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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빵씨 Jan 12. 2018

#11-감각으로 기억하는 여행

유유자적 천천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여행을 지향한다.
같은 숙소에 며칠씩 머무르며 늘 같은 골목을 외워버릴만큼 걷는 일을,
일상에서의 내 생활과 비슷한 패턴으로 장을 보고, 차를 마시고, 산책을 하는 여행을 사랑한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 어느 순간 그리운 느낌으로 떠오르는 기억은
 이름도 모르지만 다시 그곳에 간다해도 길을 잃지 않을 것 같은 골목과 그 길을 걸을 때 불던 바람, 뺨에 닿는 햇볕같은 감각같은 것들이다.
누군가에게 자랑할만한 볼거리도 없고, 부족한 언어로 표현할 방법도 없는, 사진조차 몇 장 없이 오로지 느낌으로만 존재하는 여행을 떠올리며 나는 내 바람대로 유유자적 천천히, 아무 것도 하지 않았구나, 안심하곤 한다.
하지만 그 아무 것도 하지 않음이란 이렇게 하루를 관광에 투자하는 날에서야 알게되는 것이다.
그동안은 그저 같은 풍경을 빙글빙글 돌았을 뿐. 찌그러진 원 비슷한 모양을 그리던 동선을 일직선으로 펼치면 이렇게까지 길었구나 하면서 말이다.     

       


 우리의 마지막날은 이사리비공원 해돋이로 시작됐다.
정확히는 구름이 잔뜩 낀 저 너머의 해가 떠오르는 듯한 붉은 빛 정도와, 공원 전망대 앞에서 만난 아저씨들과의 끝없는 수다와 함께.
가로등도 변변히 켜지지 않은 좁은 골목을 손전등을 켜고 이십분 가량 걸어 도착했지만 전날도 전전날도 하루종일 비가 오고 흐렸던 하늘은 해가 뜨는 순간까지 깨끗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해가 뜨는 걸 보는 건 우리의 목적이 아님을.



그렇게 상쾌(?)하게 아침을 시작하고는 짐을 챙겨 다시 길을 떠났다. 며칠동안 흐리던 날씨가 비로소 맑아졌다.

한시간가량 버스를 달려 도착하고, 또 한참을 마을길을 걸었다. 낮은 건물과 산길과 물이 있는 시골길이었다.
근처 중학교에서 학생들 몇몇이 나와 우리와 같은 길을 달리며 마주칠 때마다 “오츠카레사마!”하고 외치며 지나쳤다.

우리의 두 번째 목적지는 생각보다 쉽게 나타났다.
빨간 도리이를 지나 도착한 와타즈미신사. 용왕을 모시는 물속의 신사라고 했다.

밀물이 들어오면 물속에 잠겼다 썰물이 되면 땅 위에 서있는 시간을 견뎌온 작은 신사와 그 뒤의 숲길에도 이곳저곳 자그맣게 도리이가 세워져있었다.

햇빛이 비치니 신사 특유의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잠시 한숨을 돌리고서는 에보시타케 전망대를 향해 올랐다.
가파르고 좁은 오르막길에 아슬아슬하게 관광버스가 지나쳤다.
어깨에 멘 가방 밑으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오늘 우리가 걸은 길이 꽤 길구나 생각했다. 동네를 산책하듯 평소만큼 걸었던 것 같은데 말이다. 그리고 아직 오후가 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전망대에 올랐을때 우리는, 그곳에서 가장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는 여행자였다.
하지만 땀에 잔뜩 쩔어 올라간 우리에게 불던 바람과 저 멀리 펼쳐지는 풍경은 고생만큼이나 생생히 기억되겠구나 싶었다.
아, 이래서 우리가 이렇게까지 걷는 거였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말은 어쩌면 여행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하고 있으니까.
기억나지 않는 일로 순간을 채웠다 하지만, 또 언젠가는 없는 것 같던 기억이 눈 앞에 있는 일인양 생생하게 다가오기도 하는 법이니 말이다.


그동안 걸었던 수많은 골목이 어느 순간 추억처럼 떠오를 때처럼, 아마 이날 우리가 걸었던 산길 역시 같은 모습으로 떠오를 것이다.


그것이 내가 사랑하는 여행의 매력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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