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련하지 않은, 익숙하지 않은, 때묻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순수한 상태에서만 만져지는 생명력 때문일까? 나는 '서툰' 것들을 몹시 사랑한다. 교육과 사회의 시선에 길들고,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하고, 자신을 숨기고 포장하는 것에 노련해지고 나면, 결국 번듯함 속에 자기 자신을 잃기 십상이니, 어쩌면 '자기다움'을 지니고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장 나다운 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감정'이라는 것을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감정'은 결코 의식적으로 선택 가능한 것이 아니어서, 행복하기로, 혹은 슬프지 않기로 마음먹는다고 의지대로 행복하거나 슬픔을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자 샌드'는 '생각'이라는 우회 통로를 이용하면 충분히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감정'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알아두는 것이 도움이 된다. 특히, 우리가 일상에서 감당하기 힘든 분노, 불안과 두려움, 질투와 같은 감정은 가장 연약한 감정을 보호하기 위해 다소 과격하게 표출되는 이차적인 감정이므로, 그것을 한 꺼풀 걷어내고 난 뒤 직면하게 되는 '진짜 감정'이야말로 나에 대한 가장 은밀하고 정확한 정보인 셈이다.
실제로 낯선 사람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감정'을 대하는 그들만의 고유한 방식이 드러난다. 잘 우는 사람인지, 감정을 공유하는 사람인지, 격렬한 감정에 휩싸이면 충동이 커지는 사람인지, 터지는 사람인지, 밀어내는 사람인지, 누르는 사람인지, 무시하는 사람인지 등 모두가 나름대로의 패턴과 방식으로 저 자신을 데리고 살아가는 것. 누군가를 이런 형태로 만나게 되면 이들이 지닌 배경은 사실상 무쓸모가 되고 만다. '그/그녀다움'에 가장 근접한 정보가 주어진 이상, 나머지는 모두 부수적이고 부차적인 것들일 뿐이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서툴지만 '진짜 감정'을 내보이는 사람에게 쉽게 무너지는 것 아닐까? 그리고 '진짜 깊은 관계'를 위해서는 '진짜 감정'을 서로 나누고 풀고 헤아려야 하는 것 아닐까?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슬픔'에 대한 부분이다. 욕망을 포기할 때, 분노를 거둘 때, 불안의 진실에 직면할 때, 질투할 때, 그 거칠고 격한 감정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언제나 '슬픔'이 있다. 인용하는 문장에서는 분노만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 자리에 불안과 두려움, 질투 등 다른 이름의 부적 감정을 넣어도 무방하다.
싸움을 포기할 때 분노는 슬픔으로 바뀐다. 분노와 달리 슬픔은 생명력과 운동력을 가지고 있다. 슬픔은 정적인 감정이 아니다. 슬픔은 시간과 더불어 줄어들고,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대부분 사라진다. 그럴 때 당신은 또 다른 가능성과 소망을 발견하게 된다.
신형철의 <인생의 역사>와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보면 '슬픔'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진정으로 '슬픔'이 생명력과 운동력을 가진 감정이며, 일정한 시간이 흐르면 소멸되어 삶의 또 다른 가능성과 소망을 탄생시키는 힘이 있음을 거듭거듭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토록 슬픔을 쉬쉬한다는 말인가. 왜 슬픔을 감추고 엉뚱한 다른 감정으로 표출하는가. 왜 슬픔에 접촉한 사람을 환영하지 않는가. 왜 슬픔으로부터 배우지 않는가. '슬픔'에 너그러워지지 않으면 그것은 결국 '병든 감정'이 되고 만다. '스콧 펙'이 그랬던가. '병든 감정'은 어떻게든 현실을 회피하게 하지만, '건강한 감정'은 어떻게든 현실을 직면하게 한다고. 그러니 나는 언제나 슬픔을 건강하게 공유하는 사람이고 싶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현실을 직면하고 싶다. 내게 남은 이번 생의 숙제를 최선을 다해 열심히 풀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