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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깅이 Apr 10. 2023

1일차 - 로마

여행이 무서운 아이의 이태리 여행기 (2)

잤는지 안 잤는지 애매한 시간을 보낸 후, 코로나 동안 운행이 중단되었던 공항 버스를 반갑게 타고 인천 공항으로 와서 친구와 접선에 성공했다. 평소 정수리 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숱한 지병을 안고 다니는 내 친구는 장시간 비행기를 타면 보유 지병 중 5개 정도가 발현되기 때문에, '돈 벌어서 비행기는 비지니스' 라는 원칙을 세운지 몇 년 되었다. 나도 덩달아 비지니스를 끊고, 난생 처음 라운지라는 곳에 들어왔다. 사실 비지니스는 꽤나 많이 탔었다. 어렸을 때 유럽 출장 다닐 때는 오버부킹이 워낙에 많아서, 혼자 순진한 눈동자를 껌뻑이며 카운터로 가면, 평소와 다른 색깔의 비행기표를 슥 내밀어 주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럴 때는 라운지는 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이 첫 라운지 방문이었다.


라운지에는 샤워장이 있고, 만화방에서나 볼 수 있는 수면에 용이한 긴 의자들이 있고, 주방장이 소금치는 걸 잊은 듯한 스크램블 에그를 포함한 간단한 음식들이 있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먹고 싶다고 하자, 어떻게 하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제조할 수 있는지 설명해 줬는데 왠지 못 알아먹은 듯한 나를 졸졸 따라다니며 안내해주던 친절한 직원분이 있었다. 이미 한국오는 비행기에서 여러잔의 술을 먹고 기분이 좋아 보인 내 친구는, 샤워 후 맥주 한잔을 더 먹고 기분이 더 좋아진 것 같았다.


이태리 가는 비행기는 미국 가는 비행기에 비해 신형이 아니다. 처음엔 그래서 좀 섭섭했는데, 가만 살펴보니, 이 아이가 180도 침대 형태로 의자를 펼쳤을 때, 키 큰 사람은 무릎을 굽혀야 하는 정도의 길이였다. 키 크신 분들한테는 미안하지만, 뭔가 굉장히 이득을 본 기분이랄까? 이 와중에 옆에 자리 번호 4K 를 보고, "내 TV 는 이리 허잡한데, 저 자리는 4K (해상도)냐" 고 말했다가 친구의 어이 없는 한숨 소리를 들었다. 그나마 직업이 비슷해서 나의 어이 없는 짐작을 이해라도 해 줘서 고마웠다. ㅠ.ㅠ


비지니스의 장점은 음식이 레스토랑처럼 정갈하게 나온다는 점도 있지만, 사실 이건 크게 중요하지는 않다. 고도가 높아지면 사람 입맛이 좀 달라지기 때문에, 어떤 음식이든 고추장 달라고 해서 비벼먹으면 economy 식사도 꽤나 맛나게 느껴진다. 물론 술을 좋아한다면 좀 다를 수는 있겠다. 중요한 건 역시 자리다. 편안하게 다리 쭉 뻗고 푹 자고 좋은 컨디션으로 일이든 여행이든 시작할 수 있다는 게 비지니스의 가치인 것 같다. "당신의 시간은 이 정도의 가치가 있습니다" 같은 느낌? 이번 여행에서는 또 한가지, 어렸을 때 몰래 승급일 때는 못 느꼈는데, 뭔가 대접받는 것 같은 기분도 좋았다.




저녁 8시전에 호텔에 도착하면, 로마야경을 둘러보기로 계획했었다. 비행기는 10분 연착해서 6시 10분 도착.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긴 복도를 지나 일단 화장실을 갔다. 남여 화장실이 어디인지 찾는다고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고, 키크고 잘 생긴 청소하는 아이인지 관리하는 아이인지가, 평생을 해 온 듯한 능숙함으로 따뜻한 눈웃음을 지어줬다. 이 기분 좋은 설렘을 시작으로 이태리 공항에서는 신세계를 경험했다. 이태리와 한국이 어떤 뭔가 신뢰가 형성되어 있다며, 입국검사는 스스로 여권 찍는 것으로 시작하자마자 끝났고, 나가자마자 짐이 나와 있었고, 렌트카 빌리는 곳까지도 헤매지 않고 바로 잘 도착했다. 도시락 wifi 는 소문대로 가끔 잘 터지지 않았지만, backup 으로 약간 준비한 로밍데이터가 있었기 때문에 걱정 없이 출발.


지나치는 남녀노소, 거리의 차들 모두, 양보 따위 1도 없이 전투적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전투적으로 달려들면서도 눈이 마주치면 따뜻하게 웃어줘서 기분이 좋았다. "저 차들은 공중부양해서 넣고 빼나봐" 라는 나의 헛소리를 친구가 진지하게 받아줄 정도로 놀라울 정도로 다닥다닥 일렬주차된 차들이, 비가 개어서 깨끗하고 환상적인 이태리 하늘과 일몰보다 더 인상적이었다.

초점이 나가버렸지만, 하여간 빈틈없이 차들이 주차되어 있다.



호텔 체크인. 영화 주인공보다 잘 생기고 키도 큰 아이가 이런저런 안내를 해 주며, 호텔델루나의 여진구보다도 더 동굴같은 목소리로 "11시까지 여기 있으니까, 궁금한 건 뭐든지 물어보러 오렴" 이라고 말하며 역시 또 평생을 해온 듯한 능숙함으로, 내 눈을 깊게 쳐다보며 따뜻한 눈웃음을 지어주는데, 이태리 야경보다 호텔 프론트에서 대화를 하는 게 더 아름다운 호사가 아닐까란 생각을 잠시 했다.


호텔에서 로마 시내까지는 안전하게 우버 블랙을 이용하기로 했다. 가격이 얼마인지는 미리 나오고, 나온대로 결재되니까 비싸도 안심이 됐다. 이태리 우버 블랙은 차량을 맞춘 건지 정말 커다란 까만 봉고가 온다.


로마 야경 투어는, 구글에서 검색해서 나온 결과들을 토대로, 산탄젤로 성  => 이어진 다리 끝까지 걸어가서 천사 보이게 사진 찍고 => 베드로성당 야경을 멀리서 바라본 후 => 아래 쪽 다리로 내려와서, 물에 비친 성을 보며 사진 찍고 => 나보나 광장 => 판테온 => 트레비 분수 => 베네치아 광장 => 콜로세움 을 순서대로 걸어다녔다. 2시간 좀 넘게 걸렸다.


부활절이어서 인지 사람들은 많았다. 근데 이 사람들이 "와 사람 너무 많아 싫어" 이런 느낌이 아니라, 이들도 하나의 풍경인 듯 어우러지고 보기 좋았다. 평소에 자주 못 보는 유럽인들이 신기해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하나 같이 다들 영화배우 같았으니까.


개인적으로 경주에서 석굴암이랑 감은사지 3층 석탑 보고 울컥 눈물이 나고, 평생 가장 좋았던 건물이, 프랑스 마들렌 사원이었어서 인지, 파르테논 신전 비슷하게 생긴 판테온의 정면이 너무 좋았다. 세월의 느낌인지 분명히 돌인데, 마치 하얀 나무 같은 느낌이 들어 신기했고, 한없이 크고 높은 청동(?)문도 좋았다. 베네치아 광장의 기념관, 그 기념관에 흐느적하게 눕듯이 앉아 계신 조각상과 탁 트인 거리도 참 좋았고, 산탄젤로성과 이어진 다리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생동감으로 서 있던 조각상도 좋았다.


트레비호수에서는 한국에서 준비해 간 10원짜리, 50원 짜리들을 3개씩 챙겨서 오른손에 쥐고 왼쪽 어깨 너머로 던지며, 던진 돈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소원을 빌었기 때문에, 별 감흥이 없었어도 되지 않았을까 싶고, 가장 유명한 콜로세움은, 인생을 즐기던 로마인들이 가장 좋아했던 것이 동물과 검투사들을 싸우게 하고 구경하는 것이었다는데, 전쟁에서 이긴 기념으로 동물이고 사람이고 만이 넘게 죽는 축제를 했다는 걸 어디에선가 읽고 감성이 무너진 관계로 아무 느낌이 없었다. 어렸을 때, 유행했던 홍콩영화들 보면서, 주인공이 자기 여자 친구 한명 구하겠다고, 조폭이긴 하지만, 딱 봐도 소년 가장들에 사연 많을 것 같은 수백명을 총으로 쏴 죽이며 앞으로 전진하는 모습을 보며 느낀 혐오, 분노.. 머 그런 느낌과 비슷한 감정이 솟구쳤다.


아래 쪽 다리에서 찍히는게 젤 예쁜 산탄젤로 성과 베네치아 광장의 기념관
실물이 100배 아름다운 판테온과 사진이 100배 아름다운 콜로세움


로마 거리는 다 작은 돌들로 만들어진 길이라 실제로 걷는 걸음수보다도 피로감이 좀 높았다. 출발 전날도, 비행기에서도 그리 숙면을 취하지 못해서 걱정을 했는데, 덕분에 침대에 누워서 "눕자마자" (친구 말로는 3초만에) 아주 푹 잘 잤다.


 


(덧붙임) 이번 여행의 코스는 다음과 같다.


토요일 : 로마 도착. 렌트해서, 주차가 용이한 외곽 호텔에서 친구가 평생 모은 메리엇 포인트 탕진하여 1박. 저녁 8시전에 체크인 하는 경우, 로마 야경 투어 출발.

일요일 : 호텔옆 까르푸에서 생존을 위한 음식 구매. (까르푸가 문을 열었다면) 치비타 디 반뇨레조, 오르비에토 들렸다가, 몬테풀치아노에 있는 숙소로 이동. 숙소 옆에 딸린 식당에서 저녁 식사.

월요일 : 부활절 다음 월요일. 문 여는 식당 없다고 함. 햇반에 김치, 참치 먹고, 동네 산책하고 하루 쉴 예정.

화요일 : 토스카나 사진에 젤 많이 등장하는 발도르차 평원, 피엔차, 몬탈치노.

수요일 : 시에나, 산지미냐뇨 들렸다가, 주차가 용이한 피렌체 외곽 숙소 체크인

목요일 : 자전거 나라 반일 투어. 우피치 미술관 등 수박겉핥기 투어 예정. 이 투어가 두오모에서 끝나는데, 돈내고 왜 그 고생을 해야 하는지는 생각해볼 부분이긴 하나, 하여간 이어서 두오모 탑을 오르는 브루넬레스키 패스를 예약해 뒀음. 체력을 불꽃같이 태우고 나서 밥 먹고 미켈란젤로 언덕에 기어 올라가서 (헥헥) 멍때리다가 숙소로 돌아갈 예정.

금요일 : 지금 가면 볼 게 없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예쁠 때보면 예쁘겠지" 라는 마음의 눈을 장착하고 돌로미티로 이동. 카레짜 호수에서 1박.

토요일 : "예쁠 때보면 예쁘겠지" 눈을 계속 장착하고 날씨상 가능한 곳을 들렸다가 베니스 육지쪽 호텔에서 친구가 평생 모은 힐튼 포인트 탕진한 호텔 체크인.

일요일 : 산마르코 광장 슬쩍 보고, 마지막 만찬을 즐긴 후, 베니스 공항으로 오후에 가서 로마로 국내선 타고 가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 탑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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