10.26사태도 몰라요?”
예상했던 반응이 나왔다.1979년 10월 26일 밤 궁정동 중앙정보부 안가(安家)에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金載圭)에게 시해당한 사건을 오서방이 알고 있다는 것이 신통하다. 더구나 이렇게 임기응변을 하다니...저 머리로 공부하면 잘할 수 있을텐데...
아이들과 열심히 책 속을 산책하는데 어디서 코고는 소리가 퍼져나간다. 왠지 조용하다 싶었더니 역시 오서방이다.
“잠자리 일어나!” 무의식중에 잠자리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잠자는 녀석' 이라고 말하려 했는데 어쩌다보니 ‘잠자리’가 되어버렸다.
“저는 재덕이에요. 제가 왜 잠자리에요?”
임기응변을 해야했다.
“오늘도 잠을 자리. 내일도 잠을 자리. 수업 시간에 만날 잠만 자니 잠자리지. 그것도 말썽꾸러기 고추잠자리야.”
“‘고추잠자리요? ㅎㅎ~ 그러면 여자가 졸면 무슨 잠자리인가요?”
“보리잠자리요!” 오서방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박서방이 끼어들며 말했다.
‘보리잠자리'라? 창가에서 교실 안을 기웃거리던 새가 학생들의 웃음소리에 놀라 날아갔다.
그 반에서 재석이와 꼴찌서 1,2등을 다투는 박서방 재형. 과부 사정은 홀아비가 안다고 어찌나 죽이 잘 맞는지? 가끔은 수업 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녀석이 가방을 둘러메고 어깨춤을 추며 징그러운 미소를 흘린다. 꾸중을 해도 그때 뿐이고 대책이 서지 않는 녀석들. 그래서 그 반에 들어갈 때는 봉숭아학당에 들어가는 기분이다.
수업이 끝나갈 무렵, 어디선가 “개새끼”와 “씨발”이라는 욕설이 귀를 때린다. 아니나 다를까... 창가 쪽 교실 맨 뒤에서 항상 옆자리에 같이 앉아 있는 오서방과 박서방이었다.
"이리 나와. "
그런데 앞에 나와서도 두 녀석은 여전히 말다툼이다.
“선생님! 오서방이 방구를 뀌었어요. 냄새가 지독해서 공부를 못하겠어요.”
“너 언제 공부를 했었니? 책도 펴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교실에서 방구를 뀌면 학습 분위기 망치잖아”
“선생님! 방구가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오서방이 물었다.
“문에 가서 방구를 뀌렴. 그러면 문방구가 될테니”
나는 박서방에게 돌아섰다.
“그런데 너는 왜 교실에서 욕을 하니?”
"그러면 어디서 욕을 해요?"
“바다나 온천에서 하렴. 해수욕도 하고 온천욕도 하고 더운 여름철에 얼마나 좋아”
나는 학생들에게 돌아섰다.
“여러분 앞으로는 욕하지 말고 고운 말을 쓰도록 해요. ‘개새끼’ 대신 강아지라는 좋은 말이 있잖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