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여자의 딸>을 읽고
어릴 적에 엄마가 시켜주시던 책배달 서비스가 있었는데, 매달 한번씩 집으로 여러 종류의 책이 잔뜩 든 가방이 오고는 했다. 언니랑 나랑 동생은 각자 자기 나이에 맞는 책 꾸러미를 안아들고 이번달엔 어떤 책들이 왔는지 설레하던 기억이 난다. 그 책가방의 촉감과 기분좋은 묵직함. 어떤 날은 책 꾸러미를 받자마자 침대에 앉아서 하루가 다 가도록 세네권은 연이어 읽어내던 날도 있었고, 어떤 날은 그 한달이 다 가도록 책을 다 끝내지 못해서 아쉽고 무거운 마음으로 책 가방을 반납하던 날도 있었다. 어른이 되고 나니 그때의 설렘이 그리워져 찾아보니 그때처럼 그렇게 대여식으로 책을 배달해주는 서비스는 없었다. 그대신 매달 정기적으로 책을 배송해주고 웹으로 그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온라인 북클럽같은게 정말 많이 생겨나서 그 중에 친구의 추천으로 #책발전소 에서 하는 #책발전소북클럽 을 신청했다. 시카고 살 때 One Book One Chicago라고 공공도서관에서 아예 도시 전체로 같은 책을 읽는 걸 정기적으로 했었는데 (놀랍게도 도시 내 서점이나 시민들의 참여도도 높았다!) 그때 생각도 나고.. ㅎㅎ 설레는 마음으로 받아본 두번째 책. (매달 같이 오는 김소영 큐레이터님의 레터도 너무 좋다)
#스페인여자의딸 #카리나사인스보르고
읽히는 건 쉽게 읽히는데 내용은 쉽게 읽혀지면 안되는 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글쓰기가 워낙 훌륭해서 이 책을 막힘없이 읽어내려감에 조금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토니모리슨 이 쓴 #비러비드 라는 소설이 많이 연상되는 소설이었다. 둘 다 여성 화자가 각자의 비참한 처지에서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식의 서사가 닮았고, 실제 역사적으로 가장 참혹하게 외면되었던 소수의 목소리를 빌려 이야기를 전개함으로 당시 그들의 입장에서 사회적 사건들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 비슷하다고 느껴졌다. 아무래도 여성 중심 서사이기도 하고, 내전의 느낌도 강해서일까 #전쟁은여자의얼굴을하지않았다 도 많이 생각났던 책이다. 같이 읽어본다면 인간의 가장 최저선에서 결국 우리가 서로를 가르는 성별이나 출신배경, 인종과 같은 문제들이 삶과 죽음의 갈래 앞에서 얼마나 의미없는 것이 되어버리는지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이 책은 베네수엘라의 수도인 카르카스를 배경으로 서술된다. 1980년대 중반 유가폭락으로 인한 경제공황, 포퓰리즘 정책의 붕괴 등으로 완전히 무너져내린 국가에서 주인공인 아델라이다가 어머니를 땅에 묻으며 시작된다. 끝없는 절망 밖에 없는 현실과 과거의 따뜻하고 사소한 기억들을 교차하며 현실의 비참함은 더욱 극대화 되어 보여진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오월의청춘 도 (본 적은 없지만..)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5.18 광주민중항쟁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소수의 캐릭터들에 서사가 쌓여지고 회차에 걸쳐 그 인물들과 시청자들의 관계가 성립되었을 때 목격하는 비극이 더욱 극대화되어 느껴진다고 했던 글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었는데, 같은 맥락인 것 같다. 단순히 이 순간의 투쟁 뿐 아니라 화자인 아델라이다의 과거의 순간들을 함께 걸어가면서 그녀가 쌓아온 소중한 삶의 가치와 의미들이 너무나 쉽게 파괴되어져 가는 현실이 더욱 잔인하게 느껴졌다.
개인의 서사로 흘러가기에 베네수엘라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어도 쉽게 읽혔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으면서 더욱 베네수엘라라는 국가와 난민문제, 식량난과 그로 인한 인플레이션에 대해 더욱 알아보고 그 배경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현대의 한국을 살아가면서도 참 살기 힘들다는 생각을 습관적으로 하는데 책을 읽으며 다시금 그런 마음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물론 고통의 문제는 절대 비교할 수 없는 것이지만!!) 아델라이다와 국가의 상황은 더 나빠질 것이 없을 것 같은 순간에조차 더욱 나빠지기만 한다. 도대체 이 절망에 끝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계속 책을 읽어내려갔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고, 국가가 더이상 국가의 역할을 하지 못할 때, 그때는 지금 우리가 가치를 두는 것들과 필요들이 전혀 다른 것들이 될 텐데 그때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온전한 원초적인 욕구와 생존을 위해 더 치열하고 야만적으로 경쟁하고 싸우게 되겠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너무나 역설적이게도 절망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살고자 하는 열망도 강해져서 다른 사람의 삶 따위 가뿐히 지려밟을 수 있는 순간도 오지 않을까.. 왠지 두려웠다. 점점 가속도가 붙는 기후변화와 이전에 없던 역병.. 항상 멀게만 느껴졌던 재난상황들이 성큼 곁에 다가와 있는 걸 보면 문득 그런 서늘함을 느낀다. 지금 나에게 픽션인 이 일들이 누군가에게는 현실일 수 있고 언제든지 나에게도 현실로 다가올 수 있다는 사실이 다시금 경각심을 준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것들을 바라보고, 어떤 가치들을 위해 살아가야 할까. 내가 절망의 상황 속에서 조금 더 인간다운 선택을 하려면?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수용소에서 가 생각났는데 홀로코스트라는 절망의 상황에서 오히려 희망을 발견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키는 것에 대한 내용을 담은 책이었던 것 같아서 다시 같이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책을 읽을 때 주로 다른 책이나 영화를 연결해서 생각하거나 그렇게 추천을 해주는 편인데 이 책을 읽으면서 생각했던 책들은 이미 위에서 언급을 했고,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은 추천영화는 #와드알카팁 #사마에게 라는 영화가 있다. 이건 작년에 라디오에서 배순탁 작가가 추천을 하는 걸 듣고 영화관에서 본 시리아 내전을 취재한 다큐멘터리 영화인데 2019년에는 칸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실제로 시리아인 시민기자인 와드 알카팁 감독이 알카포에서 지낸 5년의 시간을 본인의 개인사와 내전으로 인해 파괴되어가는 도시의 모습을 함께 기록한 영화이다. 모두가 죽어가는 중에도 와드에게는 새생명이 찾아오고 자신의 딸인 사마와 그 외의 도시 내에서 이유없이 죽어가는 시민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이들의 모습이 너무나 가깝고도 생생하게 담겨있어서 보면서 마음이 뭉클하고도 괴로운 영화였다. 하지만 내전의 참상 속에서도 자라나는 사마의 모습과, 서로를 지키고 안부를 묻는 이들의 모습이 때론 따뜻하고 희망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시리아의 참상이 지나간 역사가 아닌 현재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끝나는 이 다큐멘터리가 베네수엘라의 참상을 담담하게 보고하며 ‘이 일은 멀리에 있지 않아,’라고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스페인 여자의 딸>과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책과 영화들은 때론 눈 앞의 삶에 너무 익숙해져서 마치 우리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삶의 비극들에 대해 다시 한번 우리의 감각과 마음을 예민하게 만들고 아직은 우리에게 닥치지 않았지만 실상은 너무나 가까운 곳에서 도사리고 있는 우리가 차마 대비할 수 없는 위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다. 과연 나는 내 삶의 가장 밑바닥에서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인간의 존엄성’이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며 조금 더 넓고 큰 세상으로 나의 시야를 넓히는 책이 된 것 같다. 아직까지도 너무나 소시민인 나로서는 이런 책과 영화들을 보고 안타까워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되어 무력해지지만 분명 내가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것이 뭔지는 좀 더 길고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책을 읽고 #웨비나 라는 라이브 방송을 통해 김소영 큐레이터님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시고 질의응답을 해주시는 시간이 있었는데 거기서 많은 사람들이 #수잔손택 의 #타인의고통 이라는 책을 언급했다. 전에 읽으려다가 너무 어려워서 중간에 포기했던 책인데 이참에 다시 읽어봐야겠다.
P.S. 곧 영화로도 제작이 된다고 기사를 읽었는데 아주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