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YD May 15. 2016

추추트레인의 홈구장, 글로브라이프 파크 인 알링턴

Globe Life Park, Arlington, TX

기말고사를 치른 바로 다음날이었던 2014년 5월의 두번째 주말 아침 짐을 싸서 공항으로 향했다. 추신수 선수가 속해 있는 텍사스 레인저스의 홈 경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사실 조금 더 여유를 가지고 그 다음 주나 다음 달에도 마음만 먹으면 텍사스 경기를 보러 갈 수 있었지만 한창 추신수 선수가 3할5푼 언저리의 뜨거운 타격감을 유지하고 있던 때였던 터라 그 좋은 시기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정상급 타자도 자칫 슬럼프를 겪게 되면 3할 후반대의 타율이 한 달만에 2할대로 폭락하는 경우가 심심치 않게 있기 때문에 홈구장에서 응원하면서 추신수 선수의 활약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당시 내가 나름 선견지명이 있었던 모양이다. 실제로 내가 레인저스 경기를 보고 온 이후 안타깝게도 추신수 선수의 성적은 부상의 여파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알링턴의 요새, 글로브라이프 파크


비행기를 타고 댈러스 포트워스 공항에 도착해서 렌터카 센터부터 찾아갔다. 어지간하면 비용을 아끼기 위해 대중교통을 이용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떠나기 전에 인터넷으로 아무리 찾아봐도 댈러스 시내에서 야구장까지 가는 제대로 된 대중교통 편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했던 여행객들이 많았는지 몇몇 블로그나 여행후기 사이트에 “레인저스 야구장까지 버스나 기차를 타고 갈 수는 없나요?”라는 질문이 보였지만 대부분 그냥 차를 타고 가는 게 낫다는 답변 밖에 찾아 볼 수 없었다. 구글 맵으로 검색하니 몇 번을 갈아타고 빙빙 돌아서 가는 대중교통 편이 있기는 했지만, 차로 가면 20분이면 갈 것을 2시간 30분 가까이 걸리는 경로 밖에 없어 보였다. 돈 아끼는 것도 좋지만 이러다 길바닥에서 시간만 낭비하겠다 싶어 차를 렌트하기로 했다. 렌트한 차량은 국산 브랜드의 소형차였다. 한국 브랜드 차가 운전이 익숙한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소형차임에도 불구하고 여행자에게 필수품인 휴대폰 충전용 USB 포트를 탑재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좋다. 미국에서 소형차를 렌트할 경우에 미국이나 유럽 브랜드의 차량은 옵션이 없는 기본 사양에 이러한 편의설비가 빠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마음에 드는 차량도 배정 받았겠다 기분 좋게 공항을 빠져 나와 숙소에 짐을 풀고 일찌감치 텍사스 레인저스의 홈구장이 있는 알링턴으로 향했다.                                                                                                                   

댈러스에서 알링턴까지 비록 거리 상 대단히 멀지 않았지만, 고속도로를 두 세 번이나 갈아타는 길을 운전해오면서 왜 마땅한 대중교통 편이 없는지 이해가 되었다. 네비게이션 안내에 따라 야구장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야구장에 앞서 롤러코스터 레일이 먼저 보였다. 바로 미국의 놀이공원 체인인 식스 플래그(Six Flags)였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자 교통체증이 시작되더니 머지 않아 야구장을 안내하는 이정표가 나왔다. 알링턴은 댈러스와 포트워스 사이에 위치한 인구 40만명이 채 되지 않는 작은 도시이다. 1951년부터 1977년까지 알링턴 시장을 역임한 톰 밴더그리프가 도시 개발을 위해 여러 산업 및 문화 시설을 유치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업적이 놀이공원인 식스 플래그를 건립한 것과 당시 워싱턴에 있던 세네터스 야구단을 알링턴으로 옮겨 와 텍사스 레인저스를 창단한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를 기준으로 하면 스케일이 작은 버전의 용인과 같은 계획 개발도시라고 이해하면 될 듯 싶다.


알링턴의 이색적인 모습에 신기해하는 사이 야구장 근처에 다다랐다. 주차요원의 안내를 받아 주차를 한 뒤 차에서 내리니 글로브라이프 파크의 전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오는 길에 놀이공원을 봐서 그런지 몰라도 이 야구장은 꼭 놀이동산에나 있을 법한 건물과도 같았다. 주변에 언덕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평평한 텍사스 평원 위에 거대한 붉은 벽돌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데, 마침 그 앞에 넓은 호수와 풀밭이 있는 것이 야구장이라기 보다는 마치 성이나 요새의 자태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런 게 텍사스 야구장만의 느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미국 남부 사람들이 많이 타고 다닌다는 픽업트럭과 대형 밴들이 줄지어 주차된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서 다시 한 번 내가 다른 곳이 아닌 텍사스 야구장에 왔구나라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멀리서 바라본 글로브라이프 파크의 모습


2014년부터 텍사스 레인저스의 홈구장은 ‘글로브라이프 파크 인 알링턴(Globe Life Park in Arlington)’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1994년에 개장한 이 구장은 최근 몇 년간은 별다른 네이밍 스폰서 없이 ‘레인저스볼파크 인 알링턴(Rangers Ballpark in Arlington)’이라는 이름을 불렸다. 하지만 2014년 시즌 개막 전 텍사스 소재의 보험회사 그룹인 토치마크 코퍼레이션(Torchmark Corporation) 산하의 글로브라이프 보험회사와 10년간 네이밍 스폰서 계약을 체결하면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한편, 구장 이름을 내주면서도 알링턴이라는 도시의 이름만은 지킨 사실을 통해 이 야구장이 알링턴이라는 도시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자산인지, 그리고 이 도시가 텍사스 레인저스의 역사에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 엿볼 수 있었다.



정성과 노력이 느껴지는 프로그램 책자


글로브라이프 파크에 더 가까이 다가가자, 경기장 밖에까지 나와 프로그램 책자를 판매하는 구장 직원들을 많이 보였다. 하도 열심히 소리를 지르면서 팔길래 가까이 가서 자세히 봤더니 책자 표지에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바로 추신수 선수였다. 추신수 선수가 이번 홈경기 시리즈의 게임데이 프로그램 책자의 표지 모델로 선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장기계약을 통해 팀의 중심으로 우뚝 선 추신수 선수의 위상을 새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한 번 보고 다시 안 볼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어지간해서 이런 프로그램 책자를 사지 않는 나지만, 표지 모델도 추신수 선수인 데다가 이 때 아니면 언제 사겠나 싶어서 5달러 주고 한 권 사서 그 내용을 찬찬히 훑어봤다.

프로그램 책자에 실린 추신수 선수 관련 특집 기사


가장 먼저 이번 호의 메인 기사인 추신수 선수에 대한 심층 기사부터 읽어봤다. 총 네 면에 걸쳐 시애틀, 클리블랜드, 신시내티 유니폼을 입고 활약했던 사진들과 함께 상세하게 선수에 대해 소개하고 있었는데 그 내용의 폭과 깊이에 놀랐다. 타석에서의 인내심과 절제력을 높이 사 그를 영입하게 되었다는 단장의 인터뷰로 시작한 기사는 실제로 추신수 선수 영입 후 2번타자인 앨비스 앤드루스의 시즌 초반 출루율도 함께 높아졌다는 분석과 매 타석을 마지막 타석이라는 생각으로 임한다는 추신수 선수의 인터뷰에 이어 한국 교민 응원단에 대한 소개까지 곁들였다. 그리고 한국 팬들 중에서도 포털 사이트에 연재되는 ‘추신수 일기’나 인터뷰 기사를 빼놓지 않고 읽는 팬들 정도나 알 법한, 동체시력 향상을 위해 날아가는 테니스공에 쓰여져 있는 숫자를 맞추는 그만의 독특한 훈련법까지 소개하고 있었다. 구단에서 새로 영입한 주축 선수의 특성과 히스토리를 팬들 뇌리에 새기고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 절로 느껴졌다.


추신수 선수 관련 기사의 질적 수준에도 놀랐지만 사실 136페이지나 되는 프로그램 책자의 전체적 퀄리티에 더욱 놀랐다. 한 시즌을 치를 선수단, 코칭 스태프, 프런트와 시즌 일정에 대한 소개는 기본이고, 타자들이 타석에 입장할 때 나오는 배경음악 소개, 텍사스 레인저스 구단 역사상 5월 쏟아진 흥미로운 기록들, 방문한 다음 주에 은퇴식이 열릴 예정이었던 텍사스 레전드 선수 마이클 영과의 인터뷰, 얼마 전 영화에 출연한 과거 텍사스 투수코치에 얽힌 비화까지 다양한 팬들이 좋아할 만한 별의별 이야기들이 담겨 있었다. 심지어 곧 있을 워싱턴 내셔널스와의 원정 경기를 맞이하여 원정 응원 갈 팬들을 위한 워싱턴 맛집 소개까지 깨알 같이 담아 놓았다. 적어도 격주 단위로 이러한 책자를 새로 발간하는 듯한데,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예전 LG 트윈스 어린이 회원 시절 받아보던 연간 책자보다 그 내용의 다양성과 깊이가 월등했다. 이런 질 좋은 콘텐츠를 5달러에 한 시즌에 여러번씩 즐길 수 있다는 것은 그 팀의 팬들에게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페이지의 상당 부분을 지면 광고가 차지하고 있긴 했지만, 질 좋은 내용을 싣기 때문에 많은 독자를 끌어 모을 수 있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많은 광고를 유치하여 더 저렴한 가격에 콘텐츠를 제공하여 더 많은 독자를 끌어 모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각 메이저리그 구단이 팬들이 알고 싶고 재미있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선순환을 완성시킬 수 있는 것일 테다.



Everything’s Bigger in Texas


한참 동안 프로그램 책자를 읽는 데 정신을 놓고 있다가 경기 시작 1시간 전쯤이 되어 본격적으로 글로브라이프 파크 안으로 들어갔다. 1루 쪽 입구를 통해 입장하니 관중석 뒷편으로 나있는 홀과 같은 공간에서 다양한 프로모션 행사가 진행 중이었다. 레인저스 로고로 랩핑을 한 픽업 트럭을 전시해놓고 홍보 이벤트를 하고 있는 쉐보레 전시 부스가 먼저 눈에 들어왔고, 공교롭게도 그 옆에는 자동차보험 회사의 프로모션 부스도 차려져 있었다. 한 쪽에는 2014 시즌 레인저스 어린이회원을 모집하는 공간도 있었는데 아직 시즌 초라 그런지 많은 아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프로모션 홀을 지나 복도를 따라 쭉 걸어가다 보니 건물 내부 기둥에 과거 텍사스에서 오랫동안 활약했던 선수들의 배너가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마이클 영은 물론이고, 박찬호 선수가 레인저스 소속으로 고생하던 시절 중계방송으로 접했던 러스티 그리어, 루벤 시에라와 같이 언뜻 기억날 듯한 선수들의 배너도 보이니 반가웠다.


경기장을 둘러보는 와중에 곳곳에서 텍사스주 깃발인 ‘론스타 플래그(The Lone Star Flag)’가 눈에 띄었다. 구장 입구 앞에도 대형 주기가 펄럭이며 관중들은 환영하고 있었으며, 외야 관중석 위에도 과거 지구 우승을 기념하는 페넌트 깃발 옆에 열 개가 넘는 주기가 꽂혀 있었고, 구단용품 판매점에서 팔고 있는 옷이나 모자 중에도 텍사스 주기 패턴을 활용한 디자인의 제품들이 많았다. 경기 중에는 레인저스 선수가 홈런을 치면 ‘그린스 힐’이라고 불리는 가운데 담장 너머의 잔디밭 위로 네다섯 명의 구단 스탭들이 텍사스 주기를 하나씩 들고 뛰어다니는 세레모니를 펼치기도 한다. 텍사스주 내에서 같은 주에 소재한 휴스턴 애스트로스에 비해 텍사스 레인저스의 팬층이 훨씬 두텁다고 하는데,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구단 명칭이 ‘텍사스’ 레인저스인 것과 함께 주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깃발을 주요 마케팅 및 커뮤니케이션 수단으로 적극 활용하고 있는 것이 그 이유인 듯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단연 눈에 들어온 것은 엄청난 크기의 먹거리들이었다. 미국 말에 “Everything’s bigger in Texas (무엇이든 텍사스에 가면 더 크다)”라는 농담이 있다고 하는데 경기장에서 본 먹거리들의 크기는 정말 상상을 초월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붐스틱(Boomstick)’이라는 이름의 초대형 핫도그가 있다. 지금은 텍사스를 떠났지만 여덟 시즌 동안 레인저스 슬러거로 활약한 넬슨 크루즈가 사용하던 방망이의 이름을 따서 출시된 이 핫도그는 길이 60센티미터에 무게는 1.2~1.3킬로그램 가까이 나간다. 핫도그 빵 위에 소고기 소세지, 칠리 소스, 나초 치즈, 구운 양파, 할라피뇨까지 넘칠 정도로 얹어져 있다 보니 핫도그 한 개가 2,000~3,000 칼로리나 된다. 2012년에 출시된 이 제품은26달러나 되는 가격에도 불구하고 그 해 20,000개 팔렸다고 하니 핫도그 메뉴 하나만 가지고 레인저스 구단의 5억원 이상의 매출을 올린 셈이다. 붐스틱을 맛보고 싶지만 그 어마어마한 크기와 칼로리 때문에 망설여지는 팬들을 위해 ‘미니 붐스틱’ 메뉴도 따로 팔고 있으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먹어봐도 될 것 같다. 그 외에도 레인저스 대표 선수 애드리언 벨트레의 이름을 딴 초대형 햄버거 ‘벨트레 버스터(Beltre Buster)’와 2014년 새로 영입된 추신수 선수의 이름을 따서 출시된 매운 맛 핫도그 ‘추몽구스(Choomongous)’도 레인저스의 초대형 괴식 중 하나이다. 맛이 궁금하긴 했지만 푸드 파이터들이나 도전 가능할 듯한 크기 때문에 포기하고, 대신 여기저기 어린 아이들이 들고 다니던 칠면조 다리를 먹어봤다. 아이들도 먹는 크기라고 생각해서 얕봤지만 남자 손바닥 한 뼘은 족히 되는 크기에 결국 다 못먹었다. 크기에 압도되어 입에 꾸역꾸역 집어 넣다 보니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먹었다.

초대형 괴식 3종 세트 - 붐스틱, 벨트레 버스터, 추몽구스


이야기가 나와서 말이니 글로브라이프 파크에도 다른 많은 야구장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음식만 먹는 데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구비되어 있다. 외야 관중석 뒤쪽으로 가면 ‘밴더그리프 플라자(Vandergriff Plaza)’라는 널찍한 푸드코트 광장이 있다. 여기에서는 붐스틱과 같은 초대형 음식을 팔지는 않지만, 경기 시작 전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핫도그, 버거, 나초, 맥주 같은 전형적인 야구장 먹거리를 다양하게 즐기면서 분위기를 달구고 있었다. 광장 한 쪽에 위치한 큼지막한 스크린으로 경기를 생중계해주기 때문에 이닝 도중에도 편하게 경기를 관람하며 음식을 즐길 수 있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텍사스 레인저스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라고 할 수 있는 놀란 라이언의 동상이 서 있다. 관중들에게 커튼 콜로 인사하고 있는 모습의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려는 팬들 때문에 이 광장은 항상 붐볐다. 밴더그리프 플라자와 경기장 사이에는 구단 사무실 건물이 가로지르며 위치해있는데, 대게 외야석 뒤를 탁 트이게 설계해서 지어놓은 보통의 구장들과는 다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다행히 구단 사무실 건물이라고 해서 쌩뚱맞은 오피스 건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흰색 철제 구조물로 꾸며져 있는 덕에 얼핏 보기에는 단체 스위트 관람석처럼 보였다.

경기 시작 전 밴더그리프 플라자에서 배를 채우는 팬들



경기장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 추신수의 위상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보니 다른 팀보다 예전 선수의 저지를 입은 팬들의 수가 상당히 적었다. 놀란 라이언 정도를 제외하고는 과거 선수들의 유니폼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마도 1972년 창단 후 한 번도 월드시리즈 우승을 못하고 있는 팀의 초라한 성적 탓에 자랑할 만한 선수가 별로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었다. 또한 90년대 팀을 이끌었던 라파엘 팔메이로, 후안 곤잘레스, 이반 로드리게스와 같은 주축 선수들이 금지약물 복용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대신 현재 팀의 기둥으로 활약 중인 애드리언 벨트레의 저지를 입은 팬이 단연 많았다. 마침 전날 9회초 투아웃까지 노히트노런 투구를 펼치다가 아쉽게 마지막 타자에게 안타를 허용하면서 대기록을 놓친 다르빗슈 유의 유니폼도 자주 보였고, 추신수 유니폼을 입은 팬들도 많았다. 특히 한창 맹타를 휘두르던 추신수 선수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는지 경기 당일 추신수 선수의 이름과 등번호 17번이 적힌 티셔츠를 사서 그 자리에서 갈아입는 한 노부부 팬의 모습을 보니 괜히 내가 다 뿌듯했다. 이 분들의 모습을 보니 나도 가만히 있으면 안되겠다 싶어서 큰 맘 먹고 파란색 추신수 저지를 사입었다. 미국에서 야구장은 수도 없이 많이 가봤지만 100달러 상당의 유니폼을 사 입은 것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추신수 티셔츠로 갈아입은 노부부 레인저스 팬


추신수 선수의 위상은 관중들이 입은 유니폼 외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한 눈에 봐도 경기장 곳곳에 한국 기업의 광고가 많이 붙어 있었다. 삼성, LG, 한국타이어 같이 이미 세계 시장에서 손꼽히는 글로벌 기업의 광고는 다른 구장에도 종종 봐왔지만 목동구장에서나 볼 수 있는 넥센타이어의 광고를 보게 될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다. 한국 기업의 광고는 대체로 좌측 펜스 주변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주로 우익수로 출전하지만 당시에는 주로 좌익수로 뛰었던 추신수 선수의 포지션을 다분히 고려한 자리 배치인 듯 했다. 실제로 구장을 찾은 한국인 팬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한국으로 중계되는 방송화면에의 노출도 고려하고 광고효과를 계산하여 광고를 설치하지 않았을까 싶다. 여하간 글로브라이프 파크에선 만난 한국 기업 광고는 뉴욕의 타임스퀘어에서 만나는 한국 기업 광고와는 또다른 반가움을 안겨다 주었다.


유니폼도 사입고 설레는 마음으로 자리를 찾아 앉았다. 추신수 선수가 활약 중인 좌익수 쪽 내야와 외야의 경계 부근 자리에 미리 예매를 해두었었다. 아직은 경기시작 전이라 미처 다 보지 못한 프로그램 책자를 읽고 있었는데, 옆자리에 앉은 나이 지긋한 아저씨들이 자리를 바꿔 달라고 부탁해왔다. 친구들과 가족 동반으로 경기를 보러 왔는데 자기들만 떨어져 앉게 되어서 부탁을 해온 것이었다. 더 뒷자리로 가는 것도 아니고 괜히 일행 중간에 끼면 나만 불편할 것 같아 흔쾌히 자리를 바꿔주었다. 그러나 웬걸, 새 자리에 앉아보니 좌측 파울 폴이 홈플레이드 쪽 시야를 절묘하게 가리고 있었다. 뭔가 당한 느낌이었지만 다시 바꾸자고 하기도 뭐해서 목을 옆으로 쭉빼고 경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어딜 가도 열성적인 레드삭스 원정 팬들


글로브라이프 파크에서는 토요일 저녁 경기와 일요일 낮 경기를 관람했다. 상대 팀은 2013년 월드시리즈 우승에 빛나는 보스턴 레드삭스였다. 한국 야구장은 원정 팀 응원 관중이 전체의 절반 가까이 차지하는 경우가 많지만 미국 야구장은 압도적으로 홈 팀 관중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하지만 원정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상당 수의 팬들을 몰고 다니는 몇몇 팀이 있는데,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며 열성적 팬층이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뉴욕 양키스, LA 다저스, 시카고 컵스, 샌프란시스코, 세인트루이스, 그리고 보스턴이 그 부류에 속한다. 이번 텍사스 원정 경기에도 많은 보스턴 팬들이 경기장을 찾아 레드삭스 선수인 더스틴 페드로이아나 데이빗 오티스 유니폼을 입은 팬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이 때문인지 보스턴 선수들도 좋은 활약을 펼칠 때 적지 않은 응원을 받았고, 특히 텍사스 소속으로도 활약한 적이 있던 마이크 나폴리, A.J. 피어진스키, 우에하라 코지는 홈팀 팬들로부터도 더욱 큰 환호를 받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환호는 추신수 선수가 등장할 때 받은 환호였다. 평소의 모범적인 이미지와 상반되는 ‘Turn Down for What’이라는 강렬한 비트의 힙합 음악을 배경으로 깔고 추신수 선수가 타석에 들어서자, 레인저스 팬들은 하나 같이 입을 모아 ‘우~’하며 야유를 보냈다. 야유 같이 들리지만 이것이 추신수 선수에 대한 독특한 응원 방식이다. 이미 많은 메이저리그 팬들은 중계방송이나 기사를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추신수는 클리블랜드 간판타자로 활약하면서부터 홈 관중들로 이러한 응원을 받아왔다. 다름 아니라 추신수라는 이름의 발음에 ‘우-‘라는 소리가 들어가기 때문에 이 점에 착안하여 관중들이 재치있게 야유처럼 들리는 환호성을 개발한 것이다. 사실 추신수 선수 외에도 이름에 ‘우-‘ 발음이 들어가는 유명 선수들은 종종 이러한 응원을 받고는 한다. 내가 직접 본 경기에서만 하더라도 볼티모어 오리올스 외야수 넬슨 크’루-‘즈, 밀워키 브루어스 포수 조나단 ‘루-‘크로이 역시 팬들로부터 야유 같은 응원을 받았다. 추신수 선수의 동료 다르빗슈 유 역시 ‘우-‘와 유사한 발음의 ‘유-‘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비슷한 환호를 받는 선수 중 하나이다. 마침 내가 관전한 두 경기에서 추신수 선수는2루타와 홈런을 각각 한 방 씩 터뜨리며 활약한 덕에 이러한 환호성을 많이 들을 수 있있다.


전날 경기에서 사용된 공을 구입하고 있는 레드삭스 원정 팬들

추신수 선수가 첫날 2루타를 때려낸 그 공은 바로 다음날 경기장 한 구석의 수집품을 파는 코너에 전시되어 있었다. 추신수의 2루타 공 외에도 다른 선수들이 안타를 치거나 타점을 기록할 때 실제 경기에서 사용된 공들이 40달러 되는 가격에 판매되고 있었다. 보스턴 원정 팬들도 비록 파울볼일지라 레드삭스 선수들이 경기에서 사용한 공 중에서 살 만한 물건이 있는지 열심히 찾고 있었다. 메이저리그 공인구가 30달러이니 내가 좋아하는 선수가 사용한 공이라는 이유로 10달러를 더 지불하는 셈이다.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닌 게 될 수 있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여 더 가치있는 상품으로 만들려는 구단의 꼼꼼한 노력이 느껴졌다. 이러한 노력들이 모여져서 팬들의 로열티가 생기고 결국에 그들의 주머니를 열게 하는 것일 것이다.



'어머니의 날'의 메이저리그 경기


둘째날 경기는 어머니의 날(Mother’s Day)에 치러졌다. 미국에는 5월 둘째 주 일요일 어머니의 날과 6월 셋째 주 일요일 아버지의 날이 따로 존재한다. 가족 단위의 관중이 다수인 메이저리그에게 있어 이 두 날이 의미하는 바는 상당히 크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인다. 어머니의 날 하루만큼은 메이저리그의 모든 선수들이 유니폼에 여성 유방암에 대한 인식 제고 캠페인의 상징인 핑크리본 패치를 달고 경기를 뛴다. 뿐만 아니라 운동화와 장갑에서부터 방망이까지 핑크색으로 색깔 맞춤을 하고 경기에 나서는 선수도 많다. 이 날 경기에서 추신수 선수도 핑크색 팔목 보호대를 착용하고 나와 의미 있는 캠페인에 동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경기에 앞서서도 레인저스 소속 젊은 선수들이 그들의 어머니를 경기장에 초대하여 그라운드에서 어머니의 날 기념행사를 가졌다. 이 날 따라 유독 어머니와 함께 온 관중들도 많아 보였다. 글로브라이프 파크에는 5회초가 끝나면 ‘딥 인더 하트 오프 텍사스(Deep in the Heart of Texas)’라는 곡의 반주에 맞춰 모든 관중이 박수 치고 노래 부르는 시간이 있다. 그 시간에 전광판을 통해 “Thank you, Mom”과 같은 메시지를 적은 플래카드를 들고 함께 노래를 부르는 어머니와 아들 딸들의 모습이 비춰지면서 어머니의 날 야구장만의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홈플레이트 뒤에서 바라본 글로브라이프 파크의 전경


경기가 모두 끝나고 홈플레이트 쪽 출구를 통해 나오니 안타까운 사연이 있는 동상을 볼 수 있었다. 2011년 7월 텍사스 레인저스 외야수로 뛰던 조쉬 해밀턴은 파울볼을 관중석으로 던져 주었으나 관중이 그 공을 잡는 과정에서 난간 넘어 7미터 아래로 추락하여 사망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당시 우리나라 스포츠 뉴스에도 소개가 될 정도로 미국에서는 큰 사건이었고, 특히 사망한 관중이 여섯 살 된 아들과 함께 경기를 보러 온 소방수였다는 사실에 아픔이 더했다. 텍사스 레인저스 구단은 사고 재발을 막기 위해 외야 난간 높이를 올렸고, 이듬 해에는 목숨을 잃은 아버지를 추모하고 아버지를 잃은 아들을 위로하고 경기장을 찾는 모든 레인저스 팬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해 부자가 손을 잡고 경기장으로 향하는 모습의 동상을 세웠다. 비록 동상이지만 실제로 보니 부자의 표정이 너무나도 밝아서 볼수록 마음이 아파지는 그런 동상이었다. 한편, 당시 외야수로 뛰었던 조쉬 해밀턴은 동상이 세워진 바로 다음 해 자유계약선수 신분으로 같은 지구 라이벌인 LA 에인절스로 거액의 연봉을 받고 이적하게 되었다. 결코 사건에 책임이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레인저스 팬이라면 두고두고 야속하게 느껴질 부분일 것 같다. 그러나 야속함도 잠시, 내가 야구장을 다녀오고 나서 정확히 1년이 지난 2015년 조쉬 해밀턴은 다시 텍사스로 트레이드 되어 레인저스 선수로 뛰고 있다. 인생 사 참 모를 일이다.


글로브라이프 파크에서 나오면 반대편에 마치 우주선 같이 생긴 건물이 하나 자리하고 있는데, 전세계에서 가장 가치있는 스포츠 구단 중 하나인 미식축구 팀 댈러스 카우보이스의 돔구장 AT&T 스타디움이다. 알링턴과 인근 댈러스 지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인 미식축구의 인기를 반영하기라도 하듯 그 규모와 자태가 웅장하기 그지 없다. 앞서 언급한 조쉬 해밀턴이 과거 레인저스를 떠나면서 댈러스는 미식축구의 도시이지 야구의 도시가 아니었다라고 말해 레인저스 팬들의 빈축을 산 적이 있긴 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AT&T 스타디움의 규모가 그 사실을 반증해준다. AT&T 스타디움은 야구장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인데다가 비시즌에도 구장 투어를 운영하기 때문에 야구 경기를 즐기기에 앞서 한 번 둘러보기 좋다. 실제로 둘째날 경기에 앞서 나도 가이드 투어를 신청했는데, 멀리서 온 텍사스 팬들과 원정 응원을 온 보스턴 팬들이 꽤 많이 투어에 함께 참여했다. 투어 비용은 20달러가 조금 안되었는데, 실제 그라운드도 밟아볼 수 있고 초대형 HD 전광판, 선수와 치어리더의 락커룸까지 볼 수 있는 알찬 프로그램이라 돈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투어 막바지에 메이저리그 그 어떤 팀의 용품 판매점보다, 아니 웬만한 의류 매장이나 슈퍼마켓보다 매장 규모나 판매품 구색 면에서 앞서는 카우보이스 매장을 둘러보면서 미국에서 미식축구가 어떤 위상을 가지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이야기가 조금 옆길로 샜다. 알링턴의 글로브라이프 파크에서 이틀 간의 여정을 마치면서 머리 속에 가장 크게 남은 생각은 예상보다 한국인이 너무 없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LA에 비해 댈러스 및 알링턴 인근의 한인 커뮤니티 규모가 작고 이 곳을 찾는 관광객 역시 적기 때문에 류현진 선수가 등판하는 다저스 홈 경기만큼의 한인 관중을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추신수 선수가 지금까지 메이저리그에서 쌓아온 경력과 팀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고려하면, 그리고 현지 관중들에게 받고 있는 인기를 직접 실감하고 나니 더 많은 한인 관중이 경기장을 찾아 응원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지울 수 없었다. 앞으로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추신수 선수가 텍사스에서 6년 더 활약할 예정인 만큼 야구장 자체도 멋지고 주변에 놀이공원 등 다른 즐길거리도 있는 알링턴을 더 많은 한인들이 찾았으면 좋겠다. 다행히 최근 한국에서 댈러스 직항 노선이 많이 생기는 추세이고 댈러스와 차로 네 시간 거리인 휴스턴으로도 출장 오는 한국인도 많아지고 있다고 하니, 더 많은 한국인이 글로브라이프 파크를 찾기를 기대해본다.                 

글로브 라이프 파크의 야경









작가의 이전글 미국 최고의 베이스볼 타운, 부시 스타디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