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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영 Apr 16. 2024

패스트 라이브즈


우리 모두는 언제, 어딘가, 누군가와 함께 두고 온 삶 - "전생" - 이 있습니다.
다중우주를 넘나드는 판타지 영화의 영웅들은 아니지만,
평범한 인생도 여러 시공간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신기한 순간들과 특별한 인연들이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패스트 라이브즈> 각본집 p.5, '한국의 독자들에게'에서 발췌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인 것처럼 산다. 시, 분, 초로 계산되어 굴러가는 시간, 집과 회사를 축으로 생겨난 공간, 특별할 것 없는 그 세계에서도 숱한 인연들이 스치고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한다. 그 속에서 나 역시 울고 웃고, 희망과 절망을 경험하며, 사랑과 미움을 주고받는다. 그러다 다양한 감정이 어떤 감각으로 내 안에서 살아날 때면, 비로소 실감한다, 내가 '지금, 여기'라는 시공간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12살의 나영과 해성은 같은 시공간을 산다. 나영의 이민으로 그들의 시공간은 어긋나기 시작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여전히 2차원의 세계에 머물러 있다. 다시 연락이 닿은 24살의 나영과 해성은 일직선적이고 평면적인 시공간의 답답함과 마주한다. 더 이상 나영의 시간은 예전처럼 흘러가지 못하고 해성과 포개지는 순간을 바탕으로 재배열된다. 온통 기다림으로 범벅이 되어버린 나영의 시공간은 나의 기억을 헤집고 왈칵 솟구친다. 보이지 않는 세계로 뛰어넘기 위한 것은 그래서 필연적이다. 



생생한 감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형벌이다. 그것은 그 너머의 세계가 있음을 망각하게 만든다. 감각하는 것에 있어 구태의연하게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들먹이고 싶지는 않지만, 어쨌든 그것에 좀 더 예민함을 드러내 보이는 쪽은 여자다. 그래서 나영은  먼저 이별을 고하고, 먼저 다른 사람을 받아들인다. '지금, 여기'의 시공간 속에서는 그렇게라도 나를 보호하는 편이 나았던 걸까? 



또다시 12년의 세월이 흘러 30대의 나영과 해성은 재회한다. 다시,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자신들의 인연이 생명을 다했다는 것을 아프지만 아름답게 받아들인다. 해성의 눈에 비친 나영은 '떠나는 사람'이었지만 그 모습 그대로 사랑했음을 고백하고, 나영의 곁에 '남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도 받아들인다. 나영은 진심을 담아 해성과의 인연이 소중했다고, 그러나 20년 전 어린 나영을 그 자리에 그대로 남겨두고 왔다고 고백한다. 그 고백 속에는 다른 시공간 속에서 성장한 또 다른 이름인 '노라'를 지킬 수밖에 없는 현실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결연함이 담겨 있다. 



'지금, 여기'에서 그들이 보이는 일련의 받아들임은, 마치 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새드엔딩(이별)에 굴복하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지금, 여기'로 제한된 시공간에서만 그렇다. 헤어지는 순간 다시 12살 어린 시절의 화면이 교차함으로써, 결국 '지금, 여기'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를 또 다른 생의 전생으로 가정하는 해성의 마지막 질문에, 결국 슬프고 아름다운 받아들임을 통해 그들의 세계가 '지금, 여기'를 넘어섰음을, 무한히 펼쳐진 어느 곳으로 확장되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세계의 확장은, 내게 진심을 다해 다가가고 다가오는 관계, 그러니까 '인연'을 통한 배움의 결과인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나는, 온 감각을 열어놓고 곧장 나아가는 길을 택한다. 그것이 내게는 '지금, 여기'를 충실히 살겠다는 삶에 대한 진지함이며, 사랑 앞에서 '의미 없는 가정 놀이(meaningless perhaps)' 따위는 할 겨를이 없다는 고백이다. 만약, 내가 또다른 시공간에서 널 또다시 만나야 한다면, 그건 우리 사이에 미처 풀지 못한 문제가 남아서가 아니라, 내 사랑이 너무 커서 하나의 생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는. 뭐,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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