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의 유행은 엄청난 속도로 온다. 냉장고 속 몇 가지 아이템을 눈여겨보면, 주방의 유행을 체감할 수 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과일과 채소를 착즙해 만드는 주서기가 주방 가전의 대세였다. 갈아 만든 주스는 재료의 영양분도 함께 갈아버리니 착즙을 해서 마셔야 한다는 논리였다. 당시에는 정말 갈아 만든 주스는 안 먹느니만 못한 취급을 받곤 했다. 그런데 다시 믹서기의 유행이 돌아왔다. 이제는 다시 저작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건더기가 있는 주스, 갈아 마시는 주스가 건강관리의 최전선에 섰다. 그렇게 우리 집에도 뭐든 다 갈아버릴 것 같은 무시무시한 칼날의 ‘닌자 믹서기’가 들어왔다.
매일 아침 엄마가 닌자 믹서기를 돌리는 소리에 잠을 깬다. 엄마는 정말 이 세상 모든 과일을 다 갈아버릴 것 같다. 보통은 집에서 먹다 남은, 시들시들한 과일을 갈아야 하지만 닌자에 꽂힌 엄마는 그렇지 않았다. 매주 식당 사장님들이 찾을 것 같은 식자재마트에 가서 바나나를 몇 송이씩 사들였다. 까만 반점이 하나도 올라오지 않은 신선한 바나나들이 매일 아침 닌자의 처분을 기다리는 신세가 됐다. 그냥 씹어 먹어서 저작운동을 하면 좋았을 사과와 딸기, 바나나지만 엄마 눈엔 그저 닌자 대기조일 뿐이었다.
문제는 엄마의 주스가 정말 맛이 없다는 거다. 엄마는 일단 다 때려 넣는다. 파프리카는 몸에 좋으니까 바나나와 함께 갈아도 된다는 식이다. 그리고 항상 용매제를 잘못 선택한다. 바나나와 딸기는 우유와 갈면 부드러운 맛이 한층 올라온다. 카페에는 보통 블루베리스무디에 요거트를 믹스해 판매한다. 요거트가 주는 녹진한 맛이 블루베리의 상큼함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의 주스는 아니다. 엄마는 사과주스를 만들 때 우유를, 블루베리주스를 만들 때 생수를 넣는다. 난 정말 사과와 우유를 섞은 생과일주스를 마셔본 적이 없다. 이 끔찍한 혼종에 조금이라도 미간을 찌푸리거나, 주스를 남기면 엄마는 벼락같은 서운함을 내비친다. 내가 아침부터 이렇게 힘들게 주스를 만들었는데, 왜 이걸 싫어하냐는 것이다.
하지만 엄마가 서운해한다고 내 미각을 포기할 순 없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맛의 경험’이었다. 맛은 많이 먹어 본 사람이 잘 내기 마련이다. 제일 먼저 이삭토스트로 향했다. 엄마에게 딸기바나나주스를 건네며 딸기와 바나나를 섞으면 이렇게 맛있다고 말했다. 그때부터였나요. 우리 집 닌자가 딸기, 바나나 대학살을 시작한 것이... 냉동고 속 딸기와 바나나가 새끼를 치나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딸기바나나주스가 지겨울 때면 엄마와 함께 카페마마스로 가서 청포도주스와 수박주스를 마셨다. 우유가 아닌 물과 연유를 사용한 주스의 경험도 제공했다.
맛의 경험으로 엄마는 이제 더 이상 사과주스에 우유를 넣지 않는다. 이제 슬슬 주재료와 어울리는 용매제를 찾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기상천외한 맛을 구현할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맛의 경험을 제공할 때가 도래했음을 깨닫는다. 내가 떡볶이를 먹은 후 디저트를 패션후르츠젤라또를 찾는 이 완벽한 루틴도 수많은 시행착오가 낳은 경험의 축적일지니. 일생을 주부로 살아온 엄마는 밖에서 먹는 음식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집에 있는 밥을 두고 외식을 하는 것을 일종의 죄악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내 미각은 소중하니 앞으로도 꾸준히 엄마에게 ‘새로운 맛’을 제공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