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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yaya Jun 14. 2019

'USS 칼리스터' 함선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사피엔스>의 궁극적 질문을 <블랙미러>가 보여주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

시대가 너무 빨리 변한다는 말은 상투적으로 쓰여왔다. 하지만 정말로 시대는 '너무 빨리' 변해서 그 변화를 무조건적으로 긍정해야 하는 사회가 이미 도래했다. 이제 정치/사회계의 목표는 변화를 선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겨우 따라잡는 것에 있다는 문장에는 이견이 없을 듯하다. 사회과학의 명저로 꼽히는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의 마지막 대목은, 너무나 변해버린 사회에서 허우적거리는 존재들에 우려와 연민의 눈길을 보낸다.

우리는 머지않아 스스로의 욕망 자체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마도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진정한 질문은 "우리는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일 것이다. 이 질문이 섬뜩하게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이 문제를 깊이 고민해보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p.586>

이 문장은 즉각적으로 와 닿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블랙미러>의 스토리텔링과 영상이 우리의 부족한 이해력과 상상력을 메워주기 때문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블랙미러>는 이러한 세상을 힘겹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리고 그들의 현실세계는 유발 하라리의 언급대로 '섬뜩하게' 느껴진다.




욕망의 내밀한 무대

인간은 성장하는 와중에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경계선을 배운다. 그곳을 향해 달려가다 다치게 되는 순간, 개체의 욕망을 억제하는 방법을 학습한다. 남을 다치게 하면, 자신도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다는 단순한 사실. 원초적인 사회성의 학습은 함무라비 법전의 체계와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인류는 자신의 억눌린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내밀한' 무대를 소유하게 되는 지점에 이르렀다. 바로 '게임'이다(게임의 '중독성'과 '폭력성'에 대한 논쟁은 차치하도록 하자). 게임의 '규칙' 내에서 우리는 자율적으로 행동하는데, 종종 실제 사회에서 용납할 수 없는 행위들을 주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행위들은 게임을 플레이하는 유저 내에서는 '매우 정상적'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어쨌든 게임의 '규칙' 내에서 할 수 있는 행위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롤러코스터 타이쿤'이라는 게임을 예로 들어보자. '롤러코스터 타이쿤'은 유저가 원하는 대로 놀이공원을 꾸미고 손님을 끌어들이는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사용자는 놀이공원에 놀이기구와 편의시설 등을 만들고 가상의 손님들이 이를 이용하는 것에 재미를 느끼도록 유도되었다. 참으로 아기자기한 게임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유저들 중 몇몇은 게임사의 의도대로 플레이하지 않는다. 일례로, 263년 동안 놀이공원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미로를 설계한다든지, 일부러 추락하는 롤러코스터를 만들어서 손님들이 이용하도록 하는 사례 등이 무수히 많다.

263년이 걸려 출구를 찾도록 설계한 놀이공원 (출처:디스이즈게임)

이러한 사례는 다른 게임에도 너무나 많이 존재하기에, 사람들은 이런 방식의 진행에 큰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웃어넘긴다. 앞에서 말했듯, 어쨌든 게임의 규칙 하에서 한 행위니까 말이다. 따라서 그들은 '의외로 정상입니다.'로 규정된다. 이러한 규정은 게임이 현실이 아니라는 것에 기반한다.

롤러코스터 타이쿤에 관한 유명 패러디 카툰 (출처:디스이즈게임)

이처럼 게임이 규정하는 경계 내에서 행동한다면, 우리의 행위는 정당화되기 쉬워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정당화는 매우 연약하다. 유명한 슈팅 게임인 <콜 오브 듀티>에서는 유저가 테러리스트가 되어 민간인을 학살해야 하는 미션이 주어진다. 내가 방아쇠를 당기지 않으면 배신자로 낙인찍혀 다른 인공지능에게 죽을 수도 있다. 게임이 규정하는 경계가 그러하니, 우리는 아무 거리낌 없이 방아쇠를 당길 수 있을까. 이 미션은 즉각적으로 문제를 불러일으켰고, 일부 국가에서는 이 부분이 수정되어 판매되었다.

<콜 오브 듀티> 미션 '노 러시안'의 한 장면 (출처:디스이즈게임)

이처럼 게임이 규정하는 경계 내에서 하는 행동이 현실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불쾌함을 느낄 수 있다.




'USS 칼리스터'의 섬뜩함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USS 칼리스터'는 정확히 이런 불쾌한 지점을 공략한다. 'USS 칼리스터'의 주인공 중 하나인 로버트 데일리는 온라인 게임사의 CTO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무시를 받는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데일리는 자신만이 이용할 수 있는 가상공간을 만들어, 그를 무시하는 사람들을 가상공간 안에 집어넣고 괴롭힌다. 자신이 가상현실을 통제하고 규칙을 규정할 수 있다면, 그곳에서 우리는 신이 되는 것이다.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불만스러워하며 무책임한 신들, 이보다 더 위험한 존재가 또 있을까?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p.588>
'USS 칼리스터'의 등장인물들. 대부분 데일리에게 미움을 받은 사람들이다.

'USS 칼리스터'는 또 다른 문제도 지적한다. 게임은 현실이 아니다. 하지만 기술은 게임을 점점 현실적으로 만든다. 기술의 진보로 인해 가상의 무대가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무대의 구성원이 실제 사람처럼 느끼고 행동한다면 어떤 윤리가 적용되어야 하는 것일까?


로버트 데일리는 회사 사람들의 DNA를 채취하여 가상공간 속에서 그들을 다시 창조해낸다. 그들은 현실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며, 심지어 현실에서의 기억까지도 보존하고 있다(DNA로만 기억을 보존하는 건 불가능하기에, 이는 문학적 상상력으로 보아야 한다). 데일리는 자신에게 부여된 신적인 권위를 남용하고, 그들에게 가혹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고통받지 않기 위해 데일리의 비위를 맞추며, 마지막에는 자유를 되찾기 위해 죽음도 불사한다. 이들에게는 어떤 윤리가 적용될 필요가 있는가. 혹은 가상의 데이터에 불과하니 그들에게 적용할 윤리는 필요 없는 것일까.




'USS 칼리스터'가 맺는 결말은 흥미롭다. 하지만 던져놓은 질문에 대해 속 시원하게 답변해주진 않는 것 같다. 드라마의 마지막 즈음 월턴의 말에 데일리가 잠시 흔들렸듯,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람과의 유대와 관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USS 칼리스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우리 스스로가 알아내야 할 것이다. 또한 잘못 가고 있다면 항로를 수정할 수 있는 능력도 반드시 가져야 할 것이다.


#넷플릭스 #스토리텔러 #블랙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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