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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민령 Mar 01. 2022

어느 3.1절, 기미독립선언서를 읽고

3.1운동과 헌법 전문 사이의, 노골적임에도 알려지지 않은 관계

그간 삼일절에 국기조차 달지 않았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기미독립선언서를 읽어봤다.


(1) 비폭력

좀 뜻밖이었다. 구구절절이 일본의 잘못을 지적하며 타도하자, 물러가라 뭐 이럴 거 같았는데 내놓고 ‘일본을 책하거나 파괴하려는 게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고 건설하고자 한다. 우리와 일본의 관계에서 우호적인 새로운 국면을 타개하고자 한다’ 라고 밝히고 있다. 공약삼장에서도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흐르지 말고, 정당한 의사를 기쁘게 발표하라’ 썼다. 그러고도 불안했는지 1919년 3월 1일 조선독립신문 1호를 통해서 ‘절대 난폭하거나 파괴적인 행동을 하지 말라’고 거듭 일렀다. 폭력 사태로 치닫게 되면 일제의 폭력적 탄압에 구실을 주고, 서양의 문명국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도 없다고 여겼기에 민족대표들은 폭력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여러모로 마음을 썼다고 한다.


나는 삼일운동이나 유관순 하면, 7080년대 대학생들이 데모하는 것과 비슷한 광경을 떠올렸다. 그런데 삼일운동은 광우병 시위 혹은 2002 월드컵과 비슷한 느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엘리자베스 키스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키스는 삼일운동 직후부터 한국을 드나들며 한국의 풍속과 사람을 담은 그림과 판화를 남겼다.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에 그녀의 그림과 이야기가 소개되어있는데, 독립인사를 그린 키스의 작품과 기록에서 요즘 운동권같은 분노가 느껴지지 않아 신기했었다. 실제로 3.1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독립만세를 크게 부르고 춤을 추기도 하며 계급의 상하,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질서 정연하게 행진했다고 한다 (이렇게 쓰고 보니 묘하게 익숙한 광경이다).


삼일운동이 시작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에서 간디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이 일어났고 (같은 해 4월 6일), 중국에서는 대학생들이 반제국주의와 반봉건을 외친 5.4 운동이 일어났으며, 6월에는 필리핀과 이집트에서 대학생들이 삼일운동과 유사한 운동을 일으켰다 한다. 일본이 유네스코와 올림픽에 기부금이 많은 탓인지, 간디가 비폭력 불복종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원조는 우리였던 셈이다.  


제트기가 없어서 배타고 타니던 시절에, 어느 듣보잡 같은 나라에서 시위 좀 일어난 것 가지고 한두달 만에 말다르고 물다른 지구반대편까지 들썩거렸던 걸 보면 좀 의아해진다. 나는 삼일운동이 “승전국을 위한 제스쳐일 뿐인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편승하여 (i.e. 대외정세와 시대 조류도 못 읽고 naive하게시리 과잉 감격하여)“ 촉발된 것이라는 뉘앙스로 배웠다. 하지만 그때보다 기술적으로나 민주적으로 진보한 요즘도 버마에서의 시위나 세월호 시위가 세계 각지에 도미노효과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삼일운동의 파급 속도를 보면 naive하게 우리가 착각한 게 아니라 인도/중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도 우리와 비슷한 공감대를 이미 형성하고 있었다고 보는게 맞다. 신자유주의의 폐해에 대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월가에서 시작된 시위가 세계 곳곳으로 번져간 것처럼.


생각해보면, 유럽애들이 땅따먹기 한다고 시작한 1차 세계 대전 (유럽 대전이지 세계는 무슨..)이 드디어 끝났고, 어쨌든 명분은 그럴싸하게 내걸었으니, 식민지 국가들 입장에서는 이걸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서양얘들이, ‘등신, 그 뜻이 아니라 이 뜻이라고’ 하면 우린 눈치껏 알아서 굽신굽신 해야 하는 게 아니잖나. 윌슨의 입발린 명분이라는 건 서양애들 해몽이고, 식민지가 된 나라들 해몽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는 거고, 기회는 만드는 거지. 찌가 움직이는데 낚시대를 안 당길 수는 없잖나.


(2) 삼일운동의 준비와 동학

더욱이 삼일운동은 1차 대전의 종결을 보고서 그 때부터 ‘아, 이제 준비해야지’하고 시작된 게 아니었다. ‘이천만 동포에게 고하노라’ 하던 시절에 1919년 5월말까지 2백만명, 1919년 말까지 천만명이 거리로 나갔으니, 놀자고 하는 월드컵도 아닌데 그렇게 간단하게 준비됐을 거라 생각하는 쪽이 순진한 거겠지.  


삼일운동은 1894년에 있었던 동학농민운동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동학농민운동을 실제적으로 진압한 것도 조선 관군이 아니라 수천명의 일본군이었는데 전봉준이 체포된 후 학살된 농민만 30만명으로 추산된다라고 하니 그 규모가 실로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삼일운동을 추진하고 계획한 주역이었던 손병희는 천도교의 교주였고, 삼일운동 당시 천도교는 200만명의 교부금을 받으며 300만명의 신도를 가진, 재정적으로나 조직적으로 탄탄한 조직이었다고 한다 (당시 기독교인은 20만명이 채 되지 않았다). 삼일운동의 플랫폼을 만들었던 민족대표들은 부러 일본순사에게 전화하여 자신들을 잡아가게 하여 뒤로 빠지고, 일반 민중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였는데 이런 민본사상은 동학의 인내천과 일맥상통한다.

* 손병희는 삼일운동을 시작하기 전 49일간 전국 교구에서 저녁 9시에 일제히 촛불을 밝히고 기도식을 거행하게 했다고 한다. 설마 이렇게 모여서 초만 켰겠나, 준비도 했겠지.


동학을 썩어빠지고 무능한 조선후기에 마땅히 있었을 법한 민란, 천도교라는 이상한 종교가 창시된 계기 (혹자들은 지주들에 맞서 일어난 프롤레타리아 혁명_-_) 정도로만 여겨왔는데 그 이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낯선 문물이 들어오고, 왕권은 약해지고, 관료들은 부패하며, 신분제가 무너지고, 일본이 압박해 들어오는 등 총체적 난국이 닥쳤을 때, 신문물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주체적으로  소화해 내어 이 난국을 생산적으로 극복하려했던 학문-정치-기술 분야의 (그리고 위로부터의) 노력이 실학이었다면 철학 분야의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노력은 동학이 아니었나 싶다.


한국에 유교-불교-도교가 다 들어왔지만 그것은 한국 전래의 토양에 흡수되어 다른 지역의 유-불-도와는 어딘지 다른 모습을 갖추었다. 이처럼 홍익인간과 같은 (생각해보면 건국이념까지 포함된 건국신화는 대단히 드물다) 전래의 토양에 유-불-도 그리고 새로 들어온 기독교까지 기꺼이 포섭하여 탄생한 것이 동학이 아닌가 싶다. 일본사람, 인도 사람, 아랍사람, 중국사람 오밀조밀 다 섞어서 단일민족으로 만들어버린 그 포용력으로, 새것이 닥치면 무작정 밀어내지도 무작정 따르지도 않고 창조적인 방식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능력, 어쩐지 천진난만하기도 하고, 낙천적이기도 하고, 귀엽지 않은가?


동학은 주문을 외우는 등 종교적 색채를 띄어서 영감을 주었을지언정, 민중 스스로 생각하고 주도해나가는 길을 열어주지는 못했다고 한다. 느낀 바가 있었던 손병희는 출판사업과 교육을 통해서 민중의 정신을 일깨우고, 민중 스스로 해나갈 수 있도록 하고자 하였고, 이런 노력을 기울인 건 천도교만이 아니었다. 이미 의병활동이 시작되던 무렵에 방방곡곡 수천개의 서당이 생겨나 교육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의병이 토벌되던 무렵에는 고종이 선교사들에게 부탁하여 각지에 새운 400여개의 신식 학교와, 자산가들이 각지에 세운 신식학교들이 있었다. 전국에 긴밀한 연락망을 가지고 준비해온 학교와 천도교, 교회가 없었다면 유관순도 없었을 것이고, 한꺼번에 그렇게 큰 움직임이 통일된 방향으로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3) 3.1운동과 임시정부, 그리고 헌법전문

민간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운동은, 굳이 중앙에서 지휘하는 사람 없이도 전국각지로 퍼져나갔고, 다양한 계층의 남녀노소가 참여했던 삼일운동이라는 경험이후, 독립운동의 주체와 활동방식과 위치는 다변화됐다고 한다. 사실 해방이후 다른 나라에 비해 급속도로 이뤄진 민주화 운동의 저력도 독립운동을 하면서 다져진 내공에서 나온 게 아닌가 싶다. 일본한테 35년간 징하게 빨아먹히고 간신히 숨돌린게 1945년, 한국전쟁이 끝난게 1953년인데 4.19가 터져나온 게 1960년이다. 이승만이 아무리 나빴어도 이쯤되면 에너지가 딸려서라도 사토리족이 될법도 한데 기어코 솟아나는 에너지를 보면 이건 대단하다고 해야할지, 독하다고 해야할지, 낙천적이라고 해야할지…


그리고 임정이 수립되었다. 생각해보면 이건 엄청난 일이다. 지구상에 유럽과 미를 제외하고는 온통 식민지이던 그 시절에 몇이나 되는 나라가 임시정부를 고 있었나?덕분에 광복했을 때, 우리에게는 어느 정도의 경험과 사람이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도입했음에도 법에는 우리의 독특한 문화가 제법 반영되었고, 혼란의 와중 치고는 그럭저럭 괜찮은 법이 제정되었다. 그 새까만 시절에 노동법 같은 게 있었다는 것만도 어딘가. 그리고 나라가 반토막이 난 채 군정이 시작됐는데도 완전한 괴뢰 정권은 아니었다.


이를 반영하여 우리나라 제헌헌법전문은 “기미년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 독립 국가를 재건함”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기미년 독립선언서의 기본 내용과 정신을 충실히 반영하여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 평화의 유지에 노력하여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시작을 이천만 중에 수백만이나 되는 사람이 뛰쳐나간 삼일운동으로 잡으면, 그리고 삼일운동의 정신을 이어받아 국민이 수립한 임시정부를 대한민국 정부로 보면, "대한민국은 국민이 수립한 민주 공화국이고 (헌법 제 1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제 2조)" 의 근거가 분명해진다. 또한 일본이 1919년 이후 (고종 사망후) 한국에 행한 모든 행위를 불법으로 간주할 수 있는 근거도 분명해진다. 소름이 쫙 돋았다.


똑똑한 서양애들의 진보된 정치제도가 민주주의라서, 혹은 민주주의가 옳아서, 혹은 미국이 우리한테 물어다 준 게 민주주의라서 우리나라가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삼일운동으로부터 노력을 계속해온 우리가 삼일운동의 정신을 반영하여 스스로  선택한 게 민주주의였다. 우리는 남의 덕에 얼결에 해방해서, 소화도 못시킨 민주주의를 얼결에 받아먹어서 이렇게 의식 수준이 낮다고들 자학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미국 덕에 얼결에 얻어걸린 거 같았던 민주주의는 원래 내꺼 맞았다. 이런 전도몽상 때문에, 제국주의 치하에 있던 우리한테 있지도 않은 이데올로기 들먹이면서 전범인 일본두고 피해자인 우리를 분단시킨 미국을 고마워하고 말았다 (전범이라는 이유로 독일을 갈랐으면서 느닷없이 우리는 왜!). 한국전쟁 도와준거? 그거 늬들이 안 갈라놨으면 애당초 안 일어났을 일이잖아. 덕분에 일본에서 미국으로 갈아탄 놈들의 목소리만 자꾸 더 세졌다.


그리고 우린 뭐가 뭔지 헷갈리게 되었다. 난 삼일운동이 이런 의미란 걸, 오늘 찾아보기 전까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배운 삼일운동은, “승전국을 위한 제스쳐일 뿐인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과잉 감격하여, 쇄국정책이나 펴던 순진한 인사들이 분연히 일어났으나 큰 규모에도 불구하고 실패에 그친 안타까운 운동. 이 실패 이후 국내의 독립운동은 크게 위축되고 대다수가 해외로 쫓겨나 산발적으로 진행었음” 이라는 뉘앙스가 있다.  도대체 난 왜, 어쩌다가 이따위 이미지를 갖게 된 걸까? 혁명가를 애국가로 쓰는 프랑스 애들처럼, 삼일절 노래를 애국가로 써도 모자랄 판에...이거 의무교육에서 별표 마구마구 쳐가며 가르쳐줘야 되는거 아니야? 왜? 아니 왜?


(4) 묻히고 꼬여있던 것

엉뚱한 걸로 물고뜯고들 싸웠는데 정작 생각도 못한 데서 꼬여있었다. 나를 비롯한 사람들이 이걸 몰랐던 데서 꼬여있었다. 굳이 찾아보지 않으면 알 수 없게 만든 데서 꼬여있었다. 국정 역사교과서를 비롯해서 누가, 왜, 이 짓을 해서 무슨 덕을 보는지, 그 때문에 우리가 무슨 손해를 보는지 몰랐던 데서 꼬여있었다.


3.1운동 100주년인 2019년 2월에 찾아봤을 때, 3.1운동에 대한 자료는 놀라울만큼 적었다. 우리나라 제헌헌법전문은 3.1운동이 무려 대한민국의 기원이 된 사건이라고 밝히면서 시작한다 (“기미년 3.1 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 독립 국가를 재건”). 하지만 알라딘에서 3.1운동을 검색해보면 건강취미레저/아동/만화/소설시희곡/종교와 절판을 제외하고 35가지 책이 나온다. 그나마 이 중의 16개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2019년에 출간된/될 책들이다. 대한민국 건립의 기원이 된 사건에 대한 책이 19권 정도밖에 없는 셈이다. 이게 말이 되는 일일까?


심지어 2019년에 출간된 책들조차,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대한민국 정부수립, 헌법전문 사이의 관계를 언급한 경우가 드물다. 워낙에 자료가 없는지라 <도올아인 오방간다>에서 도올님이 좀 나눠주셨으면 했는데... 유아인이 이런 시도라도 해줘서 무척 고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모로 아쉽고 아깝다. 잠깐 등장하셨던 고주랑 명창(가수 이희문씨의 모친처럼 답답하더라도 조곤조곤 질문하면서 필요한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이 있었음 좋았을텐데... ㅠ


그러나 아무리 오래 꼬여있었던 것도, 풀면 해결은 한순간이다. 백만년 동안 어두웠던 동굴도 초를 켬과 동시에 밝아지고, 긴 꿈도 깨면 그만이듯.


* 2016년 봄,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을 일부 수정해서 브런치에 올린다.

** 위 내용들의 출처는 박재순의 <삼일운동의 정신과 철학>과, 3.1운동 즈음해서 한국을 다녀갔던 <엘리자베스 키스의 코리아>이다. 박재순은 대표적인 한국 철학자인 함석헌 (다석 유영모의 제자)의 제자이다. 국정 교과서로 한참 시끄러울 때, 오기가 나서 국사책을 열심히 봤었다 (도서관에서 분서갱유까지 한다기에 나름 절박했다. 못 읽어두면 갈수록 읽기 어려워질 테니까). 그 무렵에 처음으로 독립운동가들은 왜 요즘 "누구누구 타도! 누구누구 물러가라!" 하듯이 '일제는 물러가라!'하지 않고 "대한 독립 만세!"했는지 궁금해졌었다. 내가 막연하게 짐작했던 것들과 너무나 달라서 놀랐고, 찾아볼수록 어긋나던 것들의 아귀가 맞춰지며 시야가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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