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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Aug 05. 2018

남은 생의 가장 젊은 날

61. 엄마랑 순례길 - 마지막 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11월 8일

프랑스길 마지막 날, O Pedrouzo - Santiago de Compostela 20km


엄마는 내심 길의 마지막 날을 기대했다. 요 며칠 누적된 피로를 호소하 있던 엄마는 얼른 산티아고로 입성해서 쉬기를 바랐다. 나도 어느 순간부터 끝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지만 이와 동시에 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상한 양가감정이 들어 혼란스러운 기분이었다.

안개구름이 한차례 지나간 뒤 낙서가 가득한 마을과 굴다리를 지난다.

산티아고 길을 걸으면서 사람들은 잠깐이나마 현자가 되는가 보다. 누구누구 왔다감 이런 낙서도 많지만 각자가 길을 걸으며 내린 결론들이나 생각들도 많다. 또 각자의 행복한 까미노를 바라는 글들도 많다. 그 많고 많은 낙서 중 엄마는 저 낙서를 콕 찍어 사진을 찍어달라셨다.


길을 걸으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군가는 생각을 비우러 길을 온다고 하고 나 또한 그러했었지만, 길을 걸으면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살았던 짧은 시간들, 앞으로 살 시간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들, 본질적인 개념들에 대해 수없이 헤아리고 살폈다. 내가 갈무리 지은 생각들 중 하나는, 강산이 한 서너 번 바뀐 뒤에 돌아보았을 때 '아 그때 좀 해 볼걸' 하고 후회하는 일이 가급적 적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남은 생의 가장 젊은 날인 지금, 나는 후회를 조금씩 덜 남기기로 마음먹는다. 

산티아고 공항을 지나 나온 마을, 바로 보이는 바에서 아침을 먹는다. 작년에 왔을 때도 많이 붐볐던 곳인데 이번에도 매우 북적인다. 또르띠야로 만족스러운 아침을 마치고 기쁨의 언덕으로 향한다. 

몬테 도 고조, 기쁨의 언덕인 이 곳은 저 멀리 산티아고 시내가 보이는 언덕이다. 이 곳에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산티아고 방문을 기념해 만든 조형물이 있다. 누구라 할 것도 없이 모든 순례자가 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는다. 우리라고 예외는 없지. 잠깐 순서를 기다려 사진을 찍는다. 

조형물에는 손바닥 모양의 지도로 각 순례길의 이름이 표기되어있다. 비아 포덴시스, 내가 걸었던 르퓌 길이 유난히 눈에 띈다. 


산티아고에 들어가는 길은 무척이나 길었다. 점심을 먹을 곳이 보이지 않아 오후 2시까지 결국 배를 곯다 산티아고 구시가지에 들어가서야 먹을만한 곳을 찾았다. 둘 다 배고픈데 그 시간까지 먹을 곳이 마땅치 않아 예민해져 있었다. 우연히 들어간 레스토랑은 레트로풍의 인테리어가 인상적인 수제버거집. 젊은이들 무리가 많이 보이는 곳이었다.

오늘부터 며칠간 우리가 묵을 곳은 산 피나리오 호스페데리아. 산티아고 대성당 바로 옆의 수도원을 리모델링해 만든 호텔 겸 호스텔이다. 예전에 묵었던 것이 매우 만족스러워서 이번에도 묵기로 맘먹었다. 산티아고 대성당 바로 앞의 파라도르에서 묵으면 정말 좋을 테지만 주머니 사정이 한계가 있는 순례자들에게 있어서 순례자 할인도 받을 수 있는 산 피나리오는 아주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닐 수 없다.

 

미리 보내 놓은 가방도 잘 받아 든 다음 체크인을 한 뒤 잠시 휴식한다. 그 뒤 우리는 순례 인증서를 위해 순례자 사무실로 향한다. 다행히도 우리는 오랜 시간 기다리지 않고 거의 바로 순례 인증서를 받을 수 있었다. 순례 완주서는 무료이지만 약간의 돈을 지불하고 순례 거리까지 나오는 인증서도 받는다.  

나의 마지막 도장, 나의 인증서. 내 길었던 길은 1515km라는 숫자 네 개로 축약되어 마침표를 찍었다.

광장에는 순례를 끝내고 기뻐하는 순례자들, 멍하니 성당을 올려다보는 순례자들, 기진맥진하여 광장에 널브러진 순례자들, 눈물을 훔치는 순례자들, 깃발을 따라다니는 관광하는 무리들로 북적였다. 

아직도 공사가 끝나지 않았던 산티아고 대성당의 모습. 언젠가는 온전한 모습을 볼 수 있을까 바라본다. 

엄마와 나는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기회가 될 때마다 미사에 참석했다. 수녀님 한 분이 굉장히 고운 목소리로 순례자들에게 응답송 하는 법을 안내해 주시고, 미사 중간중간 모든 성가들을 주도적으로 이끄시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산티아고 대성당 미사의 상징물인 보타푸메이로(향로)를 산티아고에 머무는 내내 한 번도 보지 못해서 매우 안타까웠다. 이상한 일이다. 작년의 운이 좋았던 나는 단 한번 미사에 참여했음에도 보타푸메이로를 보았는데, 엄마와 함께 있을 땐 네다섯 번의 미사 참여 동안 단 한 번도 보타푸메이로가 없었다. 심지어 주말 미사에도 말이다.

아무래도 또 오라며 여지를 남기는, 밀당의 수천 년 고수인 하느님의 메시지가 아닐까 싶다.

남은 미련은 다음 순례를 위한 복선처럼 마음에 심어둔다.

길가에서 들리는 할렐루야 노랫가락과 함께 숙소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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