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이 멈췄다.
2020년 7월, 코로나로 인한 회사의 재정 악화 문제로 나와 나의 배치 메이트들, 그리고 수천 명의 동료들이 정리해고통보를 받았다.
그전까지, 참 많은 일이 있었다. 3월 초에 런던에서 휴가를 마치고 도하로 복귀를 하자마자 시설 격리를 당했다. 비행으로 꽉 찼던 3월 비행 스케줄이 줄줄이 취소되고, 3월 말이나 되어서야 다시 비행을 시작했다. 그즈음 카타르는 락다운을 선포했고, 외국인과 거주인에 대해서도 국경을 닫았다. 비행 편수가 확 줄었고, 거의 한 달에 한두 번 비행이 있을까 말까 했다. 비행 수당도 줄어서 월급이 대폭 줄었다. 모든 상점과 카페에서 식사가 금지되고, 숙소에서도 외부인의 방문을 금지하는 규칙이 내려져 친구들과의 교류도 어려워졌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집 안, 방 안에서 고립되어 갔다.
그동안 회사에서는 무급 휴가 자원 신청을 받았다. 시기도 딱 19/20년도의 남은 휴가를 써야 했던 터라, 많은 동료들이 짐을 싸서 집으로 갔다. 국경이 닫혀 있던 터고, 지금 나가도 언제 국경이 열려서 들어올지 몰라, 왠지 모르게 불안했다. 결국 나는 남은 휴가를 도하에서 쓰게 됐고, 회사에서는 20/21년도의 휴가를 강제로 쓰게 해 꽤 많은 시간 비행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나는, 당장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코로나 상황에 내 직업을 꽉 붙잡고자 도하에 계속 남아 있었다. 많은 한국인 크루들이 무급휴가로 출국했다. 비행에서 크루들은 항상 신기한 듯 물었다. ‘너는 왜 한국에 안 갔어? 한국인들 다 무급휴가로 갔던데?’
그러다 어느덧, 애비니쇼의 단체 해고 소식을 접했다. 5월 즈음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한 번도 비행해보지 못하고 해고가 된 거다. 다들 지구 어딘가에서 합격의 기쁨을 누리고, 머나먼 도하로 와서 꿈을 펼치기만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꿈이 무너진 거다. 너무 마음이 아팠다. 누군가는 나처럼, 정말 간절히 노력하고 여러 번 시도 끝에 도하에 왔을 거란 생각에 마음이 먹먹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실, 나는 곧 내 차례가 올 것이라 짐작하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비행을 하고 있고, 그래도 도하에 남아있는 이코노미 크루들 중 사번이 높다 안일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달에 딱 한 번, 운 좋으면 두 번 있는 비행에 신이 난 적은 또 처음이었다. 그 비행이 끝나면 또 장시간 도하에 머물렀다. 플랫 메이트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새로운 시도도 하나씩 해 보았다. 함께 산책 명소인 펄(Pearl)이나 루사일(Lusail)로 택시로 간 다음 천천히 주변을 거닐면서 수다를 떨었다. 적어진 월급에 사실 그 택시비마저도 고민하다 에라 모르겠다 내지르고 가긴 했다. 집에서 유튜브를 보면서 여러 가지 음식을 시도하다 김장까지 하게 됐다. 깍두기도 담았다. 빵도 굽고, 케이크도 굽고, 날마다 ‘오늘은 뭘 만들어 볼까?’하는 설렘으로 버텼다. 그러다 함께 수채화 도구를 사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단조로운 락다운 상황을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우리는 서로를 의지했다.
7월 셋째 주. 갑자기 크루들의 단체 해고 소식이 들려왔다. 사번이 낮은 주니어 크루들이 배치 단위로 해고가 됐단다. 그것도 도하에 남아서 비행하고 있는 크루들만. 회사에 대한 배신감과 놀라움으로 카톡을 보다, 내 사번대도 통보를 받았단 소식에 가슴이 철렁했다. 설마, 아니겠지. 순서대로 해고가 돼도, 나는 윗번호인데 설마.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도 똑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다른 배치 전체가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렇게 성큼성큼 우리 배치 번호 목전까지 왔다.
해고 통보를 받기 전날, 나와 내 플랫 메이트들은 그저 울고, 그 현실을 부정하고, 우리는 아닐 거라 현실을 외면했다. 다들 이렇게 갑작스레 집으로 돌아가기엔, 손에 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각자의 나라에서 들려오는 암울한 소식도 덧붙여, 앞으로 어떻게 헤처 나갈지 막막했다. 나는 가족들에게 전화했고, 곧 내 차례가 온다 울먹이며 ‘그러니까 너무 놀라지 마’ 당부했다. 전화를 끊고, 우리는 거실에 모여 그냥 아무 넷플릭스나 틀어 놓고 멍하게 앉아 있었다.
당일 아침, 또 해고 소식이 들려왔다. 이젠 정말 내 번호 직전까지 왔다. 플렛 메이트는 슬퍼하는 나를 거듭 다그쳤다. ‘우리는 아니야, 그러니까 그런 생각 하지 마.’ 우리는 생각을 다른 쪽으로 돌리기 위해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다. 어쩌면, 그렇게 우리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오전 시간이 지나고 오후가 됐다. 2시, 3시… 그러다 배치 메이트 중 한 명이 해고 통보를 받았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휴대폰을 옆에 놔둔 채, 몸을 웅크렸다. 내 플랫 메이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네 시쯤, 내 휴대폰이 울렸다. 해고 통보였다.
뭐랄까, 느낌이 정말 묘했다. 아- 드디어 끝났구나. 불안감이 사르르 녹아내리고 그냥 하염없이 슬펐다. 곧 플랫 메이트도 전화를 받았다. 앞집의 배치 메이트도 통보를 받았다. 그렇게 우리 배치도 전원 해고 통보를 받았다. 그날, 우리는 하염없이 울었다. 그날만큼은 정말 슬퍼해도 되니까. 눈물이 멈추지 않고 주룩주룩 내렸다. 승무원이 되기 위해 지나왔던 과정들을 되짚으며, 처음 도하에 와서 배치 메이트를 만나고, 첫 비행을 하고, 비행하며 쌓은 추억들을 돌이켜 봤다. 나의, 내 친구들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 가장 찬란했던 순간이 그렇게 추억의 한 편으로 머무르게 됐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끊임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은, 힘들게 이뤄낸 그 자리를 놓아 버리기엔 너무 아쉬워서였던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으로 가진 꿈.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수도 없이 도전하고, 기나긴 시간을 인내하며 지냈다. 유럽 곳곳을 돌아다니며 실패를 겪다 극적으로 이뤄낸 꿈이 너무도 소중해 놓아 줄 수가 없었다. 흐르는 물결이 손가락 틈 사이로 흐르는 것처럼, 그렇게 나의 소중했던 꿈이 흘러 지나갔다.
사실, 브런치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승준생 시절부터 했었다. 꼭 승무원이 되어서 힘들었던 승준생 시절을 겪으며 생각했던 것들을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한국에서 승무원이 되지 못하고 외국으로 가야만 했던 서러움, 승무원이 되는 과정에 대한 내 생각, 그런데도 승무원은 참 멋진 직업이라는 걸 새로운 시각에서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었다.
비록 나의 짧디 짧은 승무원으로서의 커리어는 끝났지만,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많아 이 브런치를 계속 이어 나가려 한다.
도하에서 돌아와, 나는 제2의 커리어를 준비했다. 21학년도 학사편입으로 학생 간호사가 되었다. 승무원이 전부인 줄 알았던 지난날을 뒤로하고, 더 멋진 미래를 그려나갈 수 있단 것 또한 공유하고 싶다. 내 인생에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은 지나갔지만, 앞으로 더 빛날 순간을 위해 나는 계속 꿈을 꿀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