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는 본디 자연의 색과 지역민의 삶이 녹아 있다. 쌀 재배가 안 되는 지형 탓에 조와 보리를 주식으로 삼았던 제주엔 뭍과는 다른 향토술이 발달했다.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증류식 소주부터 천혜 자연에서 난 최고의 물로 빚은 현대식 술까지, 한 모금 머금는 것만으로도 제주를 더 풍성하게 느끼기에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제주의 물맛은 대한민국에서도 단연 일품이다. 국내에서 판매되는 생수(지하수) 시장을 들여다보면 그 위상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998년부터 판매를 시작한 제주의 천연지하수 브랜드인 ‘삼다수’는 출시 후부터 현재까지 국내 먹는 샘물 시장점유율 1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제주도의 물이 얼마나 좋은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청정 제주의 물맛은 술의 풍미와도 직결된다. 제주에 터를 내린 양조장들은 저마다 제주의 천연 암반수나 제주의 수돗물을 술의 원료로 쓰는 것을 자랑한다. 관람객들이 직접 둘러보며 술이 만들어지는 과정부터 술 맛까지 단 번에 체험할 수 있도록 활짝 문을 연 곳들도 눈에 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전통은 전통대로 깊어가고, 오늘날의 감각에 발맞춘 다양한 시도도 그 곁에서 함께 꽃핀다. 제주의 술은 여러모로 노는 물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고소리술,
어머니 향기
제주 밖에서는 생소한 이름일지 모르겠지만, 제주를 대표하는 전통주로는 오메기술과 고소리술이 독보적이다. 그 이름은 각각 곡식과 용기에서 따온 것으로, 제주의 일상과 오랜 시간을 맞닿아 있다. 연평균 강우량이 약 2,000㎜에 달하는 한국내 최대 다우지역이지만,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제주는 그 지형 특성상 물이 잘 고이지 않는다. 덕분에 내륙에서처럼 쌀을 재배하기가 어려웠고, 밭쌀은 생산량이 턱없이 적었다. 육지와의 교류도 어려웠으니, 보리쌀이나 좁쌀처럼 밭에서 자라는 농작물을 주식으로 삼았고, 제주의 향토주도 여기서 출발하게 된다.
'오메기'는 좁쌀중 ‘차조’를 뜻하는 뜻하는 제주도 방언이다. 오메기주와 좁쌀막걸리 모두 좁쌀을 쓰지만, 그냥 좁쌀을 기계로 쪄서 만드는 좁쌀막걸리와는 달리 오메기주는 일일이 오메기떡을 손으로 만든 후에 이를 발효시켜 만든다. '고소리'는 오메기술을 증류시켜 소주를 만들 때 쓰는 옹기를 뜻하는데, 그 이름을 따서 고소리술이라고 부르고 있다. 한때 개성소주, 안동소주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소주로 손꼽혔다. 두 술간엔 발효나 증류라는 단계적 차이가 있지만, 모두 좁쌀(조), 보리쌀(보리), 누룩, 그리고 물로만 빚는다. 다른 것은 첨가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현대적으로 변한 지금은 제주도 역시 살기 좋아졌지만, 60~70년 이전까지는 척박한 환경 탓에 먹고 살기가 어려웠다. 낮 동안 밭일과 물질로 고단한 몸을 이끌고, 어머니들은 밤마다 불 앞에서 술을 닦았다. 동이 틀 무렵에야 곁에 누운 어머니 몸에서는 술 냄새가 퍼져 아이들의 코를 간질였다. 이 전통주에는 자식들을 먹이기 위해 잠까지 줄여가며 술을 내리던 어머니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아주 오랜 세월을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온 귀중한 유산으로 오늘날까지 지켜지고 있다.
깊고도 순한
전통의 맛
위의 두 술을 빚는 대표적인 양조장은 '제주샘주'와 '제주 고소리술 익는 집'으로, 전국구에서 손꼽히는 술의 명가다. 제주샘주의 오메기술은 청와대 추석 선물로 뽑혀 화제에 올랐다. 제주 고소리술 익는 집에서는 고소리술/오메기술로 제주 무형무화재에 지정된 초대 기능보유자 김을정 명인에게 전수받은 며느리와 손자까지 4대에 걸쳐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 700년이 넘도록 제주에서 사랑 받은 고소리술을 전통 본연의 방식으로 빚기에는 사실 품과 시간이 많이 든다. 오메기떡으로 만든 오메기술을 무쇠솥 위에 얹은 고소리에 넣고 뒤 불을 지핀다. 술을 내리기 위해 장작불을 지피던 것이 가스불로 바뀐 것 말고는 다 옛 것 그대로다.
고소리술은 순한 듯하면서도 은근히 올라오는 취기가 일품이며, 숙취가 없이 빨리 깨고 뒤끝이 없다. 처음 내린 술은 독하고 거칠고 매운 맛이 나지만, 항아리에 담아 1년 이상 숙성시키면 비로소 제 맛을 찾는다. 숙성한 고소리술은 입에 머금었을 때 단맛이 혀를 덮고 감칠맛과 구수함이 주변을 맴돈다. 전통을 고수해 손으로 만든 술은 연간 5톤도 채 나지 않아 한정된 사람들에게만 맛보기를 허락하는 귀한 술이지만, 공장에서 생산된 술도 맛이 부족하지 않으니 상황이 허락하는 한 어떤 것을 맛봐도 전통의 깊이를 느끼기에는 손색이 없다.
한라산 투명하게
소주에 찰랑이다
전통적으로는 증류식으로 만들던 소주는 근대 들어 희석식으로 대량생산되고 있다. 오늘날 국민주로도 불리우는 소주가 바로 희석식이다. 노릇하게 구워진 삼겹살, 싱싱한 회 한 접시, 라면 한 그릇, 그 어디에나 잘 어울리는 술이다. 대한민국 8도 지역마다 다른 소주를 제조하고 있으나 제주도의 소주는 더 특별한 면이 있다. 일반적으로 소주는 초록색 병에 담겨 있지만, 제주도 지역소주인 ‘한라산’은 투명한 병에 담겼다. 도수는 비교적 약간 높지만, 제주의 화산암반수에서 오는 깔끔한 물 때문에 목 넘김이 부드럽다. 제주를 방문하는 이들에게 소주의 신세계를 선보이며 고정적인 팬층을 늘려가고 있다.
한라산 소주를 직접 찾는 공장 위를 둘러볼 수 있는 투어프로그램을 운영해 친절한 설명과 함께 소주와 소주 칵테일 그리고 간단한 간식도 곁들여 맛볼 수 있다. 술 좀 마신다는 제주 사람들은 음식점에서 소주를 주문할 때 ‘노지 것’을 달라고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냉장고가 아니라 노상(야외나 길 위)에 보관했던 술을 달라는 뜻이다. 미적지근한 술은 맛 없을 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현지인의 취향을 느끼고 싶다면 따라 해보자. “노지, please.”
개인의 취향따라
제주의 수제맥주
세계적 흐름인 소규모 수제맥주 바람이 제주에도 불었다. 선도적인 브류어리가 제주에 여럿 자리잡았으며, 틀에 박히지 않은 다양한 맥주 맛을 선보이고 있다. 수제 맥주의 종류는 소비자들의 입맛이 얼마나 다양하게 변화했는지를 대변하는 것이자, 새로운 것에 흥미를 갖는 젊은이들의 문화를 상징한다.
맥파이 브류어리는 2014년 제주에 개장해 수제맥주의 길을 열었다. 도민은 물론이고 외국인들도 찾아와 맥주맛을 봤다. 양조장 탭룸에서 진행된 투어 프로그램은 당시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어 2017년 문을 연 제주맥주는 신흥강자로 자리를 굳혔다. 2019년에 ‘제주 위트 에일’로 제6회 대한민국 주류대상 크래프트 맥주 에일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연간 약 2000만L의 맥주를 생산하는 깔끔한 양조장 위로 감각적으로 디자인 된 투어 코스가 마련되어 있으며, 펍으로 곧바로 이어진 파이프를 통해 따라진 맥주를 맛보는 것으로 관람을 마친 뒤에도 그 여운은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