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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M삼min Oct 03. 2018

발망치충

층간소음

 최근  층간소음에 대해 이런저런 사례들을 보다가 재미있는 단어를 발견했다.


-발망치충-


 발뒤꿈치로 쿵쿵 걷는 거대한 코끼리의 걸음걸이는 누구에게나 참기 힘든 비상식적인 행동이며 조롱거리인 것이다. 발망치충이란 단어는 이 인간의 탈을 쓴 코끼리들과 우리 인간의 말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조롱 섞인 단어로 탄생했다.

 조심해 달라, 양해해 달라는 타인의 불필요한 지적일 뿐인 이 듣기 싫은 소리들을 듣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기울였다면 애초부터 코끼리의 걸음걸이를 지닌 사람들을 조롱하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유튜브에서 코끼리 울음소리를 찾아 아주 크게 재생해 보았다. 조금 실망스럽게도 위층이 응답하지는 않았다.


 발망치충, 좋은 단어는 아니지만 맞춤한 단어다.

나는 1301호 여자를 리드미컬 썅년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녀의 리드미컬한 쿵쿵 소리를 이것보다 더 잘 표현할 수는 없다. 그녀의 남편은 의외로 발소리가 조용하다. 함께 살기로 작정한 사람이라 전혀 시끄럽지 않은 걸까?
 귀마개를 껴도 육중한 그녀의 발망치는 내 집  바닥까지 다 울리는 진동으로 나를 깜짝깜짝 놀라게 한다. 이런 울림이 강한 소리에 잠을 깨면 온 몸의 신경이 놀라 좀처럼 진정되지 않는다. 또 언제 다시 큰 소리에 놀라게 될까 조마조마하며 지레 겁먹은 온갖 감각들이 나를 진정시키지 않는 것이다. 이 순간 언제나 심장은 100m 달리기를 막 끝낸 것처럼 날뛴다.


 자, 한번 상상해 보라.

12시, 1시 반, 2시 반 3시 혹은 4시

여러 차례로 위층 여자는 쿵쿵거리는 발망치 소리를 내며 화장실로 뛰어간다. 임산부라 화장실을 자주 가야 한다. 어쩔 수 없다. 그녀 또한 임신의 고통으로 잠을 못 이루고 있으니.

 그렇게 그녀의 임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가 매일 밤 이렇게 잠을 설친다.  나는 진심으로 그녀의 아이가 태어나는 것이 두렵다. 내 집은 공동육아 존이 되겠지 그치?

 아직도 위층은 실내화를 신거나, 러그를 깔거나 하는 등의 책임을 이행하지 않는다.  더 이상 배려라는 말로 충분하지 않다. 장문의 두 차례 민원과 2번의 부탁 후, 이것은 하나의 책임이 된 것이다.

 층간소음이 그대로 내게 전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남편에게 애교를 부리며 어린아이처럼 발을 동동 구르는 용기, 이 작은 6평의 공간에서 무거운 몸을 이끌고 뛰어다니는 무책임함, 어떤 아기의 엄마가 될 성스러운 그녀의 존재는 나에게 리드미컬 썅년으로 전락했다.  1401호 남자와 동맹이라도 맺을 수 있으면 좋겠다. 똑같이 한 번 지랄해 보고 싶어서. 장문의 편지로 1401호 남자에게 호소해볼까. 제발 하루만 집을 바꿔 달라고. 제발 단 하루 아니 반나절이라도.



 

 휴일을 앞둔 전 날도 자려다 수차례 깼다. 아, 막 잠들 수 있었는데.

새벽 4시쯤 그녀가 수 차례 요의를 비우고 잠들자, 나도 잠에 들 수 있었다. 다음 날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도 나는 깨어나지 못했다.


-쿵쾅쿵쾅쿵쾅쿵쾅쾅-

 니년이 사람 새끼냐.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이다. 오후 4시 까르르 웃으며 그녀가 어린아이들이 무언가를 조를 때 그렇게 하듯 발을 굴렀다.

그래, 이 씨발년아, 나도 잠은 충분히 잔 것 같다.

 인간이라면 수치심을  미안함을 알아야 한다. 듣기 싫다는 듯 더 이상 말하지 말라는 듯 웃음을 지으며 조심할게요로 끝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당신이 인간이라는 증명을 하기 위해서는 듣기 싫은 소리를 듣지 않을 최소한의 노력이란 걸 해야 한다.

 

 모든 인간은 매 순간 스스로가 인간의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아이가 함께 자라는 아파트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이며, 아이가 집안에서 뛸 때 부모가 주의를 주는 것이다. 한 밤 중에 세탁기를 돌리지 않거나, 너무 이른 휴일 아침 청소기를 돌리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이 내가 헛되지 않은 인간이라는 증명이다.

 한 순간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기분이 언짢더라도, 최소한 나의 행동을 되돌아보는 것. 그 사람이 되어 나를 객관적인 시선으로 경험해 보는 것. 우리는 그런 것들을 이미 깨우쳤다.

 적어도 나는.




 아이가 태어나면 달라질 것이다.

자신들의 사랑스러운 아기를 깨우지 않기 위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발 뒤꿈치를 들고 사뿐사뿐 걸을 것이다.  혹은 좀 더 넓은 공간으로의 이사를 결정할지도 모른다.


그들이 좋은 부모가 되길 바란다.

발뒤꿈치로 걷지 말라고 가르치고 집에서 뛰지 말라고 가르치는, 배려심 있는 아이를 키우길 바란다.


또한 아이에게 필요한 공간과 아이를 키우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줄 수 있는 형편이길 바란다.


바닥에 층간소음 매트를 깔아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를 배우길 바란다.


내가 조금 무뎌지길 바란다.

딱 70여 년을 살아온 충만한 사람만큼 나무껍질처럼 단단하고 무뎌져 모든 면에서 여유로워지길 바란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순진한 나의 헛된 희망이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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