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작한 일상을 무한하게 만드는 재료
취향이란 단어를 내 맘대로 정의하자면, 뭔가를 왜 좋아하냐고 물었을 때 어디부터 얘기해야 할지 몰라 잠시 멈춰 고민하게 하는 것. 좋아하는 이유에 '그냥'이란 답은 짧고 금세 휘발되지만 주절주절 따라 붙는 이야기는 힘이 세다. 취향을 든든히 지탱하고 인생을 더 풍요롭게 한다. 사람을 고유한 존재로 만든다.
언젠가부터 서울에서 가장 좋아하는 동네 중 하나로 북촌을 꼽게 되었다. '종로 근방은 고즈넉해서 어디든 좋지~' 하던 마음에서 레이더망이 좀더 좁혀진 셈이다. 런던발 베이글 파는 서촌 말고, 맞은편 인사동 쌈지길 말고 가회동 성당을 따라 종로 02번 마을버스가 느릿느릿 지나는 그 북촌길. 언제 가도 요란하지 않고 적당한 활기가 도는 예쁜 골목이란 이유도 있지만 북촌에 얽힌 이야기가 어느새 너무 많아져서다.
초여름 능소화가 예쁘게 우거지는 골목으로 접어들면 좋아하는 친구들이 단골로 찾는 비건 식당이 보인다. 버섯덮밥 먹은 지 오래 됐는데 또 먹고 싶다, 비건인 어떤 친구가 떠오르는데 다음에 같이 오고 싶다, 그러고 보니 그와 올 겨울에 굴을 쪄 먹었는데 참 맛있었지~. 바로 옆엔 재작년 여름 맘에 쏙 드는 원피스를 샀던 빈티지 편집샵이 있다. 그 가게는 들어가면 무조건 사고 싶어지니까 눈을 꽉 감고 지나쳐야 한다. 조금 더 걸으면 홍상수 영화를 찍은 카페 두 곳이 연달아 보이고, 몇 발짝 더 지나면 북촌에서 가장 좋아하는 카페가 나온다. 할아버지 바리스타님이 원두를 직접 손으로 드륵드륵 갈아주시고 마당에는 800년 묵은 향나무가 묵묵히 존재를 뽐내는 곳. 그 카페에서 읽은 책과 나눈 농담들이 마인드맵처럼 줄줄이 떠올라 기분 좋은 회상에 빠져들게 된다.
이렇게 골목마다 이야기 보따리를 잔뜩 마주칠 수 있는 데는 오래도록 북촌을 좋아해 온 남자친구의 공이 컸다. 인생에서 '외로웠다'고 말할 만한 시기에 그는 늘 혼자 북촌을 걸었다고 했다. 확실히 외로움이란 감정은 사람을 물렁하게 만드는가 보다. 쇠붙이만큼 단단하던 사람도 외로워지면 액체처럼 녹아 산산이 흩어진다. 어떤 모양의 거푸집에 들어가서 새로운 주물이 되는지는 오롯이 선택에 달렸다. 그가 어느 시절 외로움에 기대 북촌 곳곳에 응고시켜둔 이야기가 잘 발효되어 지금의 내게 깊은 맛을 내고 있다고 느낀다.
서로의 삶에 기억할 만한 이야기를 심어주는 일은 이야기 자체만큼이나 소중하다. 이번 주말에도 북촌 곳곳을 걷는 동안 분명 동네 자체는 조용한데 곳곳에서 내게 이야기를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져 와글바글 신이 났다. 어쩌면 사는 동안 발 디딜 땅이 물리적으로 유한하고 기후위기로 그마저 줄어들고 있는지 모르지만, 매일 비슷한 거리를 디디면서도 매번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엮어보면 어떨까. 납작한 일상을 무한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건 오로지 나 혹은 타인과의 이야기뿐이다. 인생의 재미라는 중요한 문제에 너무 단순한 결론일까? 아무려면 이 간결한 공식이 나는 마음에 든다.
2022. 6.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