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난두 페소아를 읽고
지금의 부캐열풍이 있기 한참 전에 부캐 생성에 진심이셨던 한분이 계셨다. 이분이 얼마나 진심이었냐면은 그는 자신의 많은 부캐들에게 한명한명 출생지와 날짜, 개인사와 그런 개개인의 배경들로 인해 형성된 성향까지 고려해 그 이름으로 글을 발표하고 때로는 부캐들끼리 언쟁을 붙이기도 하고 서로 관계성까지 지니게 했는데 (그게 너무 진심이라 이 이름이 그의 본체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정도까지 이르렀다. 어쨌거나 그의 본체로 알려진) 그는 페소아라는 이름으로 현대사회에 알려져 계속해서 많은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직도 이것을 그의 창작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정신분열적 자아발현으로 봐야할지 많은 의견이 분분하지만 어찌되었든 그는 여러 이명과 준이명을 통해 엄청난 양의 글들을 지속적으로 발표해냈고 그 안에서 독자들은 숱한 혼란과 위로를 경험하며 독서를 통한 지극히 건강한 타자화를 실현하고 있다.
내가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가장 큰 이유는 타자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고, 어떤 생각과 감정을 느끼며 살아갈까? 나도 처음 사는 인생이라 너무 모르는 것도 많고, 매일매일 걸어가는 길과 내리는 결정들에 의문을 수십번을 가지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걸 어떻게 해낼까, 하는 생각들에 타인을 관심있게 관찰하게 되는 것 같다. ‘산다는 건 뭘까’에서 시작된 질문이 결국은 ‘저 사람은 어떻게 살아낼까’로 이어진다. 내가 세상과 타인을 이해하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되는 것은 그런 수많은 간접적 경험들을 통해 축적된 ‘서사들’이었다. 때론 저 사람이 나에게 이해하기 힘든 어떤 행동을 할 때, 혹은 삶에서 너무 어려운 상황들을 마주할 때 나는 종종 그 답을 책과 영화에서 찾았다. 이해할 수 없지만 나름대로 서사를 만들어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방법으로 마음의 타격을 최소화하면서. 페소아를 보다보면 그런 식의 타자화를 통한 삶에 대한 끈질긴 애정과 끝없는 구애가 느껴져 ‘최대한으로 감각하려’ 노력하는 그의 몸부림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게 너무 마주하기 힘들고 답답해서 책을 덮어버리고 싶은 순간들도 참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집을 읽는 방법처럼 그 수많은 목소리의 뒤엉킴 속에서 한 편의 정말 와닿는 문장이나 글을 읽고 나면 그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다시 솟아올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그의 글들에 대한 의지를 견인해 나갈 수 있었다.
내가 참 좋아하는 그의 글은 바로 <페소아의 페소아들>에 수록된 꼽추 소녀가 사랑하는 금속공에게 보낸 편지였는데, 당시 건장한 성인 남성으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사회생활을 멀쩡히 해나가던 페소아가 이토록 낮고 미미한 존재로 빙의하여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창가에 앉아 자신의 예정된 죽음만을 기다리는 불구의 소녀의 삶과 감정을 이토록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낸 것은 정말 놀랍다고 느껴졌다. 그가 창문을 소녀의 세상과 소통의 매개로 설정한 것도, 마치 히치콕이 <이창>에서 영화를 통해 다른 사람의 삶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관음적인 욕망을 드러내고 싶어했던 것과 같은 맥락처럼 느껴졌다. 다만 페소아의 창문은 조금 더 순수하고 다정한 관찰의 느낌일 뿐. 실제로 포르투갈에는 ‘창문-하다’라는 단어가 있다고 하는데 그저 창문에 기대어 서서 밖을 관찰하는 행위의 지극히 수동적인 이 단어가 지정되어 있는 국가는 포르투갈 밖에 없다고 한다. 책과 영화를 보는 행위도 일종의 ‘창문-하는’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나는 그 창을 통해 다양한 사람들의 삶과 세상을 바라보고 관찰하는 시점이 되니까. 여하튼 페소아의 스스로를 분열하여 타자가 되어보는 이 타자화는 그를 더욱 복잡하면서도 다정한 사람으로 느껴지게 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영영 아무것도 되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가 되기를 원할 수조차 없다.
이걸 제외하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꿈을 품고 있다.’
(알바루 드 캄푸스, <담배가게> 중)
페소아를 읽으며 옛날에 김창완 아저씨가 어디선가 했던 얘기가 생각났는데, 그는 60이 지난 지금도 자신을 잘 알지 못하겠다고 고백했다. 나는 이런 사람인 줄 알았는데 때로는 전혀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며 결국은 인생은 끊임없는 자기 발견의 연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셨다. 그 뒤에 하신 말씀이 본인을 잘 안다고 생각하거나 어떤 모습으로 정의하지 마라는 말을 하셨다. 인간은 너무나 복잡한 존재라 평생을 같이 살아도 자기 자신도 잘 알지 못한다, 그러니 그저 순간순간, '아, 오늘의 나는 이런 모습이구나'하고 인정하고 살아간다면 한계없이 자신을 성장시키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하셨다. 어쩌면 페소아는 그런 식으로 자신을 돌아봤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끊임없이 고백하는 페소아의 단어들을 그렇게 이해했다.
페소아는 자아가 너무 강했기에 그 입체적이고 다층적인 자아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수많은 타인을 만들수 있었고 그렇게 다양한 삶을 그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살았기에 보다 넓은 감각으로 세상과 타인을 이해할 수 있었다. 동시에 그렇게 풍성한 감각들은 온 마음으로 감각하려 했기에 그 삶이 너무 버거웠고 또 그런 삶에 대한 애증의 마음은 평생동안 그를 풍성히 채우기도, 괴롭히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페소아는 많은 부분 혼란스럽지만 또 그만큼 다양한 사람의 삶을 어루만지기도 하는 것 같다. 그가 단 한명의 삶이 아닌 여러명의 몫을 살았기에 보다 다양한 독자는 그의 혼란과 방황을 통해 위로를 얻는다.
"셀 수 없는 것들이 우리 안에"
셀 수 없는 것들이 우리 안에 산다,
내가 생각하거나 느낄 때면, 나는 모른다
생각하고 느끼는 사람이 누군지.
나는 그저 느끼거나 생각하는 하나의 장소.
나에게는 하나 이상의 영혼이 있다.
나 자신보다 많은 나들이 있다.
그럼에도 나는 존재한다
모든 것에 무심한 채.
그들이 입 다물게 해 놓고, 말은 내가 한다.
내가 느끼거나 느끼지 않는
엇갈리는 충동들이
나라는 사람 안에서 다툰다.
나는 그들을 무시한다. 내가 아는 나에게 그들은
아무것도 불러 주지 않지만, 나는 쓴다.
(1935년 11월 13일)
-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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