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우리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당연하게 여기지만 이 제도들은 과학혁명과 시민혁명을 거치며 18세기쯤부터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은 그 때와 다르다. 인간에 대한 이해도, 세상에 대한 이해도, 지구환경도, 우리가 가진 기술도 다 다르다.
예를 들어볼까? 그 때는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눌러도 됐지만, 지금은 코로나를 극복하기 위해 나만 백신을 맞는다고 될 게 아니라 다 함께 건강해야 한다. 노동력이 인간에서 기계로 옮겨지면서 기본 소득에 대한 논의도 나오고 있다. 거대 IT기업, 비트코인, 기후위기,전염병처럼 개별국가 단위를 넘어선 일들도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1) 지금의 이해와, 2) 지금의 환경과,3) 지금의 기술에 맞는 새로운 정치제도와 경제제도가 필요해졌다.
나는 그때 거기(수백년전 서유럽)에서 일어났던 일(새로운 정치경제 제도의 발명과 구현)이 지금 다시 일어나고 있다고 보고,이번에는 우리도 이 과정에 참여하기를 바란다.
또 우리가 새로운 제도의 발명에 참여할 능력과 그릇이 충분히 된다고 생각한다. 기존 제도가 서양 세계관을 토대로 만들어진만큼 서구인들의 사고패턴은 기존제도와 너무 비슷하고, 그래서 새로운 미래를 꿈꾸기에 불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헐리우드의 SF영화는 배경과 기술만 다를뿐 서부영화와 비슷한 부분이 적지않다. 참고글: 사이언스온 - 뇌과학, 인공지능과 우리 (hani.co.kr))
반면에 그들과 다른 우리라면, 그러면서도 기존 제도를 잘 꽃피워낸(촛불과 경제성장) 우리라면, 다른 미래를 그릴 수도 있지않을까.
더욱이 K팝이나 드라마, 영화를 통해 확인된 것처럼 우리 세계관은 아시아, 이슬람, 서양 사람들에게 두루 어필도 되는 편이다. 우리가 뭔가를 제안한다면 제국주의나 냉전처럼 강압적이고 전투적인 뭔가를 덜 거치고도 받아들여질 공산이 있는 셈이다 (반면에 미국이나 중국이 뭔가를 내세운다면 반대편에서 반드시 싸우자고 나설 것이다).
무엇보다 멋지지 않은가. "당신들이 발명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잘 활용해서 우리가 이만큼 꽃피워 냈습니다. 이번에는 우리가 이런 제도를 그려봤는데 어떤가요?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그림을 모으고, 같이 논의해서 좋게다듬어 봅시다. 이번에는 저번처럼 냉전같은 거 없이." 할 수 있다면!
남이 만든 제도를 허겁지겁 따라기기보단 이쪽이 훨씬 더 폼나지 않는가 말이다.
이걸 위해서 나는 다음 3가지가 중요하다고 본다.
(1) SF
나는 뇌과학 강연을 하면서도 말미에는 SF를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SF는 기술이 적용된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궁리하고, 탐색하게 해 주는 훌륭한 사고실험이기 때문이다.실제로 인공지능 등 미래 기술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그들이 접한 SF 블록버스터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문제는 SF 블록버스터에서 그린 미래는 정답이 아니며 당연하지도 않다는 것이다. 물론 헐리우드 감독들은 과학 공부도 많이 하고 인문학적인 성찰도 풍성하게 한 끝에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든다. 하지만 그들의 SF도 특정한 세계관에서 그려낸 여럿 중 하나의 미래일 뿐이다. 잘 살펴보면 구멍도 적지않고, 우리는 우리대로의 장래를 만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국산 SF를 참 귀하게 여긴다. 국산 작품에는 우리 나름의 문제의식과 가치관, 세계관에 기반한 다른 미래가 그려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른 미래를 헐리우드 SF나 쟁쟁한 미래학자들이 그린 미래들 틈에추가하는 것은인류에 공헌하는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서양 세계관과 그들이 그린 미래에만 익숙한 사람들에게선택지와 사고의 폭을 넓혀주기 때문이다.
나는 SF 창작자가 아닌 분들께도 기술이 사회에 끼칠 여러 영향과, 살고싶은 장래 사회의 모습을 생각해보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자주 한다. 실험실의 연구 성과가 사회 곳곳에서 어떻게 작용할지 예상하려면각자의 직업과 독특한 삶에서 나온 통찰이 요긴하다고. 내가 답을 드리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지금 이런 궁리를 해보는 것 자체가 소중하다고. 언젠가 목소리를 낼 기회가 왔을 때 참여해서 목소리를 내고 함께 궁리하시면 참 든든하겠다고, 이야기한다.
SF말고 미래학자들도 있는데.. 음... 레이 커즈와일같은 미래학자들은 물론 우리보다 정보도 많고 체계적으로 분석했을 테지만, 그들의 말에는 그들의 말이 실현되도록 장래를 바꿔가는 효과도 있다. 사람들이 "유명한" 커즈와일의 예측을 믿고 행동하는 만큼, 현재가 커즈와일의 예측에 가깝게 변해가기 때문이다 (주가 등락에 대한 기사가 주가에 영향을 주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니 그들의 말을 주의깊게 참고는 하되, 그것이 전부라고 믿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가 원하는 다른 장래가 있다면 기꺼이 그려보고, 동조하는 이들을 (커즈와일만큼 많지는 않더라도)모아서 조금이라도 더, 내가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장래를 끌어오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그려가다보면, 흔들리는 와중에도 조금씩 우선순위와 체계가 잡혀갈 것이다. 좋은 걸 다 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으므로우리한테 진짜 소중한 가치가 뭘지, 어떤 가치를 중시하는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지, 가닥을 잡아갈 것이다. 과학혁명과시민혁명을 거치며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발명되고, 널리 인식되었듯이.
(2) 과학과 기술에 대한 정확한 이해
아무리 진지하게 장래를 논하더라도, 나와 나를 둘러싼 세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과학)와, 내가 가진 수단에 대한 정확한 이해(기술)에 근거하지 않으면 백일몽에 불과하다.
그래서 정확한 과학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하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과 같은 상황에는 과학 커뮤니케이션이 위험 커뮤니케이션의 역할도 겸하기 때문에 정확성이 매우 중요하다.
이 글에서 내가 (1) SF와 (2)과학 커뮤니케이션을 별도의 번호로 다룬 것도 바로 이 정확성 때문이다. 역사에서도 사극이라고 명시하지 않는 한, 틀린 사실을 이야기하면 지탄받는다. 하물며 정확성이 중요하기로는 역사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과학에서야 어때야 하겠나. 따라서 과학 커뮤니케이션에서도 SF라고 명시하지 않았다면 정확성을 중시해야 한다.
문제는 어려운 과학을, 쉽고 재미있는데다 정확하고 시의적절하게 전하기가 무지막지하게 어렵다는 것이다. 나는 이 어려움과 중요성이 과학 커뮤니케이션을 지원해야 하는 당위성이라고 본다.
실제로 과학 콘텐츠는 다른 종류의 콘텐츠들과는 다른 여러가지 지원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라면 과기정통부, 해외라면 과학저널 사이언스를 발행하는 AAAS나 영국의 왕립학회 등에서 이런 일들을 한다.
지금은 과학 커뮤니케이터가 다른 컨텐츠 제작자와 비슷한 방식으로 경쟁하고 있고, 외부에서도 그렇게 여기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어려운 과학을 쉽고 재미있으면서도 시의적절한데다 정확하게 전해야 하는 과학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과 어려움을 잘 보여준다면 (cf. 공기청정기협회 등에서도 품질 기준을 만들어 자신들에 대한 신뢰를 지킴으로써 업계의 이익을 보호한다), 다양한 지원(논문 접근권, 제작 지원, 연구소 출입, 수월한 인터뷰 요청, 상주 견학 등등)을 받아내기가 수월해지지 않을까도 싶다. 이렇게 어렵고도 꼭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니까!
나아가 과학 커뮤니케이션의 역할이 지금보다 확대되면 비즈니스 모델도 다변화되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과학 커뮤니케이션이 학교 교육을 보완해서 과학 지식을 높여주는 문화 컨텐츠의 느낌에 가깝다. 하지만 과학 커뮤니케이션은 아래에 설명한 <책임있는 연구와 혁신>의 모든 단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또 사회 곳곳에서 융합이 확산되면, 제약업계의 Medical Science Liaison처럼 (전문성이 높아 대중을 상대로 하지는 않지만) 과학 커뮤니케이션 역량이 필요한 직종이 늘어가지 않을까.
(3) 현실 속의 제도
장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게 아니다. 지금도 계속 어떤 모양인가로 만들어져가고 있다. 우리나라는 공장에 로봇이 가장 많은 선진국 중 하나이며, 그렇지 않아도 인공지능과 온라인으로 넘어가던 경향은 코로나팬데믹으로 더 빨라졌다. 인공지능, 로봇, 뇌-컴퓨터 상호작용은 강연하려고 찾아볼 때마다 새로운 내용이 계속 나온다.
이런 변화가 진행된다고 하면, 특히 기술의 잠재적인 위험이 거론되면, 사람들은 기술을 아예 막거나, 허용하거나 둘 중의 하나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기술변화를 완전히 막는 일은 우리가 이미 해봤다. 그리고 장렬하게 실패했지. 150여년 전,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때... 또 그럴 수야 없지 않겠나.
그래서 역설적이지만, 떠오르는 기술이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위험한 것일수록 가까이 두고 알아가야 한다. 규제를 아주 살짝만 열어서 이런 저런 실험을 해보면서 알아가고, 이해한만큼 안전장치를 마련한 다음에 규제를살짝만 더 열어보는 식으로 반복해가는 것이다. 그래야 외국에서 선진기술이 들어올 때 속수무책으로 끌려가지 않으면서도 기술을 원하는 방향으로 쓸 수 있다.
나아가서, 연구 기획 단계 때부터 우리사회의 수요와 가치,산업기술 현황에 부합하는 연구를기획하는 일이 필요하다.
연구가 진행되는 중에도 잠재적인 위험에 대비하고, 연구성과를 두루 확산시키기 위한 노력을 해야한다 (연구자 개개인에게 맡기기 보다는 시스템 차원에서).연구중인 기술을안전하고 유익하게 사용하는 데 필요한 보완기술을 연구하거나, 연구팀 내에서 규약을 구상하고 실험해보는 일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과정에서 융합학문이 생겨나거나 의외의 기술발전이 있을 수 있다.
나아가 성과가 가시화되면, 이해관계자와 정부담당자, 시민들에게 알려서 이해도도 높이고, 기술 도입 후 생길 장단점, 위험은 막고 혜택은 넓힐 방법, 우리 사회의 가치와 부합하는지에 대한논의 등을 해볼 수 있다.
이렇게 브레인스토밍이 된 후에는 해당 주제에 대해 더 공부한 이들을 대상으로 제도에 대한 그림을 그려볼 수 있다. 한번에 다 완성하기 보다는, 이들이 논의의 결과를 염두에 두고 각자의 위치에서 살아가다가 다시 모여서 제도를 논의하면서 구체화하고, 개선해갈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일반적인 강의는 물론, liaison 등 다양한 형태의 과학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해질 것이다).
이렇게 마련된 제도는 기술의 안착을 돕는다. 물론 여기에서 끝이 아니다. 한동안시민들에게 기술의 내용을 안내하고, 예기치 못했던 이슈를 다루고, 혼란을 해결해가는 과정이 한동안 계속된다.
이런 과정을 <책임있는 연구와 혁신>이라고 한다. "책임있는 연구와 혁신"은 유럽의 Horizon 2020에서 science for and with society를 위한 주요 방법 중 하나였고, 지금은 미국의 BRAIN Initiative 2.0에도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 우리나라에서도 <책임있는 연구와 혁신>이 여러 기술분야에서 잘 적용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