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전
결혼을 하고 5년 동안 아내와 나는 말 그대로 챗바퀴에서 살았다. 쫓기듯 돈을 벌어야 했다. 각자 자리에서 분투하느라 정작 가족은 없었다. 다 그렇게 사는 거라며 스스로에 위안했다. 또래보다 높아진 연봉과 안정된 직장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우선순위는 언제나 직장이었고 우월의식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자만하기도 했다.
그럴수록 관계는 더욱 소원해졌다. 사랑해서 결혼했는데 결혼하니 사랑은 희미해져만 갔다. 우리 결혼 생활의 미래는 어디일까? 아니, 우리에게 삶의 의미란 무엇일까? 서로 의문을 갖었지만 누구 하나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부부로서 가족으로서 본질적인 대화조차 할 여유가 없었다.
작년 여름, 돈 보다 성취욕보다 중요한 가치가 무엇일까 라는 물음이 극심해졌다. 우리는 캐나다 밴쿠버에서 보름이 조금 넘은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낯선 땅에서 우리는 대화가 많아졌고 딸은 어느 때보다도 즐거워 보였다. 한가로이 공원을 거닐고 민들레 홀씨를 후 불며 뛰어다니는 해맑은 아이와 느린 시간을 보내는 것은 오랜만에 느낀 낯선 행복, 인간다움이 무엇인지를 다시 찾게 해 줬다. 캐나다로 이민을 꿈꾸기 시작한 순간이다.
아내와 딸은 13일이 지나면 드디어 캐나다로 떠난다. 작년 9월부터 캐나다 가족 이민을 준비했지만 갑작스러운 COVID19로 출국은 불투명했다. 아내는 하루하루를 마음 졸이며 지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캐나다 입국 승인 메일을 기다리느라 정신은 피폐해졌다. 이틀 전, 기다리던 입국 승인 메일을 전까지는.
아내는 캐나다서 교육 사업을 하기로 했다. 캐나다를 간다 해도 당장 벌이가 없고 이민 서류도 보완해야 하는 나는 한국에 남기로 했다. 결혼한 지 5년 만에 처음으로 떨어져 지내야 한다. 난생처음 느끼는 이상한 기분이 든다. 가족 없는 한국에서 나는 어떤 존재일까?
모든 게 현실이 되니 할 일이 넘친다. 비행기 예약, 캐나다에서 머물 집 구하기, 현재 지내고 있는 한국 집 물품 정리, 타고 다니던 자동차 판매, 휴대폰 해지, 보험 해약을 처리해야 한다. 아내는 쓰임새가 없는 짐을 비우고 꼭 가져가야 할 물품을 챙긴다. 활용 가능한 것만 골라 이사 준비를 한다. 여기 혼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나는 비워야 하는 대상일까? 가족에 꼭 필요한 대상일까?
짧으면 3개월 길면 1년 이상 ‘기러기 아빠’로 불릴지 모른다. 기러기 아빠, 즉 배우자와 자녀를 해외로 보낸 채 국내에 남아 뒷바라지를 하는 아빠이자 남편이 된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은 요동친다. 심하게 날카로워졌다가 차분해지기를 반복한다. 영영 안 보고 사는 것도 아닐 텐데 오늘도 혼자 있을 때면 찹찹하기만 하다
결혼 생활 동안 이기적이고 배려도 몰랐다. 아이를 출산한 지 3개월 만에 일터로 나가는 아내를 보며 속으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늘 가장으로 남편으로 대우받기만 원했다. 자기가 사고 싶은 것들 꾹꾹 참아가며 아이에게만큼은 부족한 것 없이 해주려는 모습을 볼 때면 늘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그랬던 아내와 이제 당분간 헤어져야 한다.
함께에서 각자로 시간과 공간이 나누어지는 시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은 하루하루를 매우 소중하게 여기게 해 준다. 그렇다고 회사일을 마냥 소홀히 할 수 없다. 여전히 평일에는 아이 얼굴 보기가 힘들다. 답답하다. 출국까지 남은 시간만큼은 오롯이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의지가 뇌를 지배한다. 항상 함께 있었기에, 곁을 내주지 않았기 때문에 무뎌졌던 감정은 하나 둘 깨어난다. 익숙함에 속아 놓치고 살았던 소중한 것들이 이제야 다시 눈에 보이기 시작하기라도 한 걸까?
이른 아침 출근 준비를 할 때마다 스치듯 아내와 딸을 마주하는 시간이 아쉽기만 하다. 연말 보너스와 복지혜택에 취해 야근, 회식, 출장, 회의에 쏟았던 시간과 정성은 마땅히 아내와 딸에게 돌아갔어야 했다. 마취제를 맞은 것처럼 살아가는 방법을 찾지 못했고 관계의 의미는 사라졌다.
소중한 가치는 언제나 곁에 있었음에도 내팽개쳐버리고 허황된 전리품만을 챙기려 고군분투한 것은 아닌지. 살아가는 것의 즐거움을 모르고 살아지는 것에 만족해하며 시간을 흘러 보내는 것은 아닌지. 가족과 떨어져야 하는 사실은 나의 무지와 헛된 근성을 다그친다.
분명 정해진 시간은 찾아올 것이고 시간의 흐름에 맞춰 어떤 감정들이 나에게 박힐지 두렵다. 13일이 지나면 아내와 딸은 떠난다. 그리고 나면 혼자다. 오늘따라 밤공기가 유난히 낯설다.
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세상에 어떤 의미 있는 일을 했는지 설명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바라건대 네가 죽어가는 아빠의 나날을 충만한 기쁨으로 채워줬음을 빼놓지 말았으면 좋겠구나. 아빠가 평생 느껴보지 못한 기쁨이었고, 그로 인해 아빠는 이제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고 만족하며 편히 쉴 수 있게 되었단다. 지금 이 순간, 그건 내게 정말로 엄청난 일이란다.
- 폴 칼라니티, 숨결이 바람 될 때, 234, 흐름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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