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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 Feb 27. 2023

미국에서 제2의 인생을 2-3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의 종교는 불교였다.

주말에는 전철을 타고 주안에 있는 용화사에 할머니 손을 잡고 다니곤 했다. 할아버지는 우리 남매들에게 노란 표지의 손바닥만한 불경집을 선물로 주시고 '반야바라밀다 심경'과 같은 불경의 의미를 알려주시고는 기도문을 암기하면 100원씩 용돈으로 주시기도 했다. 우리는 용돈도 용돈이지만 '어린아이가 불경을 다 외우다니 용하다, 잘한다' 등의 칭찬이 기분 좋아서 열심히 불경을 외우고 할아버지께 검사를 받고는 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불교 설화인 목련존자 이야기는 어린 목련존자가 출가하여 부처님의 제자가 된 과정과 어머니가 지옥에 가게된 배경, 효심이 깊은 목련 존자가 어머님을 찾아 온갖 종류의 지옥을 헤매는 모습, 지옥으로부터 어머니를 구하는 과정을 너무나 생생하게 묘사하여, 읽으면서 머릿속으로 그 장면들을 상상해 보고는 어린 마음에 지옥에 대한 공포심과 죄를 짓는 것의 두려움을 몸서리치게 느꼈었다.

명절에 온가족이 절에 가면 소풍을 간 것 처럼 들떴다가도 법회에서 스님의 불경소리에 절로 고개를 숙이며 열심히 절을하였으며 끝나고 나면 맛있는 절밥을 먹고 돌아오던 설레는 기억이 남아있다. 음식 솜씨가 좋기로 유명한 먼 친척 아주머니는 '보살님'이라 불리시며 절의 모든 대소사에 적극적으로 봉사를 하셔서 언제든 절에 가면 스님들이 입으시는 것 같은 회색 바지 차림으로 웃으며 반겨주시곤 했다.


성인이 되고 카톨릭에 대한 호기심에 혼자 동네 성당에 방문한 적이 있는데 미사를 다 보고 돌아오고는 어색한 마음에 다시 가지 않았다. 친정과 시댁 모두 불교를 믿으셨지만 결혼 하자마자 아이가 생겨서 육아와 직장일에 정신없이 살면서 우리 가족은 종교에 대해 깊이있게 생각하지 못했었다.


남편의 주재원 발령으로 미국으로 이사온 후 우리 세 가족은 주변에 있던 한인 성당에 다니기로 결정했다.

성당에서 운영하는 새신자반 프로그램에 아들은 학생반, 우리 부부는 성인반으로 등록하여 매주 2번 저녁에 카톨릭의 전례와 기도방법, 성경 교리 등에 대해 차근 차근 배웠으며(남편은 출장 등 일이 많아서 혼자 갈때가 많았지만 믿음은 나보다 더 커서 무사히 교육을 다 마칠 수 있었다.) 같은 모둠에서 새신자들을 이끌어 주던 신자분들 중 우리보다 연배가 있으신 부부와 친하게 되어 교육을 모두 마치고 세례를 받을 때 두 분이 우리의 대부 대모님이 되어주셨다. 아들은 주말 예배에 어셔를 맡아서 활동했다.

우리와 사는 지역이 비슷한 다섯 가족이 주기적으로 반모임을 가졌는데, 처음이라 기도가 입에 붙지않아서 어색한 점을 빼면 여러 면에서 참 좋은 시간이었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까지도 연락하고 지내는 제노베파자매님과 데니얼형제님 부부를 반모임에서 만나게 되었다.

 

우리 집에서 차로 한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Lynwood 꽃동네'가 있어서 아들과 함께 봉사를 하러 다녔다.

매주 토요일 오전에 방문하여 정원 또는 내부 청소를 하고, 수녀님들을 도와 음식을 준비하여 점심시간에 방문하는 Homeless들에게 점심식사를 제공하는 봉사활동이었다.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가는 사람도 있고 도시락을 to go해가는 사람도 있었다. 한 때, 군인으로 복무하며 전쟁에 참여한 경험도 있으나 지금은 병들어 집없이 쇼핑카트에 의지하여 떠도는 흑인 홈리스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고등학교 1학년인 아들은 낯선 학교 환경에 적응하느라 힘든 시기였지만 불평하지 않고 봉사활동에 동행하여 자신이 도울 수 있는 일들을 찾아 열심히 도와주었으며 꾸준히 다니다 보니 보람도 느끼는 듯 하여 참으로 감사한 일이였다. 치매에 걸려서 요양이 필요한 할머니들도 이 곳 꽃동네에서 돌봐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휠체어로 할머니 산책을 시켜드리며 말 벗도 되어드리고 가끔 간식도 가져다 드리고 함께 식사도 하고 돌아오곤 했다. 한번은 우리 부부의 대부님과 대모님이 속한 레지오에서 꽃동네로 봉사활동을 나오셔서 우연히 만나 함께 봉사활동을 한 날도 있었다. 당시 우리집의 가드닝을 해주셨던 분이 이 레지오의 장이셨으니 집에서 만날 때와는 또 다른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꽃동네의 가드닝을 척척 지휘하시는 모습을 보았으며 레지오 중 한분이 식당을 하셔서 준비해오신 맛있는 점심식사를 모두 함께 나눠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 후에도 아들이 캘리포니아주 학생협의회 활동으로 방문이 불가능한 날을 제외하고 꾸준히 봉사활동을 이어갔다.


추석이나 설날 등 한국 명절이 되면 명절 전날 밤 늦은 시간까지 성당에서 음식 준비를 도왔다.  시간 되는 엄마들이 모여 명절 잔치 준비를 성당에서 함께 하는 것이다. 각종 전과 빈대떡을 준비하여 한사람 당 후라이팬을 2,3개씩 놓고 한번에 부치기도 하고 한쪽에서는 잡채를 산더미처럼 만들고 커다란 곰솥에 닭계장을 끓이고 새로 양념한 겉절이를 무쳐서 김치통에 담기도 하고 삼색 나물을 삶고 볶고 왁자하게 준비하다 보면 외국에서 맞는 명절의 쓸쓸함이나 그리움은 그야말로 남의 이야기였다. 내내 서서 일하느라 몸이 정말 고달픈데도 마음은 참 뿌듯하고 함께하여 재미나고 만든 음식을 나눌 생각에 기쁘기도 했다.

명절날 아침에는 성당에서 미사를 보고 미사가 끝난 뒤 대강당에 장터가 벌어진다. 전날 모여 만들어 둔 음식을 성당 가족들에게 바자회처럼 판매하고, 구매한 사람들은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함께 식사를 하기도 하고 이렇게 음식을 판매하여 성당의 기금을 마련하는 것이다. 우리 모임에서도 함께 음식을 구매하여 모여앉아 식사를 하며 즐겁게 명절 아침시간을 보냈다. 어제 음식 준비하느라 애썼다며 이것 저것 싸주셔서 또 바리바리 받아가지고 집으로 돌아오며 명절증후군 없는 기쁜 명절을 보냈다. 함께 하여 더 크게 나누는 일의 보람을 맛볼 수 있는 감사한 시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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