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
첫 번째 상담 회기가 끝나고 진아는 서둘러 K에게 전화를 했다. 선생님을 연결해준 A에게도 소식을 전해야 했지만 회사에서 한참 일하고 있을 사람에게 정돈되지 않은 감정을 들려줄 수는 없었다. K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전화를 받자마자 "잘했어?" 하고 물었다. K의 목소리는 밝았지만, 그 이면에는 진아를 향한 걱정이 한 움큼 묻어 있었다. 진아는 그것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또다시 울음보를 터뜨렸다.
"나, 너무 바보 같지?"
상담하는 동안에는 미처 내지 못한 엉엉 소리를 내며 울다가 진아가 물었다. 그동안은 본인이 처한 상황이 얼마나 힘든지 설명하기 바빴지만, 이제는 '누가 뭐라든 내가 힘들면 우는 거지 뭐' 하는 뻔뻔함이 느껴지는 말투였다. K는 충분히 그럴만하다는 이유를 마치 본인이 굉장히 논리적인 것처럼 설명했다. 그 모습이 너무 웃겨 진아는 자기가 짊어진 무게를 자칫 잊을 뻔하기도 했다.
그러다 갑자기 최근 진아와 복잡한 관계를 맺게 된 N의 이야기가 나왔다. 상담에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N. 진아 인생에서 지나가는 행인 100번쯤 되는 역할을 맡을까 말까 하는 N에 대해 그토록 긴 대화를 나누다니. 진아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N에게 에너지를 쏟은 것에 대해, 그리고 N의 시선으로 자기 스스로를 평가해온 것에 대해 분노가 일었다. 스스로를 너무 바보 같다고 여기던 뻔뻔함이 이제는 N을 향한 날카로운 화살이 된 것이다.
K는 N이 진아에게 백해무익 한 존재이며, 언젠가 크게 한 번 뒤통수를 치고도 남을 사람이니 되도록 거리를 두라고 했다. 전화를 끊을 때쯤, 진아는 반드시 그러겠노라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상냥한 탈을 쓰고 노골적으로 다가오는 사람을 끊어낼 방법이 과연 있을까 싶었지만, 그렇다고 바보처럼 당하고만 있을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진아는 첫 직장에서 동료들이 자신을 '어린이'라고 부르던 것이 떠올랐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부터 다녔던 회사라 동료라고 해도 진아보다 나이가 최소 4살은 많았다. 그러나 진아를 어린이라고 불렀던 것이 그저 나이 때문은 아니었다. 직장 상사와의 관계에 필요한 밀당, 자신의 의견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방법, 상대의 의도를 알아도 모르는 척하며 응대하는 노련함이 부족해서였다. 진아는 사회생활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토록 복잡한 의도를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에 환멸을 느꼈다.
다음 날 친구 F가 진아를 찾아왔다. 가볍게 저녁이나 먹자고 찾아온 사람을 앞에 두고 진아는 또다시 눈물 바람이었다. 상담 때 선생님과 나눴던 얘기들을 제법 담담하게 전하다, 왜 그랬는지 또다시 N의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N과의 복잡한 관계에 대해 설명하는 게 퍽이나 귀찮았지만, 그래도 진아는 시간을 들여 작은 조각도 빠뜨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F는 진아에게 지나칠 정도로 감정을 이입했다. N에 대한 소감을 이야기하다 갑자기 울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진아는 어느 정도 진정이 된 상태인지라 F의 눈물이 당혹스러웠다. F는 화가 나서라고, 어느 것 하나 부수지 않고 화를 컨트롤하려면 그냥 눈물을 쏟아야 한다고 했다. 머리로는 F가 고마웠지만, 마음으로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진아는 F의 과장된 행동을 보며, 이야기를 꺼낸 것에 작은 후회가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아주 소득이 없던 것은 아니다. 몇 년째 큰 변화 없이 이어지던 진아의 삶에 불현듯 들이닥친 불안과 초조, 예민함과 숨 막힘, 두통과 복통. 분명 트리거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진아는 다음 상담 때는 N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학부 때 존경하던 교수님이 했던 이야기도 떠올랐다. 미해결 된 과제와 결핍은 어떻게든 현재의 관계에 재등장 하기 마련이라는. 결국 진아도 부지런히 현재로 돌아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2019년 4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