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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민령 Jun 09. 2019

영화 <기생충>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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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 주의! 초반부터 끝까지 다 스포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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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 

필이면 영화보기 몇 시간 전에 인보사 관련 기사를 봤었다. 우리나라는 인구가 적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미국, 독일, 영국, 캐나다, 중국에 이어 전세계 임상 시험 점유율 6위라고 했다. 또 전 세계에서 임상시험이 가장 많이 이뤄지는 도시는 서울이라고 했다. 임상시험을 꿀알바로 여기고 참여하는 들은 대개 가난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기택(송강호 님)네 가족처럼 반지하에 살았을.


그리고 또 어쩌다가 서지현 검사의 포스팅을 봤지.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약자에게만 착할 것을 요구하는가, 왜 이렇게 약자에게만 엄격한가’라는 절규가 있었다. 속으로 생각했었다. 무서우니까. 강자에게 맞서는 것은 두렵고, 강자를 합리화시켜주며 빌붙어야 떨어질 콩고물이 있으니까. 나보다 약한 이들을 눌러야 내 밥그릇이 줄어들지 않고, 내가 그들과 같은 무리로 보일 위험도 적으니까. 덩달아 나 자신과 타인에게 ‘나는 착함을 중시하는 좋은 사람’이라고 포장할 수 있으니까.


약자들끼리 물고 뜯으며,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분위기는 이제는 제법 흔해졌다. 20-30년 된 아파트에서 예전에도 있었을 층간소음으로 예전에는 없던 살인이 벌어지던 무렵부터, 예전부터 운전이 거칠기로 악명높은 우리 나라에서 예전에는 없었던 보복운전이 늘어나던 무렵부터, 쟤가 나를 무시했다면서 자기보다 약한 사람만 골라서 패는 신통한(?) 분노조절’장애’가 잦아지던 무렵부터, 계속되어 왔으니까. 취직이 어려워진 청년 남성들이 빈부격차를 야기한 구조를 공격하는 대신 고통 올림픽을 벌이며 청년 여성을 공격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라고 본다.

그래서 감정이입이 지나쳤던 건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면서 너무 힘들었다. 한 때는 사업도 하고, 대리운전도 하고, 발렛 알바도 하고, 예식장 친구 알바도 했던 기택네 가족은 건강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피자 상자를 접을 기회라도 애써 붙잡아야 하고, 먼저 있던 알바생에 대해 없는 악담을 지어서라도 피자 가게 알바 자리를 구하려 한다. 사채를 안 썼다 뿐이지, 반지하에서 핸드폰 wifi를 찾아다니는 그들에게는 내일을 생각할 여유 따위가 없다. 기우(최우식 님)는 내년이면 대학에 합격할 거라고 말하지만, 합격한들 등록금을 낼 수는 있을까?


영화 <국제 시장> 시절에 비해 계층 간 이동이 훨씬 더 드물어진 요즘 현실에 따르면, 이들이 동익네 집을 살만큼 부유해질 확률보다는 반지하에서 계속 살아가거나 캄캄한 어둠 속 저 아래, 경찰도  미치지 못하는 어딘가로 굴러 떨어질 확률이 더 높다. (성실 실패에는 재기할 기회를 줘야 한다는 이야기가 왜 그렇게 많이 나왔었겠나. 한번 실패하면 재기하기가 워낙 힘들어서 나온거지.)


 

(2) 두 계급 

이처럼 통계적인 현실(에 대한 인식)이 ‘수석’의 등장과 함께 깨지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기택네 가족은 주인 가족을 속여 하나둘씩 자리를 얻는다. 연습하는 과정이 모두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기택의 아내(장혜진 님)가 예쁘게 플레이팅한 과일을 우아하게 나르고, 기택이 부드럽게 운전하는 장면, 기택이 함께 논의한 대사를 연습하는 장면, 기정(박소담 님)이 미술 과외를 요청받았는데 미술 치료까지 조사해와서 연교를 휘어잡는 장면에서 감탄했다. 단시간에 저만큼 해내는 것은 게으르고 무능하기만 해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비밀의 숲>에 나올 정도로 힘있는 자의 악행만 부지런해야 가능한 게 아니고, 가난하고 약한 자의 악행도 부지런해야 가능한 모양이었다.


기택네는 이 과정에서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약자)라고 볼 수 있는 운전기사와 가사 도우미에게 누명을 씌워 쫓아내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주인없는 집에서 술판을 벌일 때 기택이 약간의 죄책감을 보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자신들의 행동을 반성하지 않는다. 기택의 아내는 돈이 인성이라고 한다. 부부는 그들에게 콩고물을 던져주는 동익네를 자기들에게 속았다며 비웃기 보다는 대체로 좋게 평한다.


기택네 가족이 명백히 나쁜 행동을 한 셈인데, 신기하게도 이들의 사기 행각을 보는 동안 분노나 미움이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봉준호 감독이 이 부분에 코미디를 가미한데다 (웃음 포인트는 기택네가 사기를 벌이는 부분에 많은 편이다), 기택네의 행동이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는 ‘정당방위’라고 인식됐기 때문일 것 같다 (영화 말미에서 기우네는 정당방위라는 판결을 받는다. 문광 남편과의 혈투가 원인이라고 추정되지만 정확히 무엇이 죄목인지 언급하지 않은 채 ‘정당방위’에 ‘집행유예’라는 판결만 언급된다).


이런 인식에는 동익(이선균 님)의 언행도 일조했다. 동익은 운전기사가 젊으니 차 안에서 그럴 수도 있지만, 자기 자리(뒷좌석)을 넘본 것은 아주 괘씸하다고 말한다 (그래놓고 나중에 본인도 흉내내더만). 사는 곳이 달라도 심장이 칼에 찔리면 똑같이 빨간 피를 흘렸던 동익은 (마찬가지로 심장을 찔린 기정에 비해 피가 적게 보이기는 했지만) 영화 내내 ‘선’을 강조한다. 그래봤자 유인원 호모 사피엔스일 뿐인 동익과 기택 사이에는 동익이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천부 계급에 가까운) ‘선’이 있는 것이다. 반지하 방의 냄새를 민감하게 포착하고, 이 냄새를 가장 불쾌해 한 것도 동익이었다.


동익만큼은 아니지만 연교(조여정 님)도 그랬다. 자기 집에서 몇 년이나 일했던, 거기다가 결핵이라는 큰 병을 앓고 있(다고 알고 있)는 가사도우미 문광(이정은 님)을 쫓아내면서, 연교는 문광이 쫓겨난 후 어떻게 될 지 살펴줬을까? 하다못해 돈이라도 조금 더 챙겨줬을까? 캐리어를 싸들고 비탈길을 내려가던 문광의 표정, 비오는 밤 찾아온 문광의 얼굴을 보면,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문광은 쓰이다가 갑작스레 (그리고 말 나오지 않게 조용히) 버려졌고, 누구에겐가 두들겨맞는 상황으로 준비 기간도 없이 내몰렸다.


그래서 기택네 가족이 동익네 집에서 술판을 벌일 때, 너무 조마조마 했다. (1) 어쨌든 기택네가 잘못하고 있다는 인식, (2) 들켰을 때 동익 부부가 이들에게 약간의 온정이라도 베풀 리가 없다는 인식, 이 두 가지 인식이 (3) ‘주인 몰래 술판을 벌이면 꼭 주인이 갑자기 돌아오더라’는 클리세와 합쳐져서 불안감을 고조시켰다. 결국 못참고 영화 보다가 페북으로 도망갈 정도로… (조용한 시간이라 내 좌우 뒤쪽으로 사람이 없어서 주변에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3) 약자들간의 사투

그런데 동익네 가족이 들이닥치기 전에 문광이 먼저 찾아왔다. 귀신처럼 천둥번개가 치는 비오는 밤에. 집 안 어딘가에서 주인 몰래 누군가가 살고 있다는 설정도 엽기적이었지만, 지하에서 살아가는 문광 남편(박명훈 님)의 모습(두더지도 아니고 사람이! 태양 아래 바람을 맞으며 살아가야 할 호모 사피엔스가!)도, 그 아래로 내려가는 길도 기괴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문광의 가족과 기택 가족의 대치 장면은 그보다 더했다. 문광네는 기택네 가족처럼 대왕 카스테라를 하다가 망했다. 사채를 쓰는 바람에 창문조차 없는 지하로 밀려났다는 점이 다를 뿐.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문광의 남편(박명훈 님)이 아닌 기택일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나중에 실제로 그렇게 되지만). 취업률이 낮아 자영업 비중이 높고 식당 간판이 수시로 바뀌는 우리나라에서는, 회사 나가면 ‘치킨집 차린다’는 말이 농담처럼 떠도는 우리나라에서는, 저 상황이 그저 영화 속의 설정으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자영업자들의 어리석음을 탓하는 이들도 있더라마는, 글쎄, 탓하는 그 사람이라고 똑같은 상황에 놓이면 다른 행동을 할까? 백업을 따로 챙길 여력이 없어서 하나에 올인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간절하게 희망을 바라는 상황에서는, 초조하고 불안해지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초조하고 불안해지면 냉철하게 생각하기가 원래 어렵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라거나 ‘이성과 감정이 독립적’이라는 믿음은 착각일 뿐, 어려울수록 이성적이기 힘든 것이 호모 사피엔스라는 동물의 실제에 가깝다(당장 반례가 떠오르는 독자도 있을 수 있다. 당연하다. 생명에는 다양성이 표준이니까. 하지만 개체가 다양하다고 해서 집단에 경향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문광 가족과 기택 가족은 (약자라고 반드시 그러는 건 아니지만) 약자들이 살기위해 서로를 물고뜯는 전형적인 다툼을 보인다. 자기보다 약한 사람에게 더 도덕적이기를 강요하며 (기택의 아내는 자기도 사기를 쳤으면서 문광만 죄인인양 몰아세운다), 상대보다 조금이나마 우위를 점하면 상대를 억압할 드문 기회를 마음껏 누린다 (기택네가 손들고 벌을 서는 장면). 


잠시 유머가 가미되기는 했지만, 문광네와 기택네의 싸움에는 생존이 걸려있었다. 기택의 아내가 문광을 발로 차서 계단으로 밀어버리는 장면이 특히 그랬다. 자칫 문광을 죽일 수 있을만큼 위험한 행동이지만 기택의 아내는 그런 사정따위 봐주지 않는 비정한 모습을 보인다. 죄책감을 느낄 겨를도 없이 바쁠 뿐이다. 계단에서 떨어진 문광은 뇌진탕에 걸려 시야를 잃고, 피 흘리며 방치되어 있다가 사망한다.


비슷한 처지의 문광네와 기택네는 서로 치열하게 다투는 한편 강자인 동익은 옹호 내 숭배한다. 부자들이 위험해졌을 때 대피하려고 만들어 둔 지하 벙커에서, 문광의 남편이 손도 아니고 머리로 신호를 보내며 ‘Respect’을 외치는 장면은 그야말로 뜨악했다. 좌절하고 좌절하다 좌절하는 것조차 포기해버린 일본 사토리족처럼, 문광의 남편은 햇볕 한 줌 들지않는 지하에 만족하며 죽는 순간까지 동익에게 감사했다. 어쩌면 떨어대로 떨어진 이들에게는 강자에게 빌붙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쉬워보이는 선택이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강자에게 의탁하는 경찰 호출이나 동영상 전송이 칼부림보다 훨씬 더 빠르고 효과적이었다 (단숨에 언니 동생 관계가 바뀌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지(예: 오바마 케어)에 반대하는 가난한 사람들도, 학벌만 좋고 지위만 높으면 다 존경해야 한다고 하는 가난한 사람들도 혹시 이와 비슷한 게 아닐려나…



(4) 다시 현실

서울 하늘 아래 똑같이 비가 내렸는데, 두 가족이 처한 상황은 너무 다르다. 동익네는 비 덕분에 미세먼지가 사라져서 좋다며 생일 파티를 준비한다. 반면 기택네는 집이 물에 잠겨 이재민이 된다. 거품 목욕을 즐기는 모습이 잘 어울린다던 기정이 검은 물이 솟아나는 화장실 변기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장면은 ‘꿈은 꿈일 뿐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일깨우는 듯 했다 (지혈을 시도하는 기택에게 그게 더 아프니까 하지 말라던 기정의 죽음은 이 때부터 예견되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


꿈인 줄 알면서도 다혜와의 미래를 상상하기도 했던 기우(그러고보니 어째 이 집안은 아빠랑 자녀의 항렬자가 같냐;;)는 이제 다혜에게 내가 여기에 어울리냐고 묻는다. 생일 파티 자리에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 친하게 노는 모습은, 문광네와 기택네가 목숨을 걸고 다투던 장면과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앞 부분에서 기택과 손을 잡을 때는 냄새가 나는 줄 몰랐던 연교가 기택의 냄새를 뒤늦게 알아차리는 장면도 두 가족의 입장 차이를 고조시킨다.


기우는 문광 부부에게도 좋은 변화가 있기를 희망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사람을 죽이기에 적당한 무기 대신, 당연했어야 했을 현실 밖으로 기택네를 이끌었던(그런 상징이라고 기우가 해석했던) 수석을 들고 지하로 내려갔다. 순진하고 미신적인 이런 생각이 문광을 잃은 문광 남편에게 통했을 리 없다. 기우는 구사일생으로 지하에 갇힐 위기를 모면하지만, 문광의 남편이 던진 수석에 머리를 맞는다 (보면서 저 정도면 당연히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안일하게도?) 문광네와 공존을 도모해야 하지 않겠냐던 기정도 죽는다. 약자들의 싸움에는 진짜로 생존이 걸려있었던 것이다. 약자들끼리 연대할 수 없는 오갈 데 없는 심정이니, 강자에게 빌붙으려는 심리도 더 커졌겠지.


문광 남편의 리스펙은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아내가 죽고 터전이 무너져 극도로 분노한 상황에서도 그는 기택의 식구들만 공격하며 죽기 직전에도 동익에게 감사를 전한다. 동익 부부와 초대 손님들은 문광의 남편이 기정에 이어 기택의 아내까지 공격하자 도망치기 시작한다. 도망만 쳤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동익은 기정을 지혈하는 기택에게 (자기들만 도망칠 수 있게 ) 빨리 차키를 달라고 했다. 문광의 남편이 죽어 안전해진 상황에서도, 응급조치가 필요한 기택의 아내를 보면서도, 경찰과 구급대를 부르긴 커녕 시체 밑에서 차키만 빼서 달아나려고 했다. 기택은 이때 동익을 죽인다 (어떻게든 빌붙고 싶어 강자의 이익에 맞춰 인지부조화까지 해본들, 빌붙어지는 게 아니었던 것이다).


한 달 뒤에 눈을 뜬 기우는, 뒤늦게야 만난 경찰같지 않은 경찰과 의사같지 않은 의사를 보며 자꾸만 헛웃는다. 사건의 표면만 보 기택네와 문광네는 사기꾼에 살인자지만, 이들을 처벌하는 것이 처벌하지 않는 것보다 확실히 훨씬 더 낫겠지만, 이들만 잡아 넣는다고 사회가 바로잡히고(경찰) 건강해질까(의사)? 어느 부분을 어떻게 바로 잡을 수 있고 치료할 수 있을까? 기택네는 그 집에 들어가기 전에도 할 수 있는 일들을 다 하며 살았는데. 어떻게, 어떻게 했더라면… 그러니 웃을 수 밖에. 기가 막히면 웃기라도 해야하지 않겠는가.

기우는 재판정에서 정당방위에 집행유예라는 판결을 들었을 때도 헛웃는다. 영화에서는 죄목이 무엇인지, 유예된 형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정당방위의 사투 끝에 반지하에서 지하로 떨어지지도 않고 죽지도 않은 기우와 기택의 아내가 집행유예를 받았다는 점은, 이후 예전처럼 정당방위인 삶을 계속한다는 것은, 어째선지 의미심장하다. (참고로 기택의 아내는 문광의 죽음에 가장 큰 원인을 제공했으나 지하에서 죽은 문광의 죽음은 공공 영역에서 다뤄지지 않고 묻힌다.) 그러고보면 ‘기생충’은 업신여겨 비하할 목적으로도 적합하지만, 자조하는 용도로도 제법 그럴싸한 단어다.


잠시나마 기택과 기우의 모스 교신을 보여주고, 기우가 돈을 많이 벌어 그 집을 사는 듯한 장면을 보여주던 감독은 관객을 두 번 죽인다. 기우가 일확천금하여 그 집을 살 확률이 낮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난한 사람 모두가 부자가 될 수 없으니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용두사미 결말을 바라는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영화의 마지막은 영화가 시작하던 장면으로 무참하게 되돌아갔다. 그와 함께 기우의 수석(어쩌면 기우의 희망)도 자연으로 되돌아갔다. 글의 처음에 언급했던 것처럼, 사회경제적인 계급을 벗어나기가 예전보다 훨씬 더 힘들어졌다는 것이 통계적인 현실이니까.


아니, 이전보다 더 못한 상황이 되었다. 기정은 죽었고 기택은 이제 반지하도 아닌 지하에 남았으니까. 지하는 경찰도 미치지 못하기에 존재하지 않는, 심지어 반지하에서도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공간이다. 그래서 기택은 기우를 만날 수 없고, 모스부호처럼 사람들에게 잘 전해지지 않는 비명을 이따금씩 어딘가로 보낼 뿐이다. 기택은 나중에 문광을 묻어주는데 (시체와 같은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아서, 라는 측면이 크겠지만) 서로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싸웠음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추론해 본다. 문광과 마찬가지 처지가 된 자기 자신에 대한 애도이기도 했겠지.



(5) 환상, 희망, 소망 혹은 그 무엇

영화에서 가장 비현실적으로 느껴진 부분은 다송이다. 다송은 영화 대부분에서 문광 남편의 모스 부호를 알아듣는 유일한 사람이며, 집을 떠난 문광과도 계속 소통하는 사람이다. 비오는 날 밤, 동익네, 기택네, 문광네가 한 건물에 자리한 상황을 건물 밖에서 바라본 사람이기도 하다. 동익네에서 유일하게 다른 계급들의 현실을 귀신이 아닌 실제로 볼 수 있는 인물이 다송인 셈이다.


다송은 하필이면 태어난 날, 사는 계급이 다른 문광의 남편을 본다. 그리고 또다른 생일날, 문광네와 기택네의 사투를 눈 앞에서 직면하고 기절한다. 억측을 좀 보태자면, 다송은 이렇게 충격적인 사회에서 태어나버린 아이들이 아닐까 싶다.


다송만큼은 아니어도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다혜는 집 안에서 유일하게 기택네의 냄새를 맡지 못하는 사람이며, 문광네와 기택네의 혈투 속에서 유일하게 기택네 일원을 도와준 사람이다. 다혜는 연교도 좀처럼 내려가지 않던 지하까지 내려가서 다친 기우를 업고 달아난다.


영화에서는 다혜가 대학에 가서 어른이 되면 기우와의 연애가 불가능하리라는 말이 몇 번 나온다. 마찬가지로 대학에 가지 못했고 아직 어린 편인 기우와 기정도 문광네와의 공존을 (수석으로든 말로든) 시도는 한다. 노골적으로 담아내자니 억지스럽고 복잡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없지는 않다고 봉준호 감독이 소심하게 우겨넣어본 게 아닐려나. 영화 <괴물> 말미에서 송강호가 친자식들은 잃었지만 부모잃은 아이들을 거둬 다시 기르는 것처럼. 긴 이야기의 끝에 기우가 찾은 '근본적인' 해결은 결국 돈을 많이 버는 것(그 전에는 돈 벌기 싫어서 못 벌었던가)이긴 했지만 말이다.

 

각주 

* 더욱이 이성이 항상 최선인 것만도 아니다. 영화 속에서 아마도 가장 이성적인 인물이었을 동익은 기택이 인간으로서 가진 감정에 공감하지 못했고 (기택네 가족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도와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만 도망갈 수 있게 차 키를 달라고 했다. 어찌보면 극도로 이성적인 행동이기는 하다) 어쩌면 그래서 살해당한다. 한편 기우는 계획에서 크게 벗어나는 상황을 맞닥뜨린 순간 길을 잃는다.


** 좌절이 반복되거나 만성이 되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 아무리 애써도 자신의 능력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너무 많지 않은 사람들은 우울과 좌절이 뭔지 모른다. 그래서 사지 멀쩡한 이들이 기생충처럼 게으르다고 쉽게 평하곤 한다. 하지만 사지가 멀쩡해도 꼼짝할 수 없는 것이 우울의 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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