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아듀
아듀 (맥그로드 간즈)
우리의 마지막은
언제나 뒤늦은 후회와 아쉬움뿐이었겠지만
그 모든 것들엔 그 모든 시작들이 있었고
그 모든 시작들의 뒤에는 끝이라는 것도 있었겠다
모든 것들이 시작된 순간 삶의 조각을 만들어 내었고
그 모든 여정들이 쌓이고 쌓여 인생의 퍼즐들을 맞추어 나갈 테지
그 모든 것들의 마지막은
그 모든 것들의 시작이니
그것보다 더 강한 기적이라는 것이 또 있을까
밤사이 폭풍 설사를 했다
뭘 잘못 먹은 건지
춥기도 무지하게 춥고
한 해의 마지막을
차가운 화장실과 교우했다
그래도
아침은 오더라
어제처럼 새소리와 개소리로 시작하는 아침
조금은 늦은듯한 아침
나는 의심스러운 마음으로 뜨거운 물이 나오는지 물었고
너는 누명이라도 쓴 듯 희뿌연 연기를 내며 콸콸 나오는 뜨거운 물로 대답했다
그렇게 샤워를 했다
화장실에 붙어 있던 자그마한 거울로 들여다보니
밤새 변기와 마주한 보람이 있다
한층 헬쑥해진 얼굴
미남이다
설사가 줄줄함에도
먹어야 산다며
이곳저곳 식당들을 찾는다
매일같이 거닐다 보던 건물인데
호텔이라 적혀 있고
레스토랑도 겸비해서 있다
몇 번이나 스쳤던 길인데
알다가도 모르겠다
메뉴판을 펼치기도 전에
일하시는 종업원이 팬케이크를 강력 추천했다
주인장이 캐나다 사람이라 메이플 시럽이 기가 막힌다는 말을 곁들였기에
팬케이크를 놓칠 수가 없었다
딱 볕도 좋고
딱 날씨도 좋고
음식까지 맛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여행이 길어질수록
참 사람이 유치해지고 사소한 것에 마음도 상하고
1차원적으로 변하고 있는 내 모습에 웃음이 났다
먹고 자고 가 하루의 가장 큰 일이니 말이다
금세 나온 팬케이크는
비주얼부터가 인도 스타일을 타파했고
시럽 또한 윤기가 자르르르 한 것이
한 입 먹으니 절로 감탄이 나왔고
분명 감동이었다
멀리서 종업원이 쳐다보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 엄지가 척하고 올라가 있었다
충분한 포만감에
또다시 나태해지는 것이
햇볕까지 한몫을 더했다
휴식과 안정을 취한 뒤
오늘은 뭐하나 뭐하지 뭘 해야 하나
스스로의 질문에 꼬리를 물다
가본 적 없는 곳으로 가길 바랬다
그리하여 거닐게 된 곳이 박수 나트라는 곳
(박수건달이 떠 오르는 건 나뿐이겠지.)
멀리 내가 머무는 숙소촌이 보인다
그 뒤편으론 낮은 산들과 더 낮게 깔린 구름들이 함께 어우러지니
충분하게 비밀스러운 정원 같다
한 폭의 그림이 따로 없다
사진으로 담을 수가 없어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30분가량 걸었을까
작은 마을이 또 있다
아랫동네만큼 분주함은 없지만
연말이라 현지인들이 많이들 왔다
새해 소원이라도 빌려고 왔겠지?
히말라야와 가깝고 가장 먼저 태양이 떠 오르는 곳이 이곳이니
내가 여기를 택한 날짜도 그것과도 비슷한 이유겠다
박수 나트라는 표지판을 따라 거닐다 보니
좁은 낭떠러지와 위험천만한 길의 연속이다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트래킹과는 다른 기분
이곳은 수행에 가깝다
힘 만들면 당연히 가지 않았을 테다
충분히 보상해주는 풍경은 그저 사랑일 뿐
시원한 바람이 이마의 땀을 닦아주고
들풀들은 조금만 더 힘을 내라 박수를 치는 듯했다
길의 끝엔
웬 폭포가 있다
알고 보니 이 폭포가 박수 나트이고
맥그로드 간즈의 수원지다
졸졸졸 흘러내리는
폭포라는 이름의 박수 나트는 약간의 허무함이요
커다란 낚임 같다
아주 약간의 허무함에 멍하니 앉아 있는데
약속이나 한 듯 순서를 지켜
셀카 삼매경에 빠져있다
확신컨대
인도인들은 셀카에 미친 사람들이 분명하다
(그간의 전적을 감안했을 때 역시도)
그래도
무엇인가 해낸듯한 성취감
힘겨우리 올라온 위험천만한 길은
더 안정적으로 더 조심스레
오롯이 한길만 보게 했고
그렇게 왔다
마음의 수양은 충분했다
안정을 찾던 중
대단한 무엇이라도 해낸 것처럼 구색을 잡아
또 짐승처럼 처먹을 것만 생각하는 나는
수양이 멀었나 보다
점심은 일식집으로 하겠다는 일념으로
가볍고도 부지런히 일념으로 내려왔다
일식집 앞에 다 달았을 땐
분명 설렘이 있었다
손잡이를 미는데 열리지가 않는다
손잡이를 당겼는데도 열리지가 않았다
꼼짝하지 않았다
내 마음도 꼼짝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휴업으로 (지나고 보니 일본 명절이었다)
내 마음은 날벼락을 맞았다
이무런 이유 없이 문을 닫다니
배신자 다신 가지 않겠다 (그 이후로 문을 계속 닫혀있었다)
아쉬운 대로??? 한식이라도 먹어볼까
웬만해선 한식을 멀리하는 나는 (습관이 될까 하여)
배가 불렀나 보다 (수양이 될 모양이 없나 보다)
도깨비나라라는 한식당으로 향했다
어두 컴컴한 분위기가 정말 도깨비가 나올 정도였고
결과적으로 더럽게 아주 아주 맛이 없었다
비싸긴 상상을 훨씬 웃돌았고
돈도 아깝고 마음도 상하고 중식도 아니고 일식도 아니고
한식이.. 한식이라 더 화가 나고 배신감에 웃을 수가 없다 (지극히 1차원적으로 변했다)
상한 마음이 돌아오질 않는다
집에서 잠이나 잘까 하다가
그래도 한해의 마지막 날인데
조요한 카페에 들러서 지난 한 해나 돌아보고
앞으로의 한해에 대한 계획이나 세워야겠다
때가 때인 만큼
며칠 전 과는 확연히 달라진 맥간의 밀도
시간이 지날수록
조요한 카페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적당히 조용해 보이는 구석진 카페에 들어가니
충분히 불량스러워 보이는 인도 남녀들이
커다란 오디오를 들고 와 그들의 알 수 없는 인도 음악에
심취해 마리화나나 돌려 피고 소음을 유발하고 있었다
적당히 하길 바랬건만
나 역시도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한판 할 기세로 계속 노려보니
그곳에서도 한판 할 기세로 노려본다
누군가가 일어서려는데
누군가는 말리고 있다
그들도 내가 거슬렸나 본데
참자
한해의 마무리다
끝이 좋아야 한다는 누군가들의 말들
이해하자
그대들의 나라에서
그대들의 연말인데
그대들의 분위기를 깨면 안 돼
내가 미안하다
여자 친구들이 있는 줄 몰랐어
와이파이가 되는 곳이
불량스러운 인도 남녀들이 있던 곳이라
이어폰 볼륨 소리를 높이고
밀린 사진 정리와 일기 정리를 하다 보니
또 해가 넘어간다
여긴 뭔지 모르게 해가 짧게만 느껴진다
늦게 뜨고 일찍 지고
그렇게 한해의 마지막 태양이 높다란 히말라야를 넘어가 버렸다
몇 가지의 채도를 가진 하늘은
그 아래의 마지막 마을까지 비추느라
그림자가 길게 드러누웠다
나에게 올 한 해는
참으로 의미가 남다르다
두려움도 없이 배낭 앞뒤로 둘러매고 절반이 넘는 기한을
떠돌이처럼 행복한 방황을 했다
많이 봤고
많이 느꼈고
많이 배웠고
많이 성장한 한 해
나 라는 존재가 참으로 작았으나
세상은 참으로 넓었고 많은 가르침을 받아
조금은 더 커다랗고 단단한 그릇을 얻은 것만 같은
참 고마운 한 해였다
오늘은 당신들의 하루보다
3시간 30분이 늦은 시간
인도에서
올드 몽크 한잔으로
한해를 잘 마무리하고
새로운 한 해 깔끔하게
근심 없이 잘 보내길 희망하며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