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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영 Apr 16. 2024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주머니나 가방에 책을 넣고 다니는 것은 특히 불행한 시기에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세계를 넣고 다니는 것을 의미한다.
오르한 파묵,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에서 재인용 



#내가생각한인생이아니야 #류시화 #수오서재 




2월부터 시작해 밤독으로 (거의) 매일 야금야금 꺼내 읽은 책이 드디어 어제 끝이 났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가파르게 치솟았다 끝도 없이 주저앉는 감정을 차분히 다독거리기에 더없이 좋은 책이었고, 그래서인지 적어도 이 책을 읽는 시간만큼은 내내 마음이 평온했다. 류시화 작가 특유의 유머가 묻어나 어떤 이야기는 나도 모르게 실실 쪼개기도 하고, 어떤 이야기는 고개를 연신 끄덕거리며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는 다짐을 절로 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중 가장 마음에 남는 부분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당신에게는 지음이 존재하는가? 혹은 당신 자신이 누구의 지음인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관계는 나의 '음'을 이해하는 사람과의 만남이다. 처음 만났는데도 내 마음속 '음'을 아는 사람, 마치 몇 생을 알고 지낸 것처럼 느껴지는 사람, 이유도 모른 채 바로 마음이 연결되는 사람, 무슨 말을 할지 마음에 품기도 전에 어느새 알고 있는 사람. 

지음은 단순히 비슷한 성격이나 취미를 가진 것을 뛰어넘어 영적 유대감으로 이어져 있으며 정신적, 정서적, 영적 차원에서 동일한 감수성과 파동으로 공명한다. 

당신 안에는 당신 자신도 알지 못하는 음악이 존재한다. 그 음악을 이해하는 이가 당신의 지음이다. 하지만 당신이 먼저 자신의 음을 발견해야 한다. 자신의 음에 스스로 귀를 닫아서는 안된다.

우리는 서로를 발견하기 위해 먼 시간의 대양을 건너왔다. 자신의 음, 특히 영혼의 음을 이해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삶이 가져다주는 행운이고 축복이다. 나의 '음'이 불협화음이 아니며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님을 확인해 주는 이, 그래서 아직은 미숙하고 불안정한 나의 음에 힘과 마법이 깃들게 하는 이가 나의 지음이다.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pp. 64, 65


지금껏 지음(知音)을 이토록 아름답게 설명한 사람이 있었을까? 어쩌면 작가의 눈을 가진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뻔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끌어올리는 힘을 갖는 것과 동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그것을 읽은 독자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것들에 각양각색의 감정을 싣고 의미를 부여하여 잊지 못할 특별함을 선물받은 것처럼 느끼는 것. 책장을 사이에 두고 작가와 독자가 주고받는 세계가 심히 아름답게 여겨져 무엇이라도 끄적거리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 올라왔던 밤. 그 여운을 담아 내게 너무 특별해진 '지음'의 문장들을 소리 내어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우리가 생각에 붙들려 있을 때 삶은 흘러간다. 삶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으며, 그런 식으로 삶을 놓친다. 오늘을 놓치면 이미 놓친 것이다. 모든 사랑이, 여행이, 불꽃이 그렇게 생각과 합리적인 판단과 비교 속에서 사라진다. 우리가 인생을 기다리는 동안 인생은 지나간다. 그대가 진정 사랑하는 것의 이상한 끌어당김에 말없이 따라가라. 그러면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pp.124, 125


칸트가 젊은 시절 한 여자와 사랑에 빠졌을 때의 일이다. 여자는 칸트가 청혼해 주기를 기다렸지만 칸트는 만날 때마다 철학적인 이야기만 했다고 한다. 기다리다 못한 여자는 먼저 청혼을 했고, 칸트는 생각하는 일을 거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그 길로 도서관에 가 사랑과 결혼에 관한 책을 독파하기 시작했다. 칸트가 찾은 '결혼해야 하는 이유'는 354가지로, '결혼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 350가지보다 4가지가 더 많았다. 이로써 결혼을 결심한 칸트는 여자의 집을 방문한다. 그러나 문을 열어준 여자의 아버지는 이렇게 말한다. "내 딸은 이미 결혼했네. 아이가 둘이나 있지. 그동안 자네는 도대체 어디에 있었나?" 


선택의 순간에 너무 많은 생각이 개입되면 어김없이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계산하는 나와 만난다. 그러나 제아무리 짱구를 돌리고 돌려 플러스(+)가 많은 선택지를 택한다 한들, 그 선택이 늘, 언제나, 반드시 최고가 될 거라는 보장은 없다. 결국 수많은 플러스(+)가 주어진 인생이라도 내가 없는 선택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플러스(+)의 의미를 띠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은 진짜 내 가슴이 시키는 선택을 해야 한다. 가슴을 뛰게 하는, 생각만으로도 생동감이 넘쳐흐르는, 사랑이 가리켜 보이는 그 이상한 끌어당김을 따라가는 것. 이 자명한 이치 하나를 내 삶에 들여놓는 데 무려 40여 년이 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좀 느리게 배우는 사람. 나이가 들며 점차 빨라지는 인생의 속도에 견주면, 어쩌면 너무 많이 느린 사람. 그러나 늦은 만큼 놓치지 않고 갈 것들의 목록은 확실하고 단순해졌으므로, 이제 중심을 더 단단히 잡고 나아가기로 한다. 





지금도 나는 새로운 명상서적 한 권을 번역 중이다. 내 번역은 얼마나 서툴고 형편없는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문체이기는커녕 살점을 다 발라낸 뼈처럼 무미건조하다. 그런데도 독자가 '누워서 읽다가 졸려서 베고 잤다.'라거나 '읽었지만 제목과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다.'라거나 '책이 두꺼워 냄비 받침으로 사용하면 안성맞춤.'이라고 하면 왜 에고가 상처 입고 움푹 파인 그루터기처럼 얼굴 표정이 변하는가? 그 말들을 부시맨들의 익살극 속 대사로 새겨들어야 하지 않은가? '나'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은 사실은 진정한 '나'가 아니다. 
<내가 생각한 인생이 아니야> p.212




부시맨들이 자만심에 가득 찬 인류학자에게 겸손의 미덕을 가르치기 위해 익살스러운 연기를 했던 짧은 일화(페이스북에서 '류시화' 검색 후 다시 '부시맨의 방식'을 검색하면 볼 수 있음. 게시물에 달린 댓글도 재밌음.)를 소개하며 작가가 본인의 이야기를 건넨다. 그리고 이것은 곧바로 나의 이야기가 된다. 지금 나도 영성 도서 한 권을 번역 중이다. 류시화 작가의 번역이 서툴고 형편없다면 내 것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읽을 때 좋았던 것이 옮길 때는 괴로움으로 변질된다. 순간순간 '뛰어난 번역자'이고픈 마음이 튀어나오는 것. 이 마음이 앞서면 독자의 평가는 가혹해진다. 다들 어떻게 그렇게 귀신같이 꿰뚫어 보는 건지 신기할 따름이다. 자기 자신이 시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자기 안의 시인에 연결되기 위해 30년 동안 직접 쓴 시를 한 편씩 읽는다는 작가의 말처럼, 나도 다시금 나의 일상을, 나의 리듬을 되찾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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