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과류, 바나나를 거쳐 김치치즈주먹밥까지
다이어트가 필요할 때면 이틀 정도 굶곤 했다. 차이티라떼 한 잔씩으로 이틀을 버티면 2kg이 빠지던 시절이 있었다. 확신의 호시절, 08학번 시절이었다. 물론 당시의 나는 지금 없다. 그때는 아침을 거르고도 오전 수업을 견디던 새내기였다. 짧은 공강 시간 중 학생식당에서 때우는 라면과 떡볶이면 충분했다. 고작 밀가루 맛에 행복함을 느끼고 하루를 견뎠다. 간혹 1인분에 5,000원쯤 하는 삼겹살을 즐기는 특별한 날도 있었다. 확실한 건, 당시의 내게 ‘한 끼’는 그저 먹어도 안 먹어도 그만인 것이었다.
직장인이 되고서는 아침에 무엇이든 욱여넣는 사람이 됐다. 회의 시간 중 울리는 꼬르륵 소리가 그렇게 크게 들릴 줄은 몰랐다. 회의에 참여한 모두가 내가 공복임을 알게 되는 날도 있었다. 사무실은 조용하고, 꼬르륵 소리는 메아리 같았다. 입이 깔깔한 아침이더라도 회의가 있는 날이면 허기를 채울 무언가를 찾았다. 매일 아침 길에서만 한 시간 이상을 버티는 슬픈 경기도민은 주로 지하철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씹을 때마다 목이 턱턱 막히는 칼로리발란스 혹은 냄새가 나지 않는 견과류, 바나나 등을 씹어 먹었다. 7호선 장암역에서 자리를 잡아 견과류 한 봉을 후루룩 먹으면 수락산쯤, 그리고 노원부터 회사가 있던 청담역까지의 숙면이 나의 ‘아침 리추얼’이었다.
지하철에서 눈치를 보며 냄새가 나지 않는 음식을 먹던 시절까지는 몸이 가벼웠다. 계단 오르기는 가벼웠고 청담역부터 삼성동까지는 쉬이 걸어 다닐 수 있었다. 돌아보면 그때의 나는 ‘기초대사량 부자’이기도 했지만, ‘시간 부자’이기도 했다. 아침저녁으로 매일 4km씩 걸었으니 살이 찔 겨를이 없기도 했다. 그리고 5년 차, 드디어 운전을 시작했다. 최악의 직주근접이었던 두 번째 회사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운전이었다. 차는 상당한 윤택함을 가져다줬다. 부대끼는 출근길을 피할 수 있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옆구리에 팔꿈치가 닿는 불쾌한 감정을 겪지 않아도 됐다. 혼자만의 쾌적한 공간에서 친구와 통화하며 오가는 출근길은 꿀 같은 아침잠과 맞바꿀만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건, 아침 메뉴가 다양해졌다는 점이다. 모든 운전자들이 나와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별의별 걸 다 먹는다. 좋아하는 메뉴는 역시 맥모닝이다. 드라이브쓰루로 미끄러져 들어가 커피와 함께 주문하는 맥모닝은 이름 그대로 ‘아침의 맛’이다. 그러나 맥모닝은 10분의 여유가 있을 때나 가능하다. 거의 특식이다. 평범한 날엔 비비고의 김치치즈주먹밥을 먹는다. 지하철 통근러 시절에는 생각지도 못한, 김치 냄새가 풀풀 풍기는 주먹밥을 먹을 때 한국인의 정체성을 깨닫곤 한다. 최근 가장 꽂힌 메뉴는 그릭요거트와 과일이다. 꾸덕한 그릭요거트에 딸기, 그래놀라에 메이플 시럽을 더한 메뉴는 덤으로 건강함까지 먹을 수 있다. 그 외에도 저녁에 먹다 남은 피자, 군고구마, 단호박 등 탄단지와 입맛을 고려하여 다양한 메뉴를 구성한다.
운전 4년 차, 메뉴는 다양해졌고 나날이 몸무게는 경신되고 있다. 아니 메뉴가 다양해짐에 따라 몸무게가 경신됐다. 하지만 과거의 나로 돌아갈 수 있다 해도 선뜻 돌아가지는 못하겠다. 난 이미 혼자의 쾌적함에 너무 적응했고, 다양한 메뉴를 포기할 수 없다. 이제 나는 하루에 한 끼만 걸러도 손이 떨리고, 지하철역 계단이 부담스러운 사람이 됐다. 차이티라떼 한 잔으로 하루를 버티던 08학번의 나는 없지만, 돌발상황에 놀라지 않는 맷집을 가진 사람이 있다. 기초대사량은 지하철역 계단이 아니라 퇴근 후 수영으로 유지해본다. 내년의 나는 어떤 메뉴를 먹을까. 한 3첩 반상 정도를 조수석에 차리고 있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