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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상 Jun 25. 2023

발랑 까진 두 여자와 걸어볼까요?

제주를 훔치다 17.

전날 저녁, ‘친구가 제주도에서 잘 먹지도 못하고 혼자 걷고 있다며 밥 좀 멕이고 오겠다’고 거짓말 반, 진담 반으로 남편 허락을 받아 온 P는 한우곱창 2인분, 제주 오겹살 2인분에 김치찌개를 추가로 주문했다. 마치 5인분을 내게 먹일 것 같던 그녀는 김치찌개까지 3.5인분을 먹어치웠다. 도대체 누가 못 먹은 거냐고.

            

P와는 중학생 때부터 절친이었다. 공부는 그럭저럭에다 발랑 까진 것도 비슷해서 같은 학교 남학생들은 쳐다도 안 보고 읍내 남중학생들을 만나러 다녔는데 선생님께 들켜서 된통 혼이 난 후에야 조금 조신해졌다. 아니 조신한 척했다. 철이 없던 만큼 행복한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P와 나에게 예견된 미래에 대한 보상 혹은 가불 같은 것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다. 사는 것도 비슷했던 우리 둘은 고생의 양도 같았는데 각자의 고생을 겪어내느라 한동안 만남도 소식도 뜸해졌다. 

     

가끔 서로의 안부가 동창회 소식과 함께 전해져 오곤 했다. 어느덧 P도 나도  밥걱정은 안 해도 될 만큼의 시간이 흘렀을 때 다시 만났다. 뜸했던 시간이 문득 사라진 것 같았다. 이혼과 재혼, 사업실패... 굵직굵직한 인생사는 다 겪어봤다는 P의 호탕한 웃음은 울퉁불퉁했던 길을 잘 걸어온 묵직한 듯 가벼웠고 편안했다. 이혼을 하고 안 하고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걸 누가 모르랴. 나 역시 많은 위기를 그저 지났을 뿐이고 월급쟁이니 실패할 사업도 없었다고 피차 힘들었던 삶이 안주거리로 올라왔다. 어디서에서도 구할 수도 맛볼 수도, 영원히 품절도 안 되는 비싼 안주였다. 



고내리 포구에서 P와 함께 걸음을 시작한다. 오랜만에 만나도 지난번 만났을 때 했던 얘기를 이어간다. 이전에 했던 얘기도 처음인 듯 신난다. 혼자 걸을 때 좋았던 길이 둘이 걸으니 더 좋은 데다 든든함도 더해진다. 해변까지 덮은 해무에 P도 나도 흐려졌다 선명해진다. 주름진 웃음도 지워졌다 다시 살아난다. 

한적한 카페에 들러 차 한 잔을 하며 아이들 얘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형제들에서 자동으로 친정엄마 얘기로 이어진다. 어느 날엔 지독하게 미워하기도 했고, 어느 날엔 뚫릴 듯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가, 어느 날엔 다시 안 볼 듯 싸웠던 엄마. 웃다가 울다가 푸른 바다를 끌어와 눈을 씻는다.     

수산리 푸른 날을 걷다


서두르자며 5킬로미터 남짓 바닷길을 지나 수산리 내륙으로 들어선다. 투명한 유월 초의 햇볕에 살짝 탄 P의 콧잔등이 엉겅퀴 꽃처럼 곱다. 이름을 몰라 내게는 무심했던 당귀 꽃, 엉겅퀴 꽃, 돌나물 꽃, 모싯 잎... 보이는 꽃마다 식물마다 이름을 다 꿰고 있는 P에게 너는 도대체 무엇을 살아냈던 것이냐, 묻는 수밖에. 

호젓한 수산리를 지나 항파두리 유적지를 지날 무렵 심상치 않았던 P의 발에 통증이 커지기 시작했다. 말하지 않아도 그녀의 표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하긴 태어나 처음 걸어 본다는 그녀에게 16킬로미터는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혹시 몰라 신발을 바꿔 신어 보았다. 걱정했던 나도 그녀도 서로의 신발이 신기하게도 착 안겨 통증을 줄여주었다. 우리는 발가락까지도 닮았던 것일까. 룰루랄라.    

 


혼자라도 좋던 길, 둘이라서 더 좋은


귤밭에 들어앉아 있는 무인카페에서 발을 식힌다.  아무도 없는 그곳에서 양말, 모자, 토시, 장갑 등 벗을 것 다 벗고 먹고 싶은 것을 배고픈 그 시절처럼 껄덕대다가 서로 배를 잡고 말았다. 이토록 유쾌한 길이어선지 금세 광령리에 도착한다. 박수와 환호로 P의 첫걸음을 카메라에 남기고 이보다 더 대단한 일이 있을 리 없다고 난리법석 축하식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까져 보기로 했다. 자주 가정을 이탈할 것, 가끔 남편이나 아이들에 대한 신경을 확 꺼버릴 것, 뜨겁게 웃을 것, 5인분을 2인분처럼 유쾌통쾌하게 먹고 마실 것. P야 오늘부터 1일, 워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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