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한 탈고(?) 과정
보고서 작성도 글쓰기다. 전략/기획 부서에 일을 하다 있다 보니 결과물은 언제나 보고서다. 보고서 작성 능력은 개인 역량을 평가하는 잣대가 된다. 달리 말하면 글만 잘 써도 회사 생활이 평탄하다는 이야기다.
지금 몸 담고 있는 직장으로 이직을 할 때 면접을 두 번 봤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질문 두 가지가 있다. ‘보고서 잘 쓰세요?’, ‘네, 항상 보고서를 쓰는 일을 해왔습니다.’. 여기까진 괜찮았다. 다음 질문이 문제였다. ‘경영 전략 일을 할 때 필요한 역량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분석적 사고니 커뮤니케이션 스킬 같은 원론적인 답을 했던 것 같다.
질문을 한 면접관은 현재 같이 일하는 부서장이다. 입사하고 나서 며칠 지나자 친절하게도 면접 때 두 번째 질문의 답을 일러준다. ‘경영 전략은 엉덩이가 무거워야 한다고.’ 내가 여기서 일할 수 있었던 까닭은 엉덩이가 무거워 보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책상에 오래 앉아 수없이 고민한 끝에 단어 하나를 써야 하는 자리다.
입사하고 나서 회사의 미래를 그리는 멋진 일을 할 줄 알았다. 실상은 늘 파워포인트 보고서와 씨름을 해야 했다. 보고서를 쓰다 보니 사장에게 보고를 할 때 실무자로서 배석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 써내야 하는 보고서는 크게 두 부류다. 첫째는 사장에게 보고해야 할 내용을 작성하는 것이고 둘째는 사장이 직접 회장이나 그룹에 보고하거나 구성원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내용을 써야 한다. 대부분 사단은 두 번째에서 발생한다.
어느 사장이나 글쓰기 욕심이 대단한 건 변함이 없다. 보고를 받는 사장의 반응을 보면 작성한 보고서 수준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전면 수정을 해야 하는 경우다. 보고서 표지와 목차를 보고 전체 페이지를 스르륵 넘겨본 뒤 바로 덮는다. 피드백은 보고서 방향이 전부다. ‘새로운 투자를 반영해서 미래 모습을 그려 봅시다.’ 아니면 ‘Digital Transformation 관점의 혁신 전략을 강조해봅시다.’ 같은 큰 주제만 던져주고 보고는 끝난다. 며칠 동안 야근을 하고나 일정이 촉박하면 밤샘을 각오해야 한다. 그보다 공들여 작성한 보고서가 읽히지 않았다는데 더욱 힘이 빠진다.
필요 없는 페이지를 드러내거나 새롭게 추가해야 할 내용을 정해주는 경우도 있다. 어느 정도 검토가 가능한 수준까지 수준이 올라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고서를 살피며 본인이 생각하기에 사족이거나 구체화되지 않다고 여기는 부분을 가차 없이 도려낸다. 정작 중요하다고 생각된 내용이 빠져있거나 부실하면 채워줄 것을 요구한다. 가장 많은 질타를 받는 단계이기도 하다. 이건 왜 들어갔는지, 저건 왜 안 넣었는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추궁받는다. 그래도 완성까지 대략 30프로 수준까지는 왔다. 어느 정도 골격은 잡혔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한 글자, 한 글자를 정독하며 보는 단계다. 사장 방에서 다 같이 모여 두 시간 이상을 꼼꼼히 살핀다. 중간중간 페이지가 없어지거나 새롭게 붙여지기도 한다. 단어를 지우고 자신의 언어로 바꾸고 불필요한 단어를 과감하게 삭제하여 최대한 간결하게 정리한다. 기업가치가 ‘획기적’으로 상승하는지 ‘대폭’ 상승하는지를 두고 오랜 시간 고민을 하기도 한다. 마치 신의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지시한 내역 하나하나를 꼼꼼히 수정한다.
보고 한 번에 자리가 위태로울 수도 있는 사장 자리의 무거움 때문일까? 마지막 단계는 결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30% 수준에서 100%로 까지 올려야 하는 과정이기에 끝없는 검토 회의를 거친다. 그 자리에서 바꾸는 경우도 있지만 본인이 직접 수정한 것을 비서실을 통해 내려보내는 경우도 있다. 내용을 보면 고민의 흔적이 엿보인다. 간혹 글자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한자와 영어라 혼재되어 혼동을 겪기도 한다. 마치 암호문을 해독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거쳐 보고를 하기 5분 전까지도 보고 또 보고 나서야 드디어 탈고를 할 수 있다.
보고서가 완성되는 과정에 참여하는 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가끔은 그렇게 잘 알면 직접 쓰면 될 것을 왜 이리 지지고 볶는지 한탄스러울 때도 있다. 장점도 물론 있다. 실무를 하다 보면 사장의 시야와 경륜을 가까이서 배울 수 있다. 사장의 철학이 보고서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가기 때문이다. 보고서 초안과 비교하면 메시지와 구성, 단어 하나하나에서 엄청난 차이가 드러난다. 사장 관점에서 글을 쓰라고 하는 주문을 많이 받는데 최종 결과물을 보면 아직 택도 없이 부족하다는 걸 여실히 느낀다.
사장의 보고서를 작성하는 실무를 하면서 회사에서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몇 가지 철칙을 배웠다. 우선 보고서를 쓰기 전에 보고서 목적은 무엇이고 보고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분석해야 한다. 같은 내용이라도 대상에 따라 구성과 표현을 달리 가져가야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사업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하고 회사가 어떤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설득력 있는 스토리를 구성하고 적절한 단어를 선택하는 게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핵심 메시지를 잘 잡아야 한다. 파워포인트로 보고서를 작성하다 보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용을 완벽하게 숙지하기보다 꾸미는데 치중하기 때문이다. 잔뜩 들어간 힘을 빼고 어떤 내용을 담을 건지를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표현은 그다음 문제다. 사장의 검토와 편집 과정을 보면 괜히 사장이 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