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쯤 전이던가.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아" 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여행은 좋은 것, 여행은 꼭 해야 하는 것 등의 주입식 교육을 받은 입장에서 그 사실을 인정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하여간 인정하게 되었다. 금쪽 같은 내새끼를 보다가, "저 아이는 변화에 대한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아이, 불확실한 것을 힘들어 하는 아이" 라는 설명을 들으면, 내 얘기 같기도 하고. 하여간 난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 코로나에 걸려서 일주일 격리하는 건, 전혀 답답하지 않지만, 여행을 가기로 한 다음부터는 쿵쾅대는 심장이 진정대지 않았다.
놀랍게도 나는 이미 이태리를 많이 왔다갔다 했다. 첫 회사가 Digital STB 를 만드는 회사였는데, Digital STB 시장이 일찍이 크게 열린 곳이 이태리였기 때문에, 아마 열번도 넘게 왔다갔다 했던 것 같다. 행선지는 방송국이 있는 밀라노와 토리노였다. 걸어가는 길에 보여서, 밀라노 두오모 성당은 몇차례 간 적이 있긴 하지만, 그냥 일만 했다. 그 때는 나도 젊고 생기발랄할 때라서, 친절한 이태리 방송국 직원들의 넘치는 배려를 받을 수 있었고, 그 덕에 즐거운 추억이 정말 많았더랬다.
출장 다닐 일이 없어지고 난 다음부터 해외는 3-4년에 한번 친구 만나러 미국 가는 것 말고는 갈 일이 없었는데, 그 미국에 있는 친구가 작년 연말에 갑자기 "이태리 가자" 라고 얘기했다. 내 친구는 원래 유럽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유럽은 렌트카로 여행하기가 쉽지 않아서... 라고 했던가? 하여간 (내가 아직 난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구나 라는 걸 인정하기 전에) 유럽여행 가자고 말할 때마다 시큰둥해 하던 친구가 갑자기 이태리에 가자고 하니 깜짝 놀랄 일이었다. 페이스북에 이태리 남부 해안 도시 사진을 봤는데, 보기 시작하니 계속 보여줘서 마음이 동했다나 어쨌다나.
좋지좋지. 반사적으로 대답은 했는데 무서웠다. 심지어 중간에 비행기표를 끊으려다가 헤프닝이 생겨서 여행을 못가게 될뻔 했었는데, 그 때 굉장히 안심이 되고 좋았었을 정도로 무서웠다. 상담일을 하는 언니한테 나 너무 불안하고 무섭다고 했더니, "요즘 약 잘 나와. 불안증 약 처방 받으러 가자." 라고 쿨하게 얘기 하길래, 너무 불안해서 민폐가 될 것 같으면 처방 받아야 겠다고 생각하고 우당탕탕 여행이 결정되었다.
나같은 친구를 친구로 둬서 고생이 많은 내 친구는, 본인도 여행이 익숙하지 않은데, 내가 불안해하니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도 아무 것도 안 할 수는 없으니까, 나도 몇가지를 하긴 했다.
일단, 알쓸신잡 이태리 편을 봤고, EBS 토스카나 다큐멘터리는 13분 정도 보다가 잠들었고, 이태리 먼나라 이웃나라는 시저랑 클레오파트라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해서 (심지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걸 알고 있었다고... 그렇다.. 나는 역사와 상식에도 잼병이다 ㅠ.ㅠ) 빈정상해서 그만 보기 전까지 봤다. 우리 여행 코스에 따라 ChatGPT 한테 관광 코스 추천해 달라고 질문하고 위키피디아랑 대충 조합해서 몇장의 문서를 작성했고, 구글 지도에 "저장" 이라는 기능이 있다는 걸 배워서, 평점 높은 식당 들 몇개를 저장했다. 이 와중에 내 친구는 구글 시트에 날짜별로 이동 방법, 장소 등을 다 적어두고, 예약도 다 했다. 이 정도면 몸만 따라가서 짐이 되는 시나리오로 봐도 무방하겠다.
이번에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나의 쓸모없음을 경험한 내 친구는 이제 같이 여행을 가자는 말을 다시는 꺼내지 않을 것 같은 관계로, 머라도 남겨둘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사람들은 유튜브로 주로 올리지만, 급격히 진행 중인 노안 때문에 멀리 잘 보이는 안경을 쓰면, 핸드폰이 안 보이는 관계로, 촬영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하고, 글쓰는 건 좋아하니까 글을 써보려고 한다. 친구랑 둘이서만 보고 싶지만, 오랜만에 브런치에서 글 쓰는 기분을 내고 싶은데, 둘이서만 볼 방법은 없어서 발행을 할 생각이니, 지금 보고 계신 내 친구가 아니신 분은 이거 말고 다른 좋은 유익한 여행기 보시면 좋겠다.
여행이 무서운 나와, 여행을 귀찮아 하는 내 친구, 여행할 줄 모르는 아이 둘이서, 내일은 비행기 타는 날. 날짜를 잡아도 하필 부활절 주간. (알고 잡은 건 당연히 아니다) 바티칸에 수많은 사람이 모이기 때문에 빨리 로마를 벗어나야하고, 일요일, 월요일은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는다는 사실을 (가까스로 뒤늦게) 알게 되어 햇반에 참치, 그리고, 덜덜 떠는 나를 위해 회사 사람들이 주섬주섬 챙겨준 이런저런 여행 물건들이 들어 있는 여행가방은 (나와 달리) 준비가 완료되었다.
친구는 미국에서 비행기 타고 오고 있다. 한국에서도 일정이 있다보니, 미국/한국/이태리를 오가야 하는데, 가격이 애매하여 한국으로 와서 오자마자 나를 데리고 이태리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다 신신당부했다. 친구말 잘 들으라고. 네네. 비행기출발 12시간 전. 얼른 한숨 자고, 친구 만나서, 말 잘 듣고, 가야지. 덜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