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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yaya May 15. 2017

리처드 도킨스 - 첫번째 이야기

세계 최고의 석학 도킨스가 한국을 방문하다. 그리고 나는 머저리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작가분들이 있다. 그분들 중 절반은 이마가 훤하다는 점이 특별하다. 그리고 좋아하는 작가를 만나 질문을 던질 기회를 가지게 되는 건 큰 행운이자 행복일 것임은 명백하다. 연로한 분들이라면 더더욱 그러하지 않을까. 작고하신 분들은 다시는 만나 볼 기회조차 없기에.


그런데 그 기회가 왔다. 아니, 왔었다. 지난 1월, 리처드 도킨스가 한국에 방문했던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그는 대머리가 아니다. 하지만 난 일생에 단 한 번뿐일 수도 있었던 기회를 눈앞에서 놓쳤다. 모든 것들을 고려해봤을 때, 난 멍청이라는 귀결이 손쉽게 도출되었다. 그분의 이야기를 하며 아쉬움을 달래보고자 한다.




도킨스, 그 앞에 붙는 수식어'들'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인터파크는 도킨스에게 위와 같은 수식어를 붙였다. 나 또한 그분을 '이기적 유전자'로 처음 접했으니, 무난한 표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도킨스는 수식어 하나만으로 충분치 않은 사람이다. 세계의 석학으로 불리는 사람이자 과학 저술가, 생물학자이기도 하며 2007년에는 사람을 줄 세우기로 유명한 타임지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유튜브에 Richard Dawkins을 검색해보면 그의 강의가 수두룩하게 나온다. 그리고 나는 그의 '덕질'을 시작한 지 꽤 됐다.


내 편견이지만, 과학을 하는 사람들, 글을 쓰는 사람들은 예술가와 운동선수만큼 유명세를 얻기 힘들어 보인다. 하지만 대중에게 다가가는 도킨스는 예외이다. (브라이언 그린, 칼 세이건, 카우프만 등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과학자이자 작가인 도킨스는 어떻게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는 사람이 되었을까?




앎의 확장성

© thatbiologist.wordpress.com

생명공학을 전공하면서, 많은 '사실'들을 외우고 공부했었다. 대부분의 지식은 기억에 남지 않고, 배운 적이 있다는 그 행위 자체만이 기억에 남을 뿐이지만 말이다. 그래도 다른 지식에 비해 DNA에 대한 내용은 아직 또렷하게 남아있다. 


지구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ACGT(U)의 네 화합물의 조합코드로 이루어진 이중사슬인 DNA에 모든 정보가 담겨있고, 이 조합코드(Triplet code)는 mRNA의 형태로 빠져나와 단백질이 만들어진다는 '중심설(Central Dogma)'은 생명공학 전공자라면 누구나 배우는 필수적 지식이다.


'나와 세계'에 대한 이해의 영역을 넓힌다는 건 신나는 일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앎 자체가 어떠한 유용성을 지니는가에 대한 의문이 회귀한다. 특히 현학적이고 사변적인 지식을 볼 때는 더욱 그렇다. 물론 DNA와 중심설은 생명체가 어떠한 방식으로 자신의 특성을 발현시키는가에 관한 멋진 이야기이고, 인류를 기아에서 해방할 유전공학의 모태이니 사변적이라 할 수는 없다. 하지만 DNA는 생명공학에 깊이 관여하지 않는 사람의 단어사전에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도킨스는 이런 DNA의 집합체, 즉 유전자를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존재하는 현실 세계의 사전에 다시 불러들인다.


그의 저서인 <이기적 유전자>는 '사람은 왜 존재하는가?'라는 도발적인 문구로 깃대를 세운다. 동물행동학자이기도 한 도킨스는 수많은 사례를 통해, 동물과 인간의 행동양상은 결국 자기 유전자를 보호하고 복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주장한다.

유전적 근연관계, 나의 일란성 쌍둥이는 100%의 유전자가 일치하며, 나와 내 형제는 50%의 일치를 보인다.

식상하지만 연인들 간에 이야기되는 일화가 있다. 만약 나와 누군가가 물에 빠지면 누구를 먼저 구할 거냐고. 이런 방식으로 나의 일란성 쌍둥이와 형제가 동시에 물에 빠졌을 때 누가 더 소중한지를 도킨스식으로 따져본다면, 고민할 여지 없이 일란성 쌍둥이를 구해야 할 것이다. 형제는 나의 유전자와 50%만 일치하지만, 일란성 쌍둥이는 나의 유전자와 100%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도킨스는 지극히 유전자의 관점에서 개체의 행동을 설명한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원주민 풍습 중 '포틀래치'라는 것이 존재한다. 이 기간에 원주민 부족의 대표는 재산을 엄청나게 써 가면서 남에게 축제를 베푼다. 이는 심지어 자기파괴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낭비-나는 이렇게 많은 재산을 베풀어도 문제가 없다는 자기 과시-는 이성을 유혹하는 수단이며, 이는 결국 자손을 통해 자기 유전자를 대물림할 확률을 높인다. 공작새 수컷이 크고 눈에 띄는 색상의 깃털을 진화시킨 것도, 천적에게 노출될 위협보다 이성에게 눈에 띄는 것이 더 유전자를 보존하는 데 이득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유전자 보존의 관점은 아이러니하다.


자기 파괴적 성격을 띤 포틀래치는 현대인의 이성과 양립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현대인의 삶 속에도 포틀래치의 변형판이 존재한다. 바로 술과 담배이다. 이것들은 자기 파괴적 성격을 띠지만 소위 '마초'임을 부각하고 자신이 건강함을 과시함으로써 이성에게 어필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술과 담배가 중독성 약물임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이처럼 도킨스는 유전자를 현실의 영역에 안착시켜 인간 행동의 이해를 확장한다.




사실 이 글은 2월에 썼던 글이다. 난 정말 글러먹은 게 아닐까 싶다. 다음 글에서는 그의 신념, 그가 생각하는 미래에 대해 써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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