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누나가 가지고 있던 카세트테이프들을 호기심에 둘러보다가, 한 테이프의 표지를 보고선 너무 놀라고 무서운 바람에 휴지통에다가 버려버린 적이 있었다. 나는 당시 기껏해야 초등학교 2-3학년 밖에 안 된 어리고 연약한 어린이였고, 나보다 6살이나 더 많았던 누나는 이 기분으로 동생을 패면 죽겠다는 생각이라도 들었는지, 평소 성격과는 달리 욕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방에서 쫓아내는 것으로 봐주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누나 물건을 버린 다음에 고작 방에서 쫓겨나는 것으로 끝났다는 안도감보다는, 카세트테이프의 표지 그림에서 느낀 충격과 공포의 여운에 더 크게 영향받았다. 며칠간은 악몽도 꾸고, 누나가 나를 쫓아내며 카세트를 다시 넣어둔 2번째 서랍을 마치 마녀의 저주받은 책장처럼 기피하게 됐다. 징그러운 괴물들이 그려져 있던 표지 그림을 더 이상 무서워하지 않고 다시 마주할 수 있을 때까지는 몇 년이 걸렸다.
비록 이후로도 누나의 카세트테이프를 직접 돌려보진 못했지만, 지그재그로 접힌 채 카세트 케이스의 안쪽 면에 들어가 있던 그 작고 혐오스러운 앨범커버는 각인처럼 머릿속에 남아, 훗날 그 앨범이 누구의 어떤 앨범이었는지 기억해 내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중학생이 되어 패닉의 노래들 중 ‘어릿광대의 세 아들들에 대하여’라는 노래를 인터넷으로 다운받아 듣는 중에 익숙한 커버아트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 앨범의 정체는 패닉의 2집 ‘밑’. 이 앨범은 충혈된 눈을 번뜩이는 상어 이빨의 개, 피 흘리는 낫을 든 저승사자, 눈이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는 약간 맛이 간 어릿광대 등이 낙서처럼 빼곡하게 그려져 있다.
당연하게도 그 앨범커버의 내용만큼이나 앨범에 담긴 곡들 또한 하나하나 전부 기분 나쁘고, 우울하고, 파격적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사실은 내가 그 소름끼치고 우울한 정서의 노래들을 직접 찾아서 들었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에는 ‘처키의 인형’이라는 공포영화를 보고는 너무 무서워서 방으로 도망쳐 들어가 문을 잠그고, 이불을 머리 위까지 덮은 채로 와들와들 떨었을 만큼 겁이 많았다. 친구들보다 웃자란 키 때문에 이미 초등학교 1학년 때 120cm의 키 제한이 있는 88 열차를 탈 수 있었던 나였지만, 역시 터울이 많은 누나와 문화컨텐츠를 공유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매주 비디오테이프를 빌려와서 영화를 보곤 했는데, 부모님도 누나도 굳이 어린 나를 배려해서 영화의 연령대를 선택하는 배려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다 보니 난 또래 친구들에 비해서 여러모로 ‘세대착오’적인 문화를 향유하게 되었다. 내 세대보다는 부모님 세대에 가까운 컨텐츠들은 내 나이에 비해서는 무섭고, 폭력적이며, 자극적이면서도 동시에 힙하게 느껴졌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공포와 불안은 어느새 익숙해졌고, 내가 스스로 관련 컨텐츠를 찾는 지경에 이르렀다.
누난 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되면서 밴드부 부장을 맡았다. 애초에 밴드부에 들어가기 전부터 HOT보다는 서태지의 팬이었고, 최애 밴드가 자우림이었던 누나가, 이제는 태평양을 건너서 넘어온 거친 메탈 음악들을 듣기 시작했다. 마를린 맨슨, 림프비즈킷, 메탈리카 등 빠른 템포와 거친 노이즈, 성대를 긁는 그로울링이라는 발성까지, 파격에 파격을 더한 사운드는 자극에 익숙해진 나를 손쉽게 홀렸고,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미 난 '중2병' 힙스터가 되어버렸다.
중학생이 된 나는 일반적인 또래처럼 부모님께 대들거나 반항하는 선택지 대신에 나만의 세계를 남들보다 더 강화하는 데 힘을 썼다. 애초에 부모님 이전에 누나한테 대드는 것부터가 성립이 안 됐고(누나는 키도 크고, 공부도 잘했는데 성격까지 무서워서 까불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당시의 내 학교생활이 많이, 아주 많이 안 좋았기 때문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들한테 놀림을 많이 당하는 편이었는데, 그때도 왕따를 당한 적이 있긴 했으나, 이후 반 배정이 나쁘지 않게 되면서 왕따를 탈출 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중학교로 올라가면서 재수 없게도 노는 애들이랑 엮여버린 거다. 원래부터 게임과 만화를 좋아하고 독특한 노래(그 나이대 애들에게 대중가요가 아니면 다 독특한 노래다)를 듣던 나 같은 아이들은 오타쿠 혹은 찐따 부류에 속했는데, 덩치에 비해 성격이 소심했던 나는 그들에게 아주 좋은 먹잇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중학교 1학년, 동급생과 시비가 붙었다. 나는 싸움이 싫어 계속 방어만 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밀치려고 손을 뻗었는데, 순간 지나가던 선생님한테 걸렸다. 선생님은 덩치 큰 애가 왜 작은 애를 패냐며 나를 혼냈다. 중학교 2학년, 내 인생 첫 롤링 페이퍼는 일진 여자아이들의 손에 넘어가자, 낙서와 욕설로 도배된 뒤 바닥에 떨어져 밟힌 뒤에 찢어졌다. 일진 남자애들은 내 덩치를 경계했지만, 일진 여자애들은 본인들이 맞을 리는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집요하게 나를 괴롭혔다. 중학교 3학년, 체육대회를 위해 2인 3각을 연습하던 중에 얼굴도 모르는 옆 반 아이들이 발을 묶을 띠를 훔쳐 갔다. 그 띠를 훔쳐 갔던 녀석은, 물건을 돌려받기 위해 찾아온 나를 보면서 ‘너 오타쿠지?’라고 말하며 비웃으며 띠를 던졌다. 내가 웬만해서는 폭력보다 참는 것을 선택한다는 사실을 알고, 대놓고 무시한 거다.
이런 일들을 겪다 보니 난 더 이상 친구들과 교류를 할 수가 없었다. 친구들과 함께 노래방을 간다거나, 축구를 한다거나, 오락실을 놀러 간다거나 하는 것들은 전부 내 기준에서는 사치스러운 행위였다. ‘친구’라는 준비물이 없었으니까. 그럴 바에는 내 얘기를 친구 대신 공감해 줄 문화컨텐츠가 필요했다.
그래서 난 점점 더 게임과 소설책, 만화와 노래에 빠져들었다. ‘싸이월드 흑역사 모음집’이라는 인터넷 유머 게시글을 본 사람들이 있는가? 당시에 누군가가 ‘음악은 나라에서 허락한 유일한 마약’이라고 써 놓은 게시물이 있었는데, 그 글에 적은 문구가 내 마음과 비슷했다. 친구들과 공감대를 만들 수 없고, 배척당하기만 하던 내게 있어서는 정말로 음악이라는 마약이 없이는 삶을 즐길 방법이 없었다.
친구들과 동떨어진 생활을 하다 보니 아무래도 음악 취향도 점점 완고해져갔다. 마치 갈라파고스섬에 있는 동물들이 대륙에 있는 같은 종의 동물들과 다른 특질을 가지듯이 말이다.
애초에 락과 메탈부터가 대중적인 장르가 아닐진대, 나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더 과장되고 징그럽고 기괴한 음악들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패닉의 ‘밑’ 앨범에 빠져든 것도 이때였다. 당시에야 MP3 파일을 받아서 음악을 듣는 것이 일반화되던 시절인지라 내가 듣는 곡의 앨범 표지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기에 인지하지 못했지만, ‘어릿광대’, ‘UFO’, ‘냄새’ 등의 곡들은 나중에 알고 보니 모두 같은 앨범의 곡이었다. 내가 어릴 적 누나 방에서 표지를 보고 벌벌 떨었던 그 앨범 말이다.
게다가 난 밑 앨범뿐만 아니라, 자우림의 ‘새’라던가 ‘파애’, 마를린맨슨 버전의 ‘Sweet Dreams’나 나인인치네일스의 ‘Closer’ 처럼 뒤틀리고 음습한 감성의 노래들도 자주 들었다. 어디다가 ‘나 이런 음악 듣는다’고 대놓고 자랑할 수 없는 곡들만 골라 들었던 거다.
당시 내 또래들이 주로 듣는 곡은 버즈의 ‘가시’ 그리고 SG워너비나 박효신 등의 가수가 부른 이름 모를 발라드 종류였던 걸 생각해 보면 정말로 동떨어진 취향이었다. 하지만 친구들이 듣는 사랑 노래들에서는 내가 공감할 수 없는 다른 세계의 얘기들만 나오니까 기만당하는 기분이 들어서 듣기 싫었다. 연애를 해 본 적 없는 내게 절절한 사랑 얘기는 완전히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애초에 친구도 제대로 못 사귀던 당시의 내가 연인과의 사랑을 어떻게 떠올릴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나는 점점 더 내 음악 세계를 대중과는 멀리 떨어진 쪽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정말이지 최소한의 공감대도 남지 않을 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버렸다. 원래는 육지생물인 이구아나가 갈라파고스에서는 바다에서 해조류를 뜯어 먹듯이 말이다.
그 당시 내가 즐겨듣던 노래의 가사들을 되짚어 보면, 내 당시 상황과 닿아있는 면이 꽤 많았다.
패닉의 ‘밑’ 앨범의 곡들은 특히나 그 무시무시한 소재와 멜로디랑은 달리 내가 처한 상황을 너무나도 잘 대변하고 어루만져주는 곡들이었다. ‘어릿광대’라는 노래에서는 집단이 한 개인을 따돌리고 괴롭힐 때의 공포스러운 순간이 잘 묘사되어 있었고, ‘그 어릿광대의 세 아들들에 대하여’라는 노래에서는 그 괴롭힘에 고통받은 사람이 품게 되는 복수심과 증오가 드러났으며, ‘UFO’에선 죄 없고, 힘없이 핍박받는 사람들을 외계인처럼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와서 구원해 주길 바라는듯한 가사가 절박한 내 심정을 대변 해주는 듯했다.
게다가 패닉의 노래와 함께 자주 듣던 자우림의 곡들 중에는, 자살한 여학생의 심정에 이입해서 만들어진 ‘낙화’와 저주의 말들이 가득 담긴 ‘새’가 있었다. 그 곡들은 비록 그 당시의 나조차도 너무나도 무겁고 힘들어서 자주 듣지 못했지만, 어찌 보면 당시의 내 심정과 가장 깊고 무겁게 닿아있는 곡들이었다.
정말이지 지금 와서 하나하나 꼽아봐도 전부 우울하고 불쾌한 감성을 담은 곡들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당시에는 어떠한 감미로운 발라드보다도 내 심정을 어루만져주었다. 평화로운 멜로디와 가사, 느리고 차분한 그런 분위기에서 나오는 힐링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현 상황을 나 말고 누군가가 공감해 준다는 것에서 오는 그 안도감이 내가 이 곡들을 듣게 되는 이유였다.
물론 내가 지금까지도 그렇게 어둡고 우울한 곡만 듣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NO’라고 할 수 있겠다.
학창 시절의 트라우마가 미대 입시를 준비하면서 점점 아물어 가기도 했고, 대학 졸업 후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내 자존감을 어느 정도 회복하고 나니, 나를 방치했던 사회에 대한 분노도 많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사람들과 너무 멀어져 있던 내 취향을 교정하고, 우울한 기분에서 멀어지고자 과거에 듣던 우울한 노래들을 고의적으로 기피하기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발라드를 듣게 된 건 아니었지만, 대신 평범한 팝 음악 위주로 듣게 되긴 했다.
과거에 듣던 우울한 노래들은 분명 그 당시에는 내 마음을 안정시키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지만, 더러운 것을 닦아 낸 물티슈를 재활용할 수가 없듯이, 한 번 쓰고 버려야 할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이 노래들을 계속 듣다가는 밝은 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발목을 잡힐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언제까지고 ‘중2병’ 환자로 남아있을 수는 없으니 벗어나야겠다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생각해 봐도 내가 진정 이해받는 느낌이 드는 노래들은 여전히 우울한 감성이 담긴 곡들이다. 물론 요즘은 조금 더 대중적인 취향으로 변해서, 10cm의 ‘Fine thank and you?’라는 곡처럼 우울함과 기괴함은 조금 덜어내되 살짝 찌질하고 현실적인 감성으로 변했다. 특히나 그 노래 가사 중에 ‘너는 벌써 30평에 사는구나’라는 가사가 확 와닿았었다. 묘하게 찌질하고 열등감 느껴지는 그 가사가 뜬구름 잡는 절절한 사랑 얘기보다는 확실하게 살아있는 가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에서 나온 '눅눅한 비닐장판에 발바닥이 쩍하고 달라붙었다가 떨어진다’라는 가사도 비슷한 매력이 있었고 말이다. 어려운 시절 온갖 풍파를 겪으면서 힘든 순간들을 견뎌온 밴드만의 구질구질하면서도 현실적인 특유의 감성이 내 마음을 휘어잡는다.
나에게 있어 우울한 감성의 곡들은 물티슈처럼 내 마음을 한 번 닦고 역할을 다해 버려질 녀석들이 아니었다. 마치 나무처럼 내 부정적인 감정을 먹고 쑥쑥 자라나서 산소를 내뱉는 존재였던 거다.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내가 그때 패닉의 ‘밑’ 앨범을 본 것은 운명이라는 생각도 든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이 안 나지만, 내가 처음으로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던 때와 그 앨범을 본 날은 큰 차이가 나질 않는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내가 따돌림을 당하게 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보다는 타로카드로 점을 보듯이, 그저 미래를 보여주는 점괘의 역할을 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 뿐이다.
아무튼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무서워서 던져버렸던 카세트테이프에 담겼던 곡들 덕분에 어려운 시기를 견뎌낼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살면서 풍파를 겪지만, 사회 분위기상 그런 어려움을 대놓고 언급하는 것은 터부시된다. 굳이 불쾌한 말 꺼내서 뭐에 도움 되냐는 거다. 하지만 분명 당시의 나처럼 공감해 줄 사람이 없어서 허덕이던 어리고 가엾은 영혼들을 달래주기에는 선하고 뻔한 말보다는 비슷한 처지인 사람들이 내는 울부짖음이 훨씬 효과적일 때가 많다.
아무리 좋은 말, 옳은 말을 해도 내가 공감하고 따를 수 없다면 허공의 메아리일 뿐이다. 당장에 물에 빠져 죽을 것 같은 사람에게 구명용 튜브를 던지는 대신에 수영을 하려면 손과 발을 박자에 맞춰서 휘둘러야 물에 뜰 수 있다고 아무리 설명해 봤자 의미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어린 시절 내가 학교에서 마치 어릿광대처럼 사람들의 우스꽝스러운 장난감이 되었을 때, 이 노래를 들으면서 얼마나 눈물 흘렸는지 모른다.
거꾸로 매달린 광대가 춤을 춘다.
광대의 이마엔 표적이 그려 있다.
쏜살같이 지나가는 비둘기 한 마리가
뫼비우스의 곡선을 그의 머리 위에 수 놓고
반쯤 미친 그들이 돌을 들고 광대의 이마를 조준한다
거꾸로 매달린 광대는 더욱 급한 춤사위로 목숨을 구걸하고
격렬한 움직임에 그를 지탱하던 허약한 끈은 마침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끊어지고 만다
<패닉 - 어릿광대> 중에서.
비록 이 가사에서 내 암울한 상황을 해결할 어떠한 비책도 들을 순 없었지만, 그건 아이돌이나 발라드 가수들이 부르는 사랑 노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내가 공감할 수 없는 다른 세상의 얘기들보다는 차라리, 이게 훨씬 안도감을 주었다. 난 친구들 앞에서 그저 거꾸로 매달린 어릿광대였고, 어떻게든 반 친구들이 던지는 돌을 피하고 싶었지만, 학교 선생님들이 외면하는 순간 나를 구명해 줄 마지막 줄은 끊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난 이 노래가 음침하고 어두워도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어디에다가 하소연을 해도 이 심정을 공감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 앨범들은 당시에도 상당 부분의 가사를 검열당할 만큼 파격적이었고, 지금 시대에 와서도 당당하게 이런 노래를 듣는다고 말하기 부끄러울 정도의 과격함을 담고 있지만, 소외된 이의 절규를 노래의 형태로 빚어낸 아티스트들이 없었다면 내가 지금까지 잘 버텨낼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