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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상 Jun 17. 2023

길을 잃어도 좋았습니다.

제주를 훔치다 15

사라봉을 넘어 별도봉 산책길로 들어서는 길을 놓치고 말았다. 각각의 소속을 알리는 유난히 많은 리본들 중 올레 리본을 자세히 살피지 못한 탓이었다. 물결카페 쪽으로 내려오니 그 많던 리본이 일제히 사라지고 없었다. 리본이 촘촘히 있는 곳도 있고 드물게 있는 곳도 있어서 그러려니 생각했다. 길 따라 사라봉 입구 쪽으로 가라는 리본까지 내려왔다. 다시 사라봉으로 올라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 때쯤이면 일부러라도 발걸음을 멈춰 안테나를 돌려야 했다. 해안으로 걷다보면 만나겠지 싶은 촉이 섰다. 물론 이전에도 그런 경우가 있기도 했고.

부두 쪽으로 방향을 잡고 족히 1킬로미터를 걸었나 보다. 오가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저 앞에서는 길이 끊긴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제서야 동서남북을 유심히 살폈다. 에그머니나 세상에, 바다건너 딱 별도봉일 것 같은 봉우리 허리에 딱 올레길일 것 같은 산책로가 눈에 들어왔다. 도대체 나는 지금 어디를 걷고 있는 것이냐... 그래도 혹시 모르는데 끝까지 가봐야 되지 않을까? 또 다른 목소리가 가던 길로 가보자고 부추긴다. 아니, 아니야, 바로 뒤돌아섰다. 물결카페를 지나 리본이 있는 곳까지 되짚어 올라갔다. 아직 5킬로 미터도 못걸었는데 족히 3킬로 미터 이상을 헛걸음하고야 말았다.


관덕정에서 출발 직후 리본은 동문시장으로 안내했다. 전날 시장을 돌아볼 때는 보이지 않던 화살표와 리본이 눈에 들어왔다. 늘 관심 있는 쪽으로 시선 닿게 마련이어서 사물도 목적이나 이유에 따라 사라지거나 나타난다. 관심을 잠깐 놓으면 리본도 화살표도 길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화북포구
삼양, 검은모래해수욕장


그렇게 만난 화북포구는 초행이었다. 제법 큰 규모에 어선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여행객은 거의 보이지 않고 마을 어르신들이 느린 걸음으로 오간다. 오래된 가게 문을 반쯤 열어두고 두, 세명씩 모여 앉아 밖을 내다보며 나눈 얘기들이 빼꼼이 새어 나오기도 하고. 어디서나 이방인이었던 나도 원래 제주 사람 인양 어슬렁어슬렁 마을을 지났다. 삼양 검은모래 해수욕장으로 진입하니  삼삼오오 검은모래, 검은 파도, 검은 바다위를 유영하고 있는 사람들, 느닷없이 훅 들어오는 검은색이 영 생소하다.  


다시 리본을 놓치고 말았다. 비가 와서 모자를 눌러쓰고 우산까지 들어서인지 자주 길을 이탈한다. 작은 길보다는 큰길로 방향을 잡는 습관이 작동한 탓이다. 길은 늘 갈래를 치고 그 갈래 길마다 목적지가 있는데도 딱 하나, 넓고 안전한 길로 나도 모르게 들어서 버리고 만다. 겨우 만난 올레길을 다시 놓치지 않으려  확인에 확인을 거듭한다. 전혀 아닐 것 같은 산길로 안내를 해도 군소리 없이 따른다. 어떤 방향이든지 좁든지 넓든지, 굽이졌든지 직선이던지 길은 다 이유가 있고 목적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잘 가고 있을까


가끔 내가 잘 하고 있는지, 잘 가고 있는지, 잘살고 있는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리본도 없고 화살표도 없는 내 삶의 방향은 제대로 향하고 있는지, 가족의 일원으로, 직장인으로, 선배로, 신앙인으로 주어진 역할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부족함이 훨씬 더 많이 떠오른다. 잘못한 일들, 실수한 행동들, 잘못 들어선 삶의 방향... 그래서 지금 이 길을, 이렇게 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아이들을 일방적으로 다그치고 닦달한 엄마였다.  그 일들은 결코 아이들 움직이거나 이길 수 없다는 쓰린 경험을 안겨 주었다. 젊은 혈기로 직원들을 몰아붙였던 옛 모습을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고 한 발짝 물러나기도 한다. 이제서야 안되는 것들에 대해서도 눈곱만큼씩 너그러워 지는 것 같다. 그러니 지난 날의 실수와 잃었던 길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고 위안해본다.   


3킬로 미터의 두려움과 조급한 걸음 끝에 만난 리본과 별도봉 산책길이 더 없이 반가웠던 이유는 길을 잃었기 때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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