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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da Jan 02. 2018

비극의 외피를 쓴 희극

<더 킬링 오브 어 세이크리드 디어>



이런 류의 영화를 싫어하는 친구가 생각이 났다. 불친절하고 믿도 끝도 없다며 욕을 퍼부어댔지. 동시에 이 영화는 막힌 코가 슬그머니 열리는 느낌이 들게 했다. 영화란 이런 뻔뻔한 맛이 있어야지.


인간사 자잘한 모~든 이야기를 정치로 담으려는 영화들로 피곤해하던 차였다. 한국영화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모든 직업군과 계층을, 모든 웃음과 슬픔을 거대서사와 구조에 기대려는 인상. 서사는 실제 사건에 붙들린 듯 힘이 없다. 실화는 이미 끝이 난 사건이고 영화의 이야기는 지금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인데 후자가 더 죽은 듯 보였다. 이야기의 끝에는 언제나 법이 있고 법적 판단만이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인냥 인간들을 훈계한다. 정치 자체나 정치적 옳음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지겨움, 지루함… 곰곰히 생각해보면 옳음, 옳음, 옳음을 강조하는 상황은 한국영화만의 문제는 아닌듯 하다. 그런 지루한 상황에서 만난 영화였다(사실 <패터슨>이나 <고스트스토리>를 더 먼저 만날줄알았는데).




  유명한 외과의사 스티븐(콜린 파렐)은 남모르게 청년 마틴(배리 케오간)을 만나고 있다. 스티븐은 바쁜 일정에서 시간을 내어 그를 만난다. 심지어 시계를 선물로 줄 정도로 마틴에게 신경쓴다. 마틴은 스티븐의 가족들과도 만나 좋은 인상을 남긴다. 점차 마틴은 밤 늦게 개인 전화를 하거나 병원 주차장에서 힐끗 보이거나 하면서(소오름;;) 스티븐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마틴의 집에 초대받은 스티븐은 마틴 엄마의 열렬한 구애(의사들은 손이 아름답더라하며 손을 애무함. 더럽;;)를 거절하는 일 이후 마틴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둔다.
  어느날, 스티븐의 아들 밥(써니 술리치)의 다리가 마비된다. 신체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밥이 갑자기 걸을수가 없게 된 것이다. 스티븐과 안나(니콜 키드먼)는 호전되지 않는 아들을 두고 괴로워한다. 그런 스티븐에게 마틴은  ‘생각한 일이 일어난거다, 당신은 내 가족 중 한명을 죽인거고 이제 선생님은 자기 가족 중 한명을 죽여야한다. 그래야 균형이 맞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는 앞으로 일어날 증상을 순서를 말해주는데, 첫번째는 마비, 두번째는 기아, 세번째는 눈에서 피가 흐르고 마지막은 죽음이라 예고한다. 이런 말을 들은 스티븐은 배가 고프지 않다며 아무것도 먹지 않는 아들에게 도넛을 입에 억지로 우겨넣으며 격앙된 모습을 보인다. 걷지 못하는 아이를 휠체어에서 일으켜 질질 끌며 억지로 걷게도 해보지만 아들은 전혀 호전되지 않는다. 곧이어 딸 킴(래피 캐시디)도 다리가 마비되고 아무것도 먹지 않는다. 부인 안나는 스티븐이 과거 마틴 아빠를 수술할 때 중대한 의료과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마비된 딸이 병원 밖의 마틴과 전화통화하면서 다시 걷게되는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한다. 안나는 마틴의 집에 찾아가 ‘남편이 실수한 일을 왜 나와 아이들이 댓가를 치뤄야하냐’고 묻는다. 그러나 마틴은 ‘지금 일어나는 일이 공평한진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정의에 가까운 일’이라고 말한다. 안나는 스티븐의 과실을 동료의사에게서도 확인을 하고 스티븐에게 모든 화를 쏟아붓는다. 스티븐에 의해 집 지하에 포박된 마틴. 안나는 마틴의 발에 입을 맞추고 무릎을 꿇고 속죄하지만 앞으로 가족에게 일어날 화를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닿고 중대한 결정을 한다. 밥의 눈에서 피가 흐르는 세번째 단계가 오자 스티븐은 일을 실행에 옮기고 저주는 끝이 난다.




  <더 킬링 오브 어 세이크리드 디어>는 비극의 외피를 쓴 희극이다. 제목에서 ‘제물’이나 ‘번제’를 떠올렸다면 그것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작품과의 관련성 때문일 것이다. 아가멤논은 트로이 전쟁을 위해 대함대를 출항하려 하지만 풍랑으로 발이 묶이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의 큰 딸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친다.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와 결혼시키려 한다는 거짓말로 딸을 아울리스로 데려오고 결국 아울리스에 이피게네이아와 어머니 클뤼타임네스트라가 도착한다. 모든 계략을 알게된 클뤼타임네스트라는 아가멤논을 비난하고, 아킬레우스 역시 이피게네이아를 구하려 하지만, 희생 제물로 바쳐 출정하길 원하는 병사들의 압박으로 비극적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아가멤논에게는 딸을 희생하고서라도 전쟁을 수행해야한다는 책임감과 함께 딸을 제물로 바쳐야한다는 인간적 고통의 비극이 녹아 있다. 결국 조국을 위해 제단에 목을 내밀고있던 이피게네이아는 아르테미스 여신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는데, 이때 이피게네이아를 대신해 죽은 것이 암사슴이었다.
   <더 킬링 오브 어 세이크리드 디어>는 자기 자식을 제물로 바쳐야하는 아버지의 슬픔, 어머니의 원망을 효율적으로 삭제했다. 인간의 시점을 벗어난 듯한 카메라, 감정이 소거된 기계적인 대사 등 인물에 감정이입 할 수 없다. 부부는 그 무엇보다도 가족이란 체제의 유지를 위해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끔찍한 것은 제물이 될 운명인 자식들까지 그렇게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어머니의 속죄는 우스꽝스럽고 러시안룰렛하듯 총살하는 아버지의 자식 살해장면도 장난스럽다. 아버지를 위해 자신이 기꺼이 제물이 되겠다 고백하는 자식들… 비극 속엔 그런 부모와 자식은 없었다. 가족 구성원 위에 군림하는 아버지 스티븐의 모습은 과거 란티모스의 작품 <송곳니>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속시원한 구석이 있었다. <송곳니>(2009)는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가족의 이야기를 다룬다. 세 자녀는 어떠한 개별성을 가지지 않는 인물들로 이름조차 명명되지 않는다. 가족구성원은 아버지가 만든 무대에 정해진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이거나 하나가 사라져도(큰 아들의 부재) 다른 자식들로 대체 가능한 애완견 정도의 소극적 의미 만을 갖는 듯 보인다. 자식들 중 큰 딸은 유일하게 외부를 상상하는 인물인데, 그녀는 자신의 송곳니를 강제로 탈락시키고 가족이란 울타리를 벗어남으로써 구조에서 탈출한다. 영화 말미의 열리지 않는 트렁크는 이 모든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카메라가 그들의 이야기로부터 거리 두고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어처구니 없는 비극적 상황에 실소를 유발시킨다. 자식들의 행위, 사고, 언어까지 지배하는 군주인 아버지가 믿기 힘든 외부의 강력한 힘, 저주하는 자의 능력을 인지하고 자식을 죽여야만 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그는 기꺼이 그렇게 행하는 놈이 되고만다. 인간이 당연시하는 관계나 감정은 연약하기 그지 없다. <더랍스터>(2015)에서 데이비드(콜린파렐)는 (싱글로 남으면 짐승이 되고 마는)호텔 안에서 결점을 흉내내는 절름발이 존처럼 기만적이지도 못하고 자신의 파트너였던 무감한 여자처럼 연기하지도 못하며 나이든 여자처럼 자살하지도 못해 숲으로 떠난다. 그러나 사랑이 금지된 숲에서 오히려 사랑에 빠지게된다. 동일한 결함, 서로에 대한 이해와 계산이 호텔에서 데이비드의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면, 숲에서 데이비드는 사랑을 금지하는 처벌의 힘으로 인해 오히려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문제는 누구를 사랑하느냐, 또는 사랑이 진정하냐 는 식의 질문이 아니다. 란티모스는 데이비드가 부재한, 균형이 한쪽으로만 기울어진 텅 빈 테이블을 비추며 허약하고 허술한 감정과 관계를 시니컬하게 비웃는다. <더 킬링 오브 세이크리드 디어> 역시 가족의 숨통을 틀어쥔 저주와 가족에게 닥칠 운명이란 억압적 ‘상황’ 속에서 합리적으로 잘 훈련된 인간들의 무지와 관계의 허술함을 드러낸다. 자기를 둘러싼 구조로부터 성격을 부여받고 비극에서의 탈출에 실패하고 마는 인간들을 보고 웃을 것인가 울 것인가. 눈물이 났다면 그 농담에 잔인한 구석이 있어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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