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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재 Sep 20. 2024

EBS 세계테마기행을 보다

앙(仰) 이목구심서Ⅲ -3

얼마 전 EBS 세계테마기행을 우연히 봤다.

부탄의 무스탕이라는 지역을 소개하고 있었다.

부탄의 마지막 왕국의 수도였다는데 몇 년 전부터 제한적으로 개방했다고 한다.

해발 삼천 미터 이상인 이 땅의 산과 들엔 나무와 풀이 보이지 않는다.

회색의 산과 계곡이 맨 살을 드러내고 있어, 쏟아지는 햇살이 화살처럼 그대로 꽂혀 버리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어떤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여기에 눈 맑고 웃음 밝은 사람들과 이들 곁에서 고락을 함께하는 가축이 살고 있었다.


숨이 턱턱 막혀오는 경사 60도 이상 되는 길을 올라 마을로 가는 건조한 길이 이어진다.

맨몸에 가까운 사람조차 힘들어 보이지만 앞서가며 짐을 잔뜩 실은 말의 모습은 지친 기색이 더욱 역력하다.

말이 한참을 멈춰 서서 거친 호흡을 가다듬는다.

얼마동안 다리 쉼을 한 말은 누구의 재촉 없이도 스스로 걸음을 내딛으며 가파른 언덕을 오른다.

느릿, 느릿, 한걸음, 한걸음,

이곳에서는 시곗바늘조차 쉬었다 가야 할 것 같다.

말은 몇 발자국 전진하다가 다시 멈추기를 반복한다.

그래도 주인은 나무라지 않는다.

절대로 재촉하지 않는다.

말이 무리하면 고산병으로 쓰러진단다.

서로를 잘 아는 동지라 말없이도 알고 있다.

각자 자기의 발걸음에만 집중한다.

여기선 자신과의 대면만이 있을 뿐이다


말의 분투에 울컥, 눈물이 솟았다.

그냥 오르기에도 힘든 산길을 허리에 잔뜩 짐을 매달고 오르는 그의 운명이 슬펐다.

이런 극한의 상황에 요령도 저항도 없이 현실을 견뎌가며 짐을 나르는 말의 충직함과 단순한 순종에 감동한다.

같은 동물인데도 잔뜩 짐을 진 말은 앞서가고, 사람은 작은 배낭만 메고 뒤를 따른다.

몸집이 사람보다 크고 힘도 세지만 주인에게 순종하는 충직한 말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존재가 이처럼 아무런 불평 없이 순순히 고통을 진단 말인가.

나라면 벌써 포기하거나 배신했을 고난의 길.

말은 자기 자신과, 몸의 한계와 싸우며 한 발 한 발 걸어가고 있다.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가쁘게 내쉬는 호흡에 눈동자가 점점 흐려진다.


운명에 순응하는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사람의 무엇을 보고 이처럼 충성스러운지.

길들여진 등 위의 짐들을 내려주고 싶다.

그는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는 이천 년 전의 성자가 아닌가.

그를 업고 올라가 푸르른 들판 가운데에 내려주고 싶다.

거기서 마음껏 풀을 뜯으며, 때때로 배꼽이 보이도록 드러누워 하품을 하거나 건들거리는 모습을 또한 보고 싶다.


문명은 인류만이 건설한 역사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온 삶을 헌신한 동물과 식물들, 그리고 미세 균들까지, 모두가 함께 이룩한 업적이다.

왕의 영광과 왕국의 평화는 말의 발걸음 때문이다.

세상은 거미줄처럼 모두가 연결되어 있기에 오늘의 나도 말의 순종과 땀 덕분이다.

그대와 얼굴조차 모르는 타인들 덕에 살아간다.


우수수 가을나무를 적시며 춤추게 하는 이 아침의 비가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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