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월 2주차가 지나가고 있다. 꽉 채워 2주간 일을 하지 않았다니! 한 줌 노동도 없이 이렇게 오래도록 놈팽이처럼 돈만 쓰고 돌아다녀도 되는 걸까? 몹시 길티한 기분마저 든다. 6월 6일 늦은 밤 비행기로 두바이를 경유해 런던으로 갔다. 제일 가보고 싶은 국가였지만 정작 가고 싶은 데는 딱히 없던 그곳에서 도파민 풍성한 며칠을 보내고 스페인으로 건너 왔다. 이베리아 반도는 왜인지 내게 무서운 이미지여서 떠나오기 직전까지 두려움이 극에 달했는데, 의외로 줄곧 온화한 느낌만을 주고 있다. 활기찬 바르셀로나를 지나 지금 머물고 있는 이곳 남부 도시는 상냥한 사람들로 가득하다. 여기까지 와서야 마음 한켠에 품고 있던 전전긍긍한 마음을 겨우 내려놓을 수 있었다.
안식월을 보내면서 내가 얻고 싶은 게 있었을까. 사실 그런 게 없어도 아무 상관은 없다. 그럼에도 굳이 찾자면 나는 일하지 않을 때의 내가 어떤 특성을 갖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물론 평상시에도 퇴근 이후 운동을 하거나 사람을 만나면서 스스로의 새로운 모습을 알아채곤 하지만, 진득하게 궁리하기엔 하루 중 노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높으니까. 음... 이런 글을 쓰려고 마음 먹고 앉으면 답을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잘 모르겠다. 아무래도 아직 덜 쉰 것 같다. 그래도 확실한 건 2주쯤 펑펑 노니까 일 생각은 이제 거의 나지 않는다. 찻잔 밖으로 완전히 꺼낸 티백처럼.
그 대신 오늘 있었던 일들을 써보려고 한다. 오전에는 비가 와서 숙소 옥상의 테라스에 앉아 멍때렸다. 지금 묵고 있는 프리힐리아나의 숙소는 지대가 높아 저멀리 잔잔한 지중해가 훤히 내다보인다. 비가 약-강-중간의 강도로 막을 나누어 내리는 가운데 안달루시아 산맥 위쪽에서 장엄한 천둥이 울리고 번개가 내리꽂혔다. 바다 어디쯤에서는 소용돌이 같은 공기의 움직임도 보이길래 '그 옛날 사람들은 이렇게 심상치 않은 자연 현상을 볼 때 얼마나 두려웠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더 신을 믿지 않았을까?
점심쯤 되니 비가 그쳤다. 유럽 사람들은 테라스에 상당히 진심인 것으로 보이는데, 비 그친 지 얼마나 됐다고 물기도 닦지 않은 노상 테이블에 득달같이 모여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이 마을에 머무른 지도 나흘쯤 되어선지 솟아선 안될 도전 정신이 차올라서 웬 폴란드 식당에 들어갔다. 지나치게 느끼한 치킨 요리와 굴라쉬 스프, 바람 불면 휘휘 날아가는 노란 샤프란 밥과 시큼한 덤플링을 먹었다. 단지 식사를 마쳤을 뿐인데 몹시 피로해졌다.
느즈막히 식당을 나오니 오후 4시. 네르하 해변으로 내려가기는 귀찮아서 마을의 수영장 겸 카페에 갔다. 바르셀로나 데카트론 매장에서 샀던 수영복을 드디어 개시할 기회였다. 아직 날이 흐려선지 한 가족 말고는 사람이 없었다. 완전히 맥주병인 내게 물은 처음 디뎌 본 유럽 땅만큼이나 낯설고 두려운 공간이다. 사다리를 붙잡고 명치까지 몸을 담그는 데만 10분이 소요되었다. 월플라워처럼 벽에서 손을 떼지 않은 채, 나머지 한 손으로는 코를 꽉 부여잡은 채 인생 처음으로 턱부터 정수리까지 물에 담그고 5초를 버텼다. 내게 있어 귀로 물이 들어가는 것은 흡사 불에 손을 대는 일과 비슷한 수준의 공포였기에.
몸을 물에 띄우려는 노력(하지만 실패)과 개구리 헤엄을 치려는 노력(하지만 실패)을 이어가다 물에서 나왔다. 창피한 얘기지만 물을 잔뜩 먹고 켁켁댈 때는 왜 마음처럼 되지 않을까 싶어 찔끔 눈물도 났다. 처음 역도를 배웠을 때도 비슷한 기분이었는데. 젖은 몸으로 숙소까지 터벅터벅 걸어가는 동안의 기분이 묘했다. 그러고 보면 일상에서 ‘인생 처음으로 무언가에 도전’ 같은 걸 겪을 일이 없었지. 나는 내가 뭔가에 미숙해서 잘 못할 때 속상해 하는구나. 뭐든 처음부터 잘할 순 없는 건데,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가 참 높네. 다른 사람에게는 딱히 뭔갈 기대하지도 않는데.
내일 저녁에는 포르투갈로 이동한다. 아직 나의 안식월도, 여정도 절반 이상 남았다. 처음 딛는 땅에서, 혹은 익숙한 곳에서 지금껏 해보지 않은 무언가에 또 도전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맘에 안 드는 내 모습도 아주 약간은 양보해서 너그럽게 받아들여볼까. 왜 그렇게 빠릿하지 못하고 쭈뼛대는 거냐고 몰아세우지 않고 한 템포만 더 느긋하게 기다려볼까. 그런 마음가짐조차 내게는 새로운 도전일지도 모르겠다.
2023. 6.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