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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진 Oct 19. 2017

"헬조선" 브랜드 디자인

말은 현실을 디자인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는 부름으로써 반응하는 '그'와 '나'의 아름다운 관계를 노래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오랫동안 말의 힘에 대한 믿음을 가져왔다. '작명소'라는 업종이 존재한다는 점은 말의 힘이 얼마나 강할 수 있는지를 믿어왔던 방증일 것이다.




언어는 생각의 틀이다.



언젠가부터 '헬조선'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을 부르는 말이다. 지옥을 뜻하는 영단어 헬(Hell)과 이 땅에 있었던 국가명이기도 하지만, 오늘날에는 대한민국을 부정적으로 표현하기도 하는 '조선'이라는 단어가 합쳐진 합성어이다. 즉, 두 어휘 모두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여 이 나라의 부정적 측면을 비꼬는 말이다.


이러한 혐칭의 활용은 일부 긍정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다. 문제점을 드러나게 하고 공론화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헬조선'이라는 호칭과 함께 실제로 여러 사건들이 공개되면서 문제가 해결되기도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문제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역할을 한 부분이다.


그러나, 김춘수 시인이 <꽃>을 통해서 노래했듯이 말은 묘한 힘을 가지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헬조선'은 자조적인 표현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문제점을 드러내는 것을 넘어 스스로를 정의하는 정체성의 일부로 자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위험하다.





정체성은 현실을 바꾼다.



브랜드 디자인 이론을 보다보면 세 개의 원이 등장하는 도식이 있다. 아래의 것이다.



이들은 각각 브랜드가 선언하는 방향(브랜드 아이덴티티), 브랜드의 현실(브랜드 리얼리티), 브랜드가 보여지는 인상(브랜드 이미지)를 의미한다. 브랜딩 과정은 이 세 가지 요소를 잘 이끌어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과정이다. 이 세 원이 만나는 영역은 브랜드의 이상향이 되며, 가운데 영역에 가까워질수록 좋은 브랜드가 된다.


이 셋의 관계는 유기적이다. 방향성의 선언에 따라 브랜드의 이미지는 영향을 받으며, 브랜드 현실도 변한다. 브랜드가 수용되는 이미지에 따라 브랜드의 현 지위가 바뀌기도 하며, 브랜드의 방향성이 수정되기도 한다. 브랜드 실제 모습은 당연히 이미지와 방향성 수립에 영향을 끼친다.


예를 들어 A라는 기업이 '오늘부터 우리는 정직함을 모토로 삼는다'고 선언하면 절대적이지는 않지만 그 기업의 실체도 정직함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인식도 이에 따라 변화한다. 물론 얼마나 성공적으로 브랜딩을 실천했느냐에 따라 가운데 영역에 더 가까워질지, 멀어질지는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브랜드의 관점에서 '헬조선' 담론을 보면 조금 걱정이 될 수 밖에 없다. '헬조선' 용어의 사용자이며 수용자인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브랜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주체인 동시에 구성원으로서 브랜드를 인식하는 객체이기도 하다. 즉, 우리는 헬조선 용어로 우리 사회를 규정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렇게 인식하기도 한다는 의미이다. 당연히 이는 대한민국이라는 브랜드의 현실에도 영향을 끼칠 것이다.


다시 말해, 헬조선 호칭이 또 다른 헬조선을 낳는다는 뜻이다. '헬조선'으로 칭해지는 세계에서 그 '헬조선스러움'을 만드는 요소들, 예를 들어 부당한 대우나 불합리 등은 반어적이게도 그 칭호로 인해 합리화된다. '헬조선'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이 되기 때문이다.


좀 더 작은 예로, 야근의 사례를 보자. 예전에 어떤 분이 '디자이너라 야근이 일상이다.'라는 문구를 대외적으로 사용하려는 것을 말린 적이 있는데, 일정 수준에서는 이 문구가 디자이너의 야근이라는 문제점을 알리는 순기능이 있지만, 어느 정도를 넘어서는 순간 야근하는 디자이너들을 정당화하는 인식의 틀로 쓰이기도 하기 떄문이었다. 이미 이러한 표현은 사회에 만연한 상황인데, 이 때문에 부당하게 야간 근무를 하면서도 스스로 문제의식조차 느끼지 못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다. '디자이너니까' 어쩔 수 없다는 것인데, 당연히 이는 잘못된 인식이다. 이렇듯 잘못된 정체화 표현이 만연해지면, 오히려 그 문제를 덮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우리 사회에 에너지가 필요하다.



현실의 문제를 밝히고 꼬집는 것은 중요한 기능이다. '헬조선'이라는 어휘는 이러한 배경에서 입에 붙는 작명과 압축적으로 우리 사회의 문제를 포괄한다는 점에서 호응을 얻었고 그 결과 오늘날 각계각층에서 사용하는 은어가 되었다. 우리는 이 표현이 확산되고 화용된 배경을 이해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표현은 어느 시점에서 지양되어야 한다. 현실을 비판하는 에너지를 제공하는 것을 넘어 자조적인 표현으로 쓰이기 시작하면서, 이 표현은 오히려 우리 사회의 에너지를 깎아먹는 역할을 하고 있다. 실패, 부정, 비리 등은 '헬조선'이니 놀랍지도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여지는 세태는 위험하다. 이같은 움직임의 사회적 확산은 성장동력과 희망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동한다.


'헬조선' 표현은 고름과도 같다. 우리 몸의 순환이 어느 부분에서 막힘을 알려주는 고마운 신호이며 그 곪음으로서 자연스럽게 생성되는 부산물이되, 적절한 시점에 없어져야 하는 요소이다. 가벼운 듯하지만, 오랫동안 지속되면 위험할 수도 있다.


우리 사회를 진짜 위험하게 하는 것은 눈에 빤히 보이는 위협들이 아니다. 전쟁이나 외환위기, 고령화 등의 문제는 분명 어려운 문제이지만,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치면 분명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더 큰 문제는 이 해결을 위한 동기부여, 사회적 에너지이다. 열정과 에너지가 넘치는 사회는 큰 문제가 닥쳐도 언젠가는 해결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패배주의와 허무주의가 찌든 사회는 작은 문제에도 넘어질 수 밖에 없다. 의도적으로 사회가 원동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는 기획과 실천이 필요한 요즘이다.


우리 사회의 현실과 이미지가 일부 어두운 것 또한 물론 사실이나, 실제에 비해 과도하게 확대되고 재생산된 울림은 어느 순간 오히려 본질을 파괴하는 위협적인 요소로 작동할 수 있다. 우리는 어느 시점에 이를 인식하고 자제하려 노력해야 한다. 만연해지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당연해진다. 당연해선 안 되는 것들을 끊어내고 고쳐나가려는 기획과 열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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