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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영 Apr 08. 2019

02. 나의 경계 짓기

진짜 나를 찾아가는 이야기

진아는 트리거를 찾은 이후로 마음이 더욱 뾰족해지는 것을 느꼈다. N이 트리거가 된 것은 분명했지만, 인정하면 할수록 자존심이 상했다. 결코 싸지 않은 상담료를 떠올리며 N과 얽힌 이야기를 험담하듯 일러바치는 짓거리는 정말로 하지 말자고 다짐하기도 했다. 어차피 상담 선생님은 자신의 편이 되어 줄 것이고, 그런 뻔한 위로를 받자고 상담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지냈느냐는 질문으로 두 번째 상담이 시작되었다. 진아는 N에 대해 구구절절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몇 년 동안 반복된 생활에 불현듯 들이닥친 불안에는 분명 N이 어떤 트리거 역할을 한 것임이 분명한 것 같다는 생각은 전했다. 첫 번째 상담이 끝나고 지인들과 나눈 대화에서 중심 화제가 되어 버린 N에 대해, 그리고 절대로 N의 이야기로 시간을 쏟고 싶지 않다는 진아 자신의 의지에 대해서도. 다행히 선생님은 '그렇습니까' 하는 덤덤한 표정으로 다음 질문을 이어갔다.  


"진아 씨, 어때요, 좀. 그러니까, 맨 처음 공부를 선택했을 때, 그리고 지금 상황이 힘들어도 지속하고 있는 자신에 대해, 또 이걸 다 이겨냈을 때, 진아 씨한테 뭐가 남을까요?" 


진아는 몇 년 동안 스스로에게 지겹도록 품었던 질문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듣는 신선함, 그 외에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필사적으로 답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진아는 정답을 찾으려고 머리를 헤집으면 헤집을수록 그 형태가 더욱 뭉그러져 결국 집어 들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문제의 중심에 있는 것도, 그 답을 찾으려는 것도 진아 본인이 분명한데 한없이 겉도는 느낌이었다. 


"아, 정말 N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피해 갈 수가 없네요."


진아는 결국 N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것도 현실에 놓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선생님이 소리 없이 크게 웃었다. 그 순간 진아는 무언가 대답하기 위해 더 이상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에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N의 이야기는 정확하게 진아가 우려했던 방식대로 펼쳐졌다. 


진아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계속해서 시간을 체크했다. 다만 15분이라도 좋으니 그저 친구에게 험담하고 위로받는 것 이상의 진전이 있기를! 이야기 중간중간 선생님의 표정이 공감으로 조금씩 흐트러지는 것을 알아차리고서는, "힘들었겠어요..."라는 말만 하지 마시길! 하고 바랐다. 다행히 선생님도 시간을 몇 번 체크하는 것 같았다. 상담 시간 종료까지 10분이나 남았을까. 


"오늘은 제가 분석을 조금 해야 할 것 같아요."


진아는 선생님이 N에 대해 'manipulation(조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N의 다른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진아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정확하게 원하는 바를 전달하지 않는 것 같다는 분석이었다. 즉, 주변을 공략함으로써 진아에게 어떠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그로 말미암아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행동 방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진아는 그간 N과의 관계에 느꼈던 불편감을 곱씹었다. 


진아는 N에게 자꾸 뭔가를 해줬다. 결코 마음이 담긴 호의는 아니었지만 적선하는 마음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N으로부터 뭔가를 받고 싶지도 않았고, 그것을 되갚아야 한다는 부담으로 관계를 이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진아는 N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게 정말이야?" 하고 묻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미 거짓말이라는 전제 하에 N을 무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나름의 배려였다진아에 대한 N의 표현이 과장되었다고 느낄 때에도, 어디선가 진아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호의적 평가에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일 때에도, 은근히 진아와 자신을 비교하며 진아를 슬그머니 깔아뭉갤 때에도 진아가 느낀 것은 그저 '불편감'이었다.  


그놈의 불편감을 피하기 위해 진아는 뒤로 계속 물러났지만, 진아로부터 아무런 경고 사인을 받지 못한 N은 더 저돌적으로 진아를 향해왔다. 두려움에 몸이 조그맣게 진동했다. 졸지에 '관대한 진아 씨'가 되어버린 이 관계에 누구보다 관대하지 못한 것은 진아 자신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선생님은 이제 그 경계를 조금 더 명료화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진아'라는 사람은 여기 까지라는 한계를 지어주라는 것이었다. 이 관계에서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진아는 그 순간 '위로'라는 것이 반드시 감정의 언어일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 그 말에서 단단하면서도 아주 따뜻한 힘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힘이 꼭 자신의 내면 어딘가에 이미 있는 것도 같았다. 


2019년 4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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