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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민령 Oct 10. 2022

영화 <승리호> 후기

다른 시각에서 그리는 새로운 장래

이하는 2021년 2월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수정한 것입니다. 기준에 따라 스포일이라 여길만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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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9월부터 손꼽아 기다렸다. SF 블록버스터는 헐리우드 일색이어서, 여기에 한국이란 다름이 더해지는 것만으로도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김태리에 송중기래~ 얼굴만 뜯어먹어도 2시간이 행복하겠네 ㅎㅎㅎ


<승리호>라는 시작을 고맙고 소중하게 여기면서도, 첫 시도인만큼 큰 기대는 하지 않고 봤다. 그렇게 본 후의 소감이다.


1.

CG가 더할나위없이 완벽했다. 이제 전세계 어딜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수준이다.


2.

판타지가 아닌 SF라면 과학성도 중요한데 이 부분은 아쉬웠다. 특히 나노봇이랑 신경계 나오는 부분은 보는 나까지 부끄러워지는 수준... 그래도 뭐, 다른 SF 영화들도 과학적으로 허술한 구석이 많으니 한번쯤 넘어가 줄 수 있었다. <그래비티>처럼 작정하고 만든 영화가 아니고서야, <인터스텔라>도 과학적으로 좀 그렇지 않나.


우선은 과학적 사실성이 (어렵고 복잡하기만 한 장애물이 아니라) 신선하고 극적인 이야기를 위한 화수분일 수 있다는 것만 알아주면 좋겠다. 남들 다 하는 뻔하고 식상한 생각을 뛰어넘는 신선함이,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놀라움이, 자연에 있다. 땅은 편평하지만 지구는 둥글다는 사실도, 인류가 오래전 침팬지와의 공통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사실도, 우리 몸을 이루는 분자가 별의 탄생과 죽음에서 나왔다는 사실도, 발견되던 무렵에는 새로운 세상을 는 개벽이었다.


과학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상을 보는 틀을 바꾸고, 기술은 우리를 둘러싼 세상 및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양식을 바꾼다. 여기서 새로움이 나온다. 과학기술이 얼마나 스토리를 신선하고, 풍성하고, 매혹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김초엽의 소설을 읽어보시길.


3.

스토리는... 음.... ㅎㅎㅎ;; 우주를 배경으로 영화 <해운대>를 보는 듯한 기묘함이랄까~ <괴물>의 마지막과 겹치는 듯한 익숙함이랄까...  한국식 휴머니즘? 뭐 그런 오글거림이 있었다. 과하게 오글거리는 부분은 스킵스킵~~  


4.

그러나 스토리를 오묘하게 만든 그 독특함(3번)이 <승리호>를 가치있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장래를 만들어갈 때 정말 필요한 것이 그런 다채로움 (영웅중심의 뻔한 헐리우드 외에 다른 선택지를 주는)이기 때문이다.


우주 개척을 다룬 SF 영화(예: 인터스텔라)들을 생각해보자. 이 영화들은 지구를 버리고 다른 행성으로 가는 걸, 대항해 시절에 신대륙(유럽 백인 기준에서만 '신'대륙) 개척(실제로는 '침략')하는 것마냥 자랑스럽게 포장한 경우가 많다.


거기다 오염된 지구를 홀랑 버리고 가는데, 그걸 멋있는 일인양 표현한다. 그래서 <인터스텔라>가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그렇게 쓰다 버리고 떠나는 이들이 과연 유색인종을 (이를테면 한국인을) 몇 명이나 데려갔을까?*  백인을 위시한 선진국이 지구를 이만큼이나 오염시켜놓고, 자기 기술이 발전했다고 대충 골라 도망가면 그만인가? 그런 주제에 자기네가 인류를 구한 영웅인양 포장하니 아니꼽고 재수없었다. 자아 비대증도 정도가 있지.


바로 이 부분을 영화 <승리호>에서는 다르게 다룬다. '우리가 도와주겠다'며 나서는 청소꾼들에게 김태리는 정신차리라며 소리친다. (일반 민중인) 너희가 (영웅인) 우리를 돕는 게 아니라, '너네가 (주체로) 나서면 우리가 돕는 것'이라고...


왜란에 지배층이 도망가도 백성들은 죽창들고 나섰던 나라, 3.1 운동 당시 수백만명이 뛰쳐나가 식민지로서는 드물게 임시정부를 수립한 나라, 민주주의라는 제도가 등장하기 한참 전부터 민심이 천심이었던 나라, 촛불혁명을 해냈던 나라다운 발상이다. 여기는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니까.


반면에 서부영화에서는 낯선 놈이 와서 총을 쏴대도 동네 주민들은 맞아죽는 거 외엔 하는 일이 없다. 영웅이 해결해 줄 때까지 무력하게 기다릴 .. 이런 패턴이 <인터스텔라>에서도,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도, 다른 영화에서도 종종 반복된다.


이런 차이가 대항해 시절의 자아도취에 빠지지 않은 (제국주의 시절을 good old days로 추억하지 않는) 나라가 보탤 수 있는 차이이자, 기여라고 생각한다. SF 영화는 우리가 장래를 그리고 구현해가는 방향에 영향을 준다. 하지만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보듯, 식민지에는 가난과 분쟁을, 지구에는 생물다양성 감소와 기후위기를 가져온 시각에서 그린 미래에는 한계가 있다.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고, 지금 이걸 가장 잘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이라고 생각한다. 제국주의를 저지른 적이 없으면서도, 경제적으로 성공해 설득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한국 SF의 장래가 정말 기대되고, 응원한다. CG, 연기, 차별성 등 하나하나의 기본기는 우수하니 이걸 딛고 또 한 걸음 더 나아가겠지. 우리가 이제 과학기술 수준으로 보나, 영화 수준으로 보나, 한국 문화의 독특함으로 보나, SF 블록버스터로 대박낼 타이밍이 되기는 되지 않았나.


한국에서 SF 대작이라는 시도를 하는 것만도 간 떨리는 도전이었을텐데, 코로나로 영화관 상영까지 어려워져서 제작진이 어지간히도 속을 끓였을 듯 하다. 넷플릭스 개봉이 오히려 호재가 되기를 기도한다. 그렇게 힘내서, 다음에 더 멋진 작품으로 돌아오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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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2021년 2월에 쓴 각주)

물론 <인터스텔라>에서 지구인을 다 데려갔는지, 일부만 데려갔는지는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들이 몇명만 골라 도망갈 인품인지, 인류를 구해서 함께 떠날 인품인지는, 코로나 백신을 배포하는 양태에서 드러날 것이다. 가난한 나라에 백신을 공급함으로써 함께 살려는 방향을 취할지, 백신을 무기삼아 외교적 편가르기를 지, 그들의 품격이 어느 정도일지 똑똑히 지켜보고 있겠다.


각주* (2022년 10월에 덧붙임)

2022년인 지금 돌이켜 보건대, 선의는 있었으나 충분하지 않았다고 평한다. 선진국들이 백신 지재권을 유예하는 등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기는 했다. 그러나 당시 (2021년 봄) 백신 공급 속도를 늦춘 가장 큰 원인은 지재권이 아닌 원자재 부족이었기에 눈가리고 아웅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래서 인도의 대표적 제약회사의 CEO가 트위터로 바이든에게 백신 원자재만이라도 제발 좀 풀어달라고 사정하고 그랬지. 인도로 향하는 백신 지원은 너무 늦었고, 인도에서 수십만을 죽이며 확산된 델타 변이는 결국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2022년 여름 원숭이 두창이 유행했을 때도 백신과 약품 공급은 선진국에 집중됐다. 원숭이 두창이 아프리카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동안 원숭이 두창은 거의 연구되지도 않았다. 아프리카에서 원숭이 두창으로 죽은 사람보다 훨씬 적은 숫자의 선진국 사람들이 죽고 감염됐을 때에야, 원숭이 두창에 대한 관심이 집중됐다.


화성 식민지 건설이 기후위기의 해결책이 되려면 인류가 성숙하는 일이 먼저일 듯 싶다. 지구가 멸망하는 위기 속에 <배틀 로얄>같은 아귀다툼이 벌어질지, 우리 역사에서 드물게나마 실현됐던 기적이 일어날지는 여기에 달린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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