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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D Jun 09. 2016

100년의 전통 그리고 변화의 시작, 리글리 필드

Wrigley Field, Chicago, IL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외야 담장으로 유명한 시카고 컵스의 홈구장 리글리 필드는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오래된 야구장 중 하나이다. 1914년에 개장한 리글리 필드는 그보다 두 해 일찍 문을 연 보스턴의 펜웨이 파크에 이어 두 번째로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시카고 도심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마을에 자리한 이 야구장은 오래된 야구장만에서만 느낄 수 있는 예스러운 멋을 간직하고 있다. 오래된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리글리 필드는 다소 투박해 보이는 외관에서부터 아기자기한 경기장 내부까지 과거 미국 야구팬들이 경기를 즐겼을 야구장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리글리 필드는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4년에 시카고 시에서 지정한 도시 랜드마크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을 만큼 시카고 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관광명소로 손꼽힌다. 


개인적으로는 보스턴의 펜웨이 파크보다 시카고의 리글리 필드에서 옛날부터 이어져 온 미국 야구장 고유의 분위기가 더욱 잘 느껴졌다. 담쟁이덩굴이 고풍스러운 정취를 자아내서, 혹은 구장 내 광고판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아니면 한동안 우승의 감격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컵스 팬들의 100년 된 한이 경기장에 서려 있는 것 같아서 등등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동양인 관광객이 드물어서 그렇게 느꼈던 것 같다. 나도 동양인 관광객 중 한 사람이긴 했지만 경기장을 돌아다니다 동양인 관광객이 눈에 띄면 미국 야구장에 온 것 같은 실감이 덜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 때문인지 마쓰자카부터 우에하라까지 연이은 일본인 선수의 활약 덕분에 일본인 관중을 빈번히 마주치게 되는 펜웨이 파크에서는 미국 야구장만의 이국적인 분위기가 덜 느껴졌다. 그에 반해 최희섭 선수와 후쿠도메가 잠시 활약하긴 했지만 지금은 동양인 관광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리글리 필드에 있다 보면 미국 야구의 전통과 역사의 현장 한 가운데에 와 있다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을 수 있었다. 



올드 베이스볼 타운, 리글리빌만의 매력


리글리 필드는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오랫동안 낮 경기 원칙을 고수했던 야구장이다. 과거 메이저리그 경기는 낮에만 치러졌었다. 1935년 신시내티 레즈가 홈구장에 조명탑을 설치하면서 처음 열린 야간 경기는 보다 많은 관중과 중계방송 시청자를 확보하기 위해 이후 여러 구단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그러나 1942년 컵스 구단주가 리글리 필드에 설치하려던 조명탑을 2차대전 군수품으로 기증한 이래로 리글리 필드의 야간 경기는 차일피일 미뤄졌다. 그렇게 수십년 동안 리글리 필드에서는 모든 경기가 낮에 치러졌다가 1988년 8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첫 야간 경기가 열리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의 영향은 아직까지 남아있어 지금도 유독 컵스의 홈경기는 주중과 주말을 가릴 것 없이 낮 경기가 많다. 나 역시 이러한 의미를 살리고자 굳이 낮 1시 20분에 경기가 열리는 일요일에 맞춰 시카고를 방문했고, 경기 시작 한참 전에 야구장이 위치한 애디슨 역에 도착했다. 마침 이 날은 미식축구 팀 시카고 베어스의 홈 개막전이 열리는 날이라 관심이 그 쪽으로 쏠린 탓인지 주말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생각보다 관중들이 일찍부터 모여들지는 않았다. 암표상들도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표를 팔아치우려 하는 모양새를 보니 아직 안 팔린 표가 많이 남은 것 같았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바글대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글리 필드를 둘러싼 마을 리글리빌(Wrigleyville)은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와 매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경기장 주변의 클라크 스트리트를 따라 리글리 필드와 함께 100년동안 그 자리를 지켰을 것 같은 기념품샵과 스포츠 펍들이 즐비했다. 시카고 컵스 티셔츠를 입고 있는 사람들이 가게에 들러 또다른 컵스 티셔츠를 고르고 있었고, 펍에 딸려 있는 테라스에는 벌써 술을 거하게 마신 팬들이 경기 시작을 기다리며 주말 오후의 나른한 햇볕을 만끽하고 있었다. 야구장 바로 맞은 편에 위치한 ‘커비 베어(The Cubby Bear)’라는 스포츠 바 안의 무대 위에서는 이미 춤판이 한창이었다. 사람들의 얼굴에서 바쁜 일상으로부터 벗어난 기쁨과 경기를 앞두고 생기는 설렘의 감정이 고스란히 읽혀졌다. 꼭 100년 전 컵스 팬들도 같은 자리에서 같은 표정을 짓고 경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렸을 것만 같았다. 

리글리빌은 말 그대로 리글리 필드에 의한, 리글리 필드를 찾는 야구 팬들을 위한 올드 베이스볼 타운이었다. 도시 전체를 놓고 보면 미국 최고의 야구 도시로 세인트루이스, 보스턴 등을 꼽는 사람들이 많지만, 야구장 주변만 따진다면 시카고의 리글리빌이 단연 으뜸이었다. 실제로 리글리빌이라는 마을 이름도 리글리 필드의 이름을 따서 붙여졌다고 하는데, 이를 제외하고는 미국 어디에도 야구장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지은 곳은 없다. 보스턴의 펜웨이 파크도 펜웨이라는 지명을 따서 야구장 이름을 지었지, 그 반대의 경우는 아니다. 



세기의 축제 (Party of the Century)


리글리 필드 앞에서 재미있는 응원문구(?)가 쓰여진 티셔치를 팔고 있던 가판대

경기장 가까이 다가가자 다양한 티셔츠를 팔고 있는 가판대들이 많이 보였다. 컵스 로고와 응원 문구가 새겨진 뻔한 티셔츠가 아니라 상대 팀에 대한 비방과 욕설이 담긴 티셔츠가 걸려 있어서 자극적인 글귀 하나하나를 읽어보는 재미가 있었다. 컵스의 라이벌 팀인 카디널스와 화이트삭스 팀을 비방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시카고 미식축구 팀 베어스의 맞수 그린베이 패커스와 농구 팀 불스의 지구 라이벌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서 뛰는 르브론 제임스까지 전방위적 저주의 대상은 끝이 없었다. 내가 시카고를 방문한 2014년에는 심지어 컵스의 지독한 성적 부진 때문에 고통받는 팬들의 신세를 한탄하는, “This team makes me drink (우리 팀 때문에 술을 끊을 수가 없다)”, “Pray for our prospects (유망주가 터지길 기도합니다)” 등의 자조 섞인 문구가 담긴 티셔츠도 있었다. 우승 못한 팀의 팬들의 한이 100년 넘게 묵으면 이렇게 되는구나 싶었다. 구단의 공식 클럽하우스 스토어의 옷들도 좋지만, 리글리 필드에 온다면 이런 가판대에서 티셔츠를 하나 사 입고 로컬 팬 행세를 하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개장 100주년을 맞이해 리글리 필드 밖에 내걸린 대형 배너. 우측 아래에 DAD, SON이라고 쓰여진 유니폼을 입은 부자 컵스 팬이 눈에 띈다.

공교롭게도 내가 리글리 필드를 찾은 2014년은 리글리 필드가 개장한 지 딱 100년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홈플레이트 쪽 야구장 외벽에 “It’s the party of the century (세기의 축제입니다)”라는 문구의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 그 아래에는 구장이 세워진 연도인 1914와 그 해 연도인 2014, 이렇게 여덟 개의 숫자가 쓰여진 대형 배너가 걸려 리글리 필드로 향하는 팬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배너가 너무 커서 여간해서 사진 한 장에 담기 힘들어 보였지만 야구장을 찾은 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기념 사진 촬영에 열심이었다. 컵스 팬들은 부진한 팀 성적에는 비록 실망할지언정 리글리 필드의 100주년은 진심으로 축하할 마음만은 가득해 보였다. 실제로 개장일로부터 정확히 100년째가 되던 2014년 4월 23일에는 야구장을 찾은 팬들이 리글리 필드만을 위한 생일 축하 노래도 떼창으로 불러주고 생일 케익도 만들어졌을 정도로 리글리 필드는 컵스 팬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구장이다. 


경기 시작이 임박해오자 표를 구하려는 사람들, 일행을 기다리는 사람들, 입장 전에 기념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리글리 필드 메인 게이트 앞이 붐비기 시작했다. 많은 인파 사이로 멋드러진 스윙 음악 소리가 들리기에 소리를 따라가보니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로 이루어진 5인조 관악밴드가 라이브 공연을 하고 있었다. 시카고 컵스 홈 유니폼 상의에 깨끗한 흰색 정장 바지를 맞춰 입으신 이 할아버지 밴드의 이름은 ‘딕시랜드 밴드(The Chicago Cubs Dixieland Band)’로 컵스의 홈 경기가 있는 주말이면 항상 경기에 앞서 공연을 펼친다고 한다. 1982년 홈 개막전부터 공연을 시작하였고 예전에는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연주했다고 하니 리글리 필드의 유명인사나 다름 없는 분들이다. 따로 공연비를 받는 통도 없었고 그저 컵스와 리글리 필드를 사랑해서 지금까지 연주를 해오신 분들이었다. 멋진 어르신들이 연주하는 1930년대 스타일의 스윙 음악을 라이브로 들으니 올드 베이스볼 타운 분위기가 더욱 무르익는 것 같았다. 

경기 시작 전 풍악을 울리는 딕시랜드 밴드의 모습

리글리 필드 밖에는 딕시랜드 밴드 외에도 유명한 사람들이 또 있다. 경기 시작 두어 시간 전에 가면 야구장 좌측 담장 넘어 웨이브랜드 애비뉴에 가면 글러브를 낀 채로 서성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볼호크(ballhawks)’라 불리는 이들은 경기 시작 전 배팅 연습 때 리글리 필드 밖으로 넘어가는 야구공을 낚아채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공이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데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처음에는 한심해보이기도 했지만, 귀신 같은 위치선정과 재빠른 몸놀림으로 장외홈런볼을 낚아내는 모습을 보니 금세 생각이 달라졌다. 볼호크마다 활동 반경이 정해져있고 이를 침범하면서까지 공을 좇아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하니 이 정도면 프로들이라고 봐도 될 것 같다. 



담쟁이덩굴 펜스와 수동 스코어보드


리글리 필드 안으로 들어가니 다른 야구장에서는 볼 수 없는 오래된 야구장만의 흔적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우선 복도 천장이 유난히 낮았다. 오래된 건축양식으로 야구장을 짓다 보니 관중석 한 층 한 층을 올릴 때마다 철골로 된 지지기반을 촘촘히 쌓아 올렸던 탓인지, 다른 야구장 복도 천장 높이의 절반 정도 밖에 안돼 보였다. 복도 내 기념품샵 구석에 있는 물건을 집으려면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 할 정도였다. 무엇보다 압권은 남자 화장실에서 발견한 공용 소변기였다. 1990년대 초반 야구장이나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서나 볼 수 있던 나프탈렌 향 진하게 풍기는 철제 공용 소변기를 2014년 시카고에서 보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일부러 개인용 소변기로 안 바꾼 것인지 다른 이유 때문에 못 바꾼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잠실 야구장에서 공용 소변기의 추억을 가지고 있던 내게는 왠지 모르게 반가웠다. 아무래도 100년 넘은 역사를 자랑하는 리글리 필드였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이 괜히 정겹게 느껴졌던 것 같다. 


복도 구경을 마치고 관중석으로 들어서자 리글리 필드의 상징인 담쟁이 덩굴 펜스와 수동 스코어보드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리글리 필드는 박찬호 선수가 역사적인 메이저리그 첫 승을 올린 곳으로 한때 ‘약속의 땅’으로 불려지며 스포츠 뉴스의 자료화면에 자주 등장했다. 그 무렵 마크 맥과이어와 홈런 경쟁을 펼치던 새미 소사의 홈런 소식까지 더해지면서 한 때 리글리 필드의 모습을 일주일에 한 번씩은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 내 기억 속의 리글리 필드는 외야 담장을 뒤덮은 담쟁이 덩굴 때문인지 왠지 따뜻할 것만 같은 느낌이었는데, 실제로 보니 정말 이유 모를 푸근함이 전해졌다. 컵스의 레전드 선수인 어니 뱅크스가 홈구장을 ‘친근한 울타리(The Friendly Confines)’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내가 느꼈던 푸근함을 어니 뱅크스도 느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외야 한 가운데 솟아 있는 수동 스코어보드는 리글리 필드만의 클래식한 멋을 더해주는 또다른 명물이다. 보스턴 펜웨이 파크의 수동 스코어보드도 유명하지만, 리글리 필드의 스코어보드에서는 홈구장 경기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른 경기의 이닝 별 득점 현황까지 아주 상세히 확인할 수 있다. 가끔은 너무나도 많은 숫자들이 스코어보드에 표기되다 보니 정작 홈구장 점수는 어디를 봐야 하는지 헷갈릴 때도 있다. 어쨌든 그 많은 점수판을 스코어보드 뒤에서 한 두 명의 직원들이 눈깜짝할 사이에 바꿔놓는데 그 스피드가 놀라울 따름이다. 점수 났다고 일어나서 환호하고 박수치고 나서 스코어보드를 보면 어느 새 점수가 바뀌어 있었다. 어지간히 스코어보드에 신경을 쏟고 있지 않고서는 그들의 손을 발견하기 힘들 것이다.                                                                

리글리 필드의 외야석. 담장 너머로 루프탑 좌석도 보인다.

리글리 필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좌석 중 하나는 구장 밖 건물 옥상에 위치한 루프탑 좌석이다. 리글리 필드가 개장함과 동시에 주변 건물 옥상에 삼삼오오 모여 담장 너머로 경기를 보던 사람들이 생겨났는데, 이내 건물주가 입장료를 받고 사람들을 들이기 시작하면서 구장 밖이긴 하지만 어엿한 좌석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이제는 입장료도 웬만한 구장 내 좌석보다 비싸고 몇 달 전에 미리 예매하지 않고서는 표를 구하기 힘든 인기 좌석이 되었고, 전국구 명물로 거듭나 세인트루이스의 부시 스타디움 밖에는 이를 따라한 바까지 생기기도 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일생에 한 두 번 있을까 말까하는 기회라면 편안한 1층 내야석을 권하고 싶다. 루프탑에서는 리글리 필드의 명물인 담쟁이 덩굴 펜스와 수동 스코어보드도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옥상 위에서 일광욕을 즐기면서 야구를 보는 것도 좋지만 잘못했다간 뙤약볕에 살이 벌겋게 익을 수 있다. 물론 내가 루프탑 좌석 표를 못 구해서 아쉬운 마음에 스스로를 달래기 위해 하는 소리인 것 같기도 하다. 


루프탑 좌석도 좋고 외야석도 좋고 내야석도 좋지만, 반드시 피해야 할 곳만은 확실하다. 바로 1층 내야석 뒤쪽 자리이다. 인터넷으로 예매하다가 내야석 뒷줄이 1층 치고는 가격이 저렴한 편이라 신나서 결제했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중간 중간에 자리한 굵은 철제 기둥이 시야를 방해하는 것은 둘째치고, 2층 좌석이 앞까지 길게 나와 있어 아무리 고개를 숙여도 웬만한 뜬공은 볼래야 볼 수가 없는 구조다. 괜히 싼 게 비지떡인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현지 팬들도 기피하는 자리인지 가장 빈 자리가 많았던 구역이기도 했다. 다행히 곳곳에 중계방송을 볼 수 있는 텔레비전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제대로 현장 야구를 관람하고 싶다면, 차라리 좀 더 돈을 내고 앞자리에 구하거나 아예 2층 좌석을 구할 것을 강력히 추천한다. 

결코 앉아서는 안되는 내야 뒤쪽 좌석


Take Me Out to the Ballgame


경기 시작과 동시에 컵스는 상대팀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에게 2회까지 홈런 세 방을 얻어 맞으면서 7대0으로 끌려갔다. 2014년까지만 해도 시카고 컵스는 지금의 우승후보가 아니라 한창 리빌딩을 진행 중이던 지구 꼴찌 팀이었다. 컵스 선수들의 답답한 플레이에 열불이 나서 그런지 따끈한 햇볕 때문에 더워서 그런지, 그 어떤 야구장보다도 맥주를 사 먹는 손님들이 많았다. 덩달아 분주해진 비어맨들도 맥주 두 캔을 한 손으로 잡고 따르는 신기술을 선보이며 컵스 팬들의 열기를 식혀주었다. 나도 분위기에 취해 맥주를 주문했고 안주로 뭐가 좋을지 고민한 끝에 시카고의 대표 음식 중 하나인 딥디쉬 피자(deep-dish pizza)를 시켰다.  허기를 못 참고 씬 피자 한 조각까지 추가로 시켰으니 안주라기 보다는 식사에 가까운 양이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먹어치웠다. 리글리 필드 안의 피자는 모두 1974년에 문을 연 시카고의 피자 맛집 지오다노스(Giordano’s)에서 납품하는데, 야구장 피자라고 해서 그 맛이 어디 달아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요즘에야 피자와 맥주의 조합을 일컫는 ‘피맥’이라는 단어가 흔히 쓰이지만, 당시만 해도 치맥만 알던 나에게 피맥의 진수를 알려준 맛이었다. 


배도 불렀겠다 술기운도 올랐겠다 슬슬 졸음이 오던 차에 갑자기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면서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났다. 7회 스트레칭 타임을 맞이해 “Take me out to the ballgame”이라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 일어난 것이었다. 메이저리그 경기가 열리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연주되는 이 곡은 미국 야구의 상징과도 같은 노래로, 다 큰 어른들이 맥주 잔을 듣고 동요 같기도 한 이 노래의 라이브 오르간 반주에 맞춰서 아이들처럼 떼창하는 모습이 나름 장관이었다. 특히 리글리 필드에서는 특유의 목소리로 “아 원, 아 투, 아 쓰리”하며 Take me out to the ballgame을 선창했던 장내 아나운서 해리 캐레이를 추억하기 위해 지금도 매 경기 추첨된 관중이나 유명인사가 중계 부스에서 노래를 선창하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해리 케레이가 관중들을 향해 마이크를 뻗고 호응을 유도하는 모습은 야구장 밖에 컵스 레전드 선수들과 함께 동상으로 남아 올드 팬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었다. 

Take me out to the ballgame♪ 만취 떼창 


한편 내 옆자리에서는 한 오지랖 넓으신 아저씨 팬이 노래 시작 전에 런던에서 온 관광객 일행에게 어떻게 노래를 따라 불러야 하는지 가사를 일일이 알려주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이미 반쯤 취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열변을 토하며 알려주는 모습에서 컵스 팬들의 리글리 필드만의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의 자부심과는 별개로, 컵스는 파이어리츠 선발투수 게릿 콜에게까지 홈런을 허용하면서 10대4로 크게 패하고 말았다. 홈런볼을 잡은 외야의 팬들은 야유의 표시로 모두 경기장 안으로 공을 되던졌다. 자부심은 자부심이고, 짜증은 짜증인 모양이었다.

묻지도 않았지만 노래 가사를 과도하게 친절히 알려주시는 아저씨 팬


100살 리글리 필드의 회춘


만 100살이 넘은 리글리 필드는 2015년을 기점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2015년부터 4년에 걸친 전면적 구장 리노베이션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외야 관중석 확장, 클럽하우스 확장 개선, 불펜 위치 조정, 광고판 추가 설치 등의 내용으로 진행되는 리노베이션 작업의 핵심은 초대형 비디오스크린 전광판 점보트론의 설치일 것이다. 최근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방송기술의 고도화에 따라 불편하게 야구장에서 경기를 볼 바에야 차라리 편하게 집에서 중계방송을 보겠다는 팬들이 많아지는 것에 대비하여 구장 내 경험(at-game experience)을 현격히 개선하는 데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에 컵스 구단도 리글리 필드 역사 상 최초로 초대형 전광판을 외야에 설치하여 2015년부터 경기 중 리플레이 영상이나 이닝 사이에 엔터테인먼트 영상을 상영하기 시작했다. 다른 야구장에서는 진작부터 있어 왔던 것이라 대수롭지 않은 변화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수동 스코어보드와 담쟁이 덩굴 펜스로 대표되는 클래식한 멋을 간직한 리글리 필드가 최첨단 문물인 점보트론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2015년 4월 공사 중인 점보트론의 모습


실제로 대대적인 리노베이션 계획이 발표되자 리글리 필드의 전통이 사라질 것을 우려한 올드 팬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또한 점보트론으로 인해 자칫하면 멸종 위기에 처할지도 모를 볼호크들과 루프탑 좌석의 시야 확보에 치명타를 입을 몇몇 건물주들의 반대가 심했었다. 특히 웨이브랜드 애비뉴의 루프탑 건물주들은 이미 컵스 구단에 수수료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장기 사업권 계약을 체결한 상태였기 때문에, 점보트론 설치를 구단의 계약 위반으로 간주하여 소송까지 제기했고 결국에는 구단이 일부 건물을 매입하는 것으로 논란이 일단락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컵스 구단주가 리글리 필드 고유의 전통미를 상징하는 담쟁이 덩굴 펜스와 수동 스코어보드를 교체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고 하니 다행이다. 리글리 필드는 단순히 시카고 컵스의 홈구장을 넘어 시카고 도시의 랜드마크이자 미국 야구의 문화유산인 만큼, 리노베이션 작업이 모두 완료된 이후에도 옛날의 아름다움은 그대로 간직한 채 더욱 멋진 모습으로 거듭나 있기를 기대해본다. 그리고 그 때쯤이면 회춘한 리글리 필드 한 가운데서, 마침내 염소의 저주를 풀어내고 월드시리즈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환호하는 시카고 컵스 선수들과 팬들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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