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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민령 Oct 08. 2016

<구르미 그린 달빛>의 병연

김삿갓의 이야기

김삿갓 시조집을 뒤적이다가 김병연이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병연... 명사란 명사는 죄다 잘 잊어버리는 나이니 지나칠 법도 한데 "병연아..." 하던 박보검의 목소리가 인상에 남아 들춰보게 되었다.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의 세자 이영은 실존 인물인 효명세자가 모델이라 한다. 영의정 김조순 역시 외척을 동원하여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를 펼친 실존 인물로 홍경래의 난, 효명세자와 동시대 사람이다. 그럼 병연은 누구인가?


병연의 조부인 김익순은 홍경래의 군사들에게 항복하였다 대역죄로 폐족을 당한다. 형, 하인과 함께 신분을 속이고 숨어살던 병연은 조부의 죄는 손자까지 죽이는 게 아니라는 판명이 내려져 후일 복권된다. 이래서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병연과 홍경래의 난이 연관된 것으로 그려진 모양이다.


어디선가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지 않았는가? 누군가의 잘못을 맹박하여 장원 급제했으나, 나중에 알고보니 그 누구가 자기 할아버지더라는 이야기. 그래서 벼슬에서 물러나 세상을 떠돌아다녔다는 이야기. 그것이 병연의 이야기였다. 할아버지를 공개적으로 맹박한 덕분에 급제했던 병연은 스스로 죄인임을 자처하여 늘 삿갓을 쓰고 돌아다녔다. 그래서 김병연이라는 본명보다 김삿갓 또는 김립으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걸식을 하고 돌아다녔으니 먹고 자는 것이 어디 변변했겠나. 어찌어찌 구한 끼니가, 구름이 비쳐보일만큼 멀건 죽이기도 했고,

    네 다리 솔 소반 위 죽그릇 속을

    하늘 빛 구름 그리메 어리는 도다


어떤 날에는 토굴 속에서 웅크리고 자기도 했던 모양이다.

    하늘 높기 만리라도 고개 못 들고

    땅 넓기 천리라도 두 다리 못 펴네


기르던 매를 잃고는 아전들에게 잡아오라고 호통치는 고을 태수를 놀려 먹기도 하고

    청산에서 얻어다가 청산에서 잃었으니

    청산에게 물어보고 청산이 대답없거든

    청산을 즉시 잡아오너라


운자에 따라 시를 지어주고는 서당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도 했다.

    하고많은 운자 중에 하필이면 멱자인고

    저 멱자도 어려운데 하물며 이 멱자라?

    하룻밤 쉬어감이 멱자에 달려쓰니

    산골훈장 아는 건 멱자 뿐인가 하노라.


남편의 무덤 앞에 무덤을 써두고는 파가지도 않고, 사또에게 청해봐야 무덤 쓴 사람을 잡아오라 할 뿐이더라는 어느 부인의 하소연을 듣고는 탄원서를 대신 써주기도 했고,

    파간다 파간다 함은 저쪽에서 항상 하는 말이요

    잡아오라 잡아오라 함은 이곳 사또 늘 하는 말일세

    오늘내일 해도 천지는 변함없고 세월은 여전하나

    이탈 저탈 하다보니 적막강산이 금새 백년일세


(이 탄원서를 본 사또가 즉시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한다) 겨우 13살에 장가를 든 꼬마 신랑을 놀려 먹기도 했다.

    솔개를 무서워할 체구 갓에 가려 아니 보이니

    어떤 이가 기침해서 내뱉은 대추씨인가?

    사람마다 모두 이와 같다면

    한배에 대여섯은 낳을 수 있겠지.


성깔도 어지간히 되었던 모양이다. 어느 산골 훈장이 의기양양해서는 훌륭한 옛 문장을 천시하고 김삿갓도 멸시하더란다. 이에 시를 지을테니 하룻밤 묵어가게 달라고 청하고는 훈장이 운을 부르는 대로 읊은 것이 아래의 시라고 한다.

    두메 산골의 완고한 백성 괴이한 습성에 젖어서

    문장 대가 헐뜯으며 트집을 잡는구나.

    작은 잔으로 어찌 바닷물을 측량하고

    쇠귀에 경 읽는다고 그 글을 깨달으랴!

    네 만약 기장이나 먹는 간교한 들쥐라면

    나는 용사비등한 대문장가로다.

    죄로 치면 응당 태형감이나 잠시 용서하노니

    감히 존전을 향하여 말대꾸를 삼가라.


저래가지고 그날 그 서당에서 잠을 자기는 잤으려나;;


뭐... 그렇게 살다가 간 모양이다. 단절된 시절, 먼 옛날이라고만 여겼던 역사 속에서 갑자기 피와 살과 감정을 지닌 사람이 나오니 멈칫했다. 김삿갓의 4대 후손이 아직까지 살아있다고 하니 그렇게 먼 과거의 이야기조차 아니었다.


조선조에서 드라마와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시기가 있다. 광해군, 인조, 사도세자, 정조... 이런 작품들에는 지나간 역사에 대한 아쉬움과, 바램과, 때로는 원망이 서려있다.


그 시절의 사람들도 지금의 우리처럼, 스스로 답답해 하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시절을 발버둥치며 살아가지 않았을까. 하기야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는 서유럽과 일본을 제외한 거의 전 세계가 식민지 아니었나. 딱히 우리 나라의 역사만 유난히 못났다고 할 일도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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