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발레리나' 스포일러 리뷰

맥도날드에서 기대했던 빅맥의 맛 그대로

by 진하린

이 글은 스포일러 리뷰입니다. 아직 안 보신분은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요즘 영화 시장은 '작품'의 시대에서 '브랜드'의 시대로 넘어간 듯하다.


이제는 거장 감독의 파인다이닝을 맛보러 가는 것보다는, 익숙한 맛을 찾기 위해 프랜차이즈 식당에 방문하는 것처럼 유명 시리즈의 IP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브랜드 영화란 마치 맥도날드 같은 것이다. 어느 나라 어느 지점에 가도 빅맥은 빅맥이고, 관객은 그 일관된 맛을 기대한다. 특정 브랜드의 로고가 박힌 제품을 살 때처럼, 우리는 그 브랜드가 늘 보여주던 일관된 품질과 디자인을 원한다. 성공한 작품 하나를 중심으로 세계관을 공유하며 나뭇잎의 잎맥처럼 이야기를 확장해 나가는 전략은 팬에게는 추가적인 컨텐츠라는 즐거움을, 창작자에게는 안정적인 IP 확장의 기회를 준다.


하지만 이 전략에는 함정이 숨어있다. 마치 기업이 문어발식으로 사업을 확장하다 브랜드 가치가 희석되는 것처럼,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는 메인 영화 외에도 드라마시리즈까지 너무 많은 이야기를 강요하며 팬들에게 피로감을 안겼다. 그런 의미에서 '발레리나'는 브랜드 영화가 지켜야 할 '기본'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선택을 했다.


'존윅'의 스핀오프인 이 영화에 관객이 기대하는 것은 명확하다. 킬러들만의 규율이 지배하는, '경찰은 대체 뭐하나' 같은 현실적 의문이 끼어들 틈 없는 그들만의 무대.

그러면서도 무한 탄창을 난사하는 대신 실제 총기의 고증을 최대한 지키고, 화려함보다 처절함을 앞세운 현실적인 액션. 존윅 브랜드는 킬러들의 세계라는 판타지적 세계관과 현실적 물리법칙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관객의 몰입감을 해치는 의구심을 제거하는 담백함으로 성공했다.


그리고 '발레리나'는 이 브랜드가 약속하는 맛을 전해주는데 성공했다.






'발레리나'의 액션은 '여자 존윅'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제목만 보고 MCU '블랙 위도우'의 우아하고 아크로바틱한 전투를 기대했다면 아쉬울 수 있다. 주인공은 발레의 유연함을 전투에 녹여내기보다, 온몸에 상처를 입어가며 한 마리 상처 입은 늑대처럼 처절하게 싸운다.

다만 여성의 신체적 한계를 고려해 급소를 노리거나, 힘이 부족해 마무리하지 못한 적을 확인사살하는 디테일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오히려 키아누 리브스의 느리고 묵직했 액션에 비해 속도감이 붙어 둔한 느낌이 줄었고, '본 아이덴티티'식으로 주변 사물을 활용하는 전투가 강화되었다. 영화 초반, 임무를 마친 후 적의 시체에서 알뜰살뜰하게 무기를 챙기는 치밀한 모습은 훈련된 킬러의 준비성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08-12-2025-15.28.50.png 수류탄 파편은 그렇다치고 충격파는 괜찮을까 하는 걱정은 되었지만, 액션진행에 끊김이 없어서 의구심을 가질 새가 없었다.


이번 작품에서도 기믹(gimmick)을 활용한 창의적인 액션 시도는 여전히 돋보였다.

특히 무기상점의 총기 없는 전투가 인상적이다. 수류탄이 달린 가방 끈으로 적의 목을 조른 채 철제 테이블 너머로 뛰어넘거나, 철문을 방패 삼아 상대를 가두어 폭사시키는 장면은 ‘총기가 없는’ 제약을 독창적인 액션으로 승화시킨 좋은 예시다.

압권은 문 뒤의 적을 발견하자마자 수류탄을 던져 넣고 문을 닫아버리는 장면이다. 폭발로 적이 기댄 벽이 무너지며 새로운 통로가 생겨나고, 주인공은 망설임 없이 그 틈으로 나아가며 액션의 속도감을 그대로 이어간다. 이는 정해진 동선을 파괴하고 즉석에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주인공의 숙련된 전투 지능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08-12-2025-15.32.14.png
E2A8C0DF-B79D-407A-8605-2511D2C8ADA4.png
존윅4의 창의적인 탑뷰시퀀스는 이번에 화염방사기로 재활용되었다.


카메라 시점을 활용한 실험적인 연출 역시 '존윅'의 DNA를 충실히 계승한다. 존윅 4편에서 게임 '홍콩 매서커'를 연상시키며 호평받았던 '드래곤 브레스' 탑뷰(Top-view) 샷은, 이번 작품에서 화염방사기 씬으로 영리하게 재활용되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영화는 이 연출을 새로운 방식으로 변주한다. 임무를 마친 주인공이 차를 타고 떠나는 초반부, 카메라는 점점 항공 뷰로 멀어지다 갑자기 전속력으로 돌진해오는 차량을 비춘다. GTA2처럼 멀찍이서 내려다보는 시점에서 관객이 주인공보다 먼저 위험을 인지하게 만드는 이 영리한 연출은, 마치 롤러코스터가 정점에서 잠시 멈춰 다가올 낙하의 공포를 예고하듯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기존 팬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 또한 인상적이었다.

존윅 시리즈는 전작을 감상한 팬들이나 액션을 오래도록 좋아해온 관객들에게 늘 예우를 갖춰왔다. 존윅 4편에서 견자단이 절권도를 선보이고, '언디스퓨티드'의 스콧 앳킨스가 나와서 화려한 발차기를 선보였듯, 이번에는 초반부에 정두홍 무술감독이 등장해 특유의 '붕붕 날아다니는' 화려한 액션을 선보인다.

그 움직임이 존윅 시리즈의 톤과는 다소 어긋나지만, 적들의 다채로움을 살리면서도 기존 액션 영화 팬들에 대한 서비스 차원에서 충분히 매력적인 선택이었다.



08-12-2025-15.57.13.png 주인공을 죽이라는 임무를 받은 '세계관 최강자'. 그가 자비를 베풀지 않았더라면...


더 나아가 가장 중요한 팬 서비스는 존윅의 등장이다. 주인공과 존윅은 같은 암살자 양성 기관 '루스카 로마' 출신이고, 존윅 3편쯤에서 방문한 그와 주인공이 마주쳐서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저 그렇게 얼굴만 비추고 사라질 줄 알았던 존윅은, 규율을 어기고 복수를 선택한 주인공을 제거하기 위한 '최종보스'역할로 후반에 한 번 더 등장한다.


여기서 세계관 최강자인 그가 주인공을 진심으로 죽이려 들었다면 솔직히 '밸런스 붕괴' 논란이 일었을 것이다. 이브가 주인공이니 그녀를 함부로 죽일 수도 없고, 반대로 이브가 전설인 존윅과 대등하게 맞서 싸운다면 그 자체로 기존 팬들을 무시하는 것이 될 테니까.

하지만 영화는 그가 주인공에게 자비를 베푸는 방법으로 우회했다. 존윅은 주인공을 죽일 의사가 없음을 '지도 스파링'을 하듯 가볍게 제압하는 것으로 증명하며, 나중에는 아예 대놓고 주인공을 뒤에서 도와주며 저격까지 한다.


실제로도 극중에서 최강의 전투력에 비해서는 살짝 물렁한 인격을 보여주는 존윅의 캐릭터를 활용한 절묘한 노림수였다고 생각한다. 규율을 파괴하지 않는 선에서 주인공을 도와 복수를 성공할 수 있게 해주는 선배의 모습으로 팬서비스를 하는 그의 모습이 새삼 반갑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 부분은 언급할까 말까 하다가 추가로 적는 부분인데, 주인공이 여자이긴 하지만 사실 영화 내에서는 그가 여자라는게 전혀 중요하지 않게 느껴진다. 이 역시 개인적으로는 존윅 프랜차이즈다워서 좋다고 생각했던 부분이다.

어떤 이들은 주인공의 성별이 바뀐만큼 조금 더 여자답게 싸워야한다거나, 여성서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존윅세계관의 서사에는 성별이 끼어들 없는 것이 맞다고 본다. 서로 죽고 죽이는 킬러들의 세계관에서 그런 거 신경 쓰면 지는 거다.


그래서 주인공인 아나 데 아르마스의 동그랗고 상대적으로 카리스마가 부족해보이는 동안의 얼굴도 초반에는 신경쓰였으나, 나중으로 갈수록 별로 눈에 띄지 않게 되었다.

08-12-2025-16.00.10.png 동안의 얼굴은 카리스마가 부족한 편이지만, 그녀는 몸이나 얼굴을 아끼면서 연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관객은 점점 납득하게 된다.


왜냐면 극이 진행될수록 싸움은 점점 더 처절해지고, 주인공도 몸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싸움을 하든지 간에 깔끔하고 예쁘게 싸우는 씬은 단 하나도 없다.

아, 여기서 '예쁘게 싸우는 씬'이라고 하는 말에 덧붙이자면, 존윅시리즈의 전통적인 특징을 얘기한 것이기도 하다. 다른 할리우드 영화나 과거 중국 무협영화들을 떠올려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인공의 무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너무 완벽하게 합을 주고받다보니 상처하나 없이 싸워 이기는 장면이 연출 되어 긴장감이 식어버리는 작품들을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에 반해 발레리나는 존윅 프랜차이즈답게 주인공의 신체를 서슴없이 훼손한다. 이리저리 던지고, 굴리고, 찌른다. 정말이지 생존하기 위해 처절하게 사투하는 모습이 애처로울 지경이다.

아무리 잔챙이라 하더라도 상대방은 훈련된 킬러고, 상처하나 없이 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영화 내내 보여준다. 그리고 이 처절함과 잔혹함 덕분에 오히려 주인공의 부족한 카리스마가 매꿔지는 효과도 생긴다.


그리고, 아나 데 아르마스가 007에서 액션을 소화한적이 있는 배우라는 점도 꽤나 중요한 포인트로 작용한 것 같다. 실제로 이번 영화에 대해 비판적인 평가 중에서 주인공이 존윅에 비해서 너무 여리여리하다보니 몰입이 힘들다는 이야기들도 있었으나, 액션의 템포는 상당히 빠르고 좋은 편이다.

존윅에서 이브로 주인공의 성별과 체격이 바뀌었음에도, 작년에 나와서 비판받았던 더 마블스 같은 허우적대는 허접한 액션이 아니라 정말 템포있고 빠른 액션, 그리고 일말의 동정도 남기지 않는 전투기계의 모습을 잘 묘사해내서 시리즈 특유의 전투 몰입감을 그대로 살려냈다.

요즘 나오는 영화들 상당수는 배우들이 직접 스턴트 훈련을 하지 않으려는 문제 때문에 허접한 몸동작에 허접한 촬영방식으로 쓰레기같은 장면들을 많이 만든다. 일부러 관객을 속이기 위해 핸드헬드로 카메라를 어지럽게 흔들어서 부족한 모션감을 억지로 채운다거나, 혹은 그것조차 안해서 허우적대는 모습을 그대로 노출하는 사건도 생긴다.


그러나 이번 영화의 주연인 아나 데 아르마스는 6개월간 훈련해서 90% 분량의 액션을 직접 소화했다고 한다. 액션에 일가견 있는 존윅 제작진이 각잡고 배우를 훈련시켰다고 생각하면 이런완성도 높은 액션이 나오는 것이 사뭇 이해가 간다.


그나저나 사심이지만, 터미네이터 다크페이트에서 나왔던 맥켄지 데이비스가 언젠가 존윅 시리즈에 나와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큰 키와 근육질 몸매, 그리고 시원한 이목구비까지 생각하면 이런 영화에 참 어울리는 마스크인데... 다크페이트가 처절하게 망해서인지 액션을 더 이상 찍지 않고 있다.

5664E6F9-677E-4123-B0D7-9F09C4E71C6B.png 정말 액션배우로 대성하리라고 믿었는데, 아쉽다. 언젠가 존윅 프랜차이즈에 나와주길...





이 영화의 평론가 평점은 그리 높지 않다.

내가 팔로우하는 영화 유튜버들 중에서도 액션을 극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서사의 구멍을 흠잡는 리뷰도 존재한다. 서사의 깊이와 캐릭터의 설정 등에 대해서는 나도 할 말이 없다. 솔직히 구멍이 많고 아쉬운거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장르별로 다른 기준을 세워서 보는 사람이다. 로맨스 영화에서 액션을 기대하지 않고, 스릴러 영화에서 코미디의 품질을 논하지 않는다. 당연히 존윅에서는 액션이 최우선이다. 물론 그 독특한 세계관 자체에 흠뻑 빠져서 마치 무협처럼 엄격한 기준을 세우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안다.

실제로 무협영화들도 관무불가침(무림의 일을 공권력이 침범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보면 된다)이라는 룰을 세워서 그들만의 세계관을 만들었고, 역사가 오래되면서 정파와 사파, 그 외에 다양한 유파들과 고유용어들이 생겨났다. 그래서 무협을 보던 시선으로 존윅을 보게 된다면, 발레리나에서 나오는 몇가지 사소한 설정오류들이 눈에 들어올 수 밖에 없다.

무협쪽에서 설정오류를 범하게 되면 팬들의 집중포화를 맞을 걸 생각하면, 분명 설정이 중요한 팬의 시선에서 발레리나는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든 영화가 될 것이다. 빌런의 매력도도 좋은 편이 아니고 말이다.


다만 우리가 생각해봐야할 점은, '그러면 존윅 1편은 설정이 치밀했나?'라는 거다. 사실 그냥 존윅이 사람을 죽이기 위한 구실로 마피아가 강아지를 죽였고, 그 죄로 몰살당했을 뿐이다.

물론 그 때도 호텔이 있고, 킬러들의 룰이 있긴 했으나, 사실 그건 중요하지도 않았다. 흥행에 실패했으면 그대로 사라졌을 내용들이니까.

오히려 이후에 나온 2편과 3편에서 세계관 확장을 하면서 무협처럼 '최고회의'같은 고유의 세력이 자리를 잡고, 장로라는 1편에서는 언급되지도 않은 부가 설정들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핵심은 아직 '액션'이지, 치밀한 설정이 아니라는 거다.


적어도 발레리나는 '고민할 시간에 한 명을 더 죽인다'는 존윅의 철학을 온몸으로 실천한다. 주인공이 여자라고 해서 감상적으로 변하지도 않았다. 성별만 바뀌었을 뿐, 불필요한 감정의 군더더기를 걷어낸 킬러의 담백함은 그대로다.



그런 면에서 나는 발레리나라는 작품이 꽤나 존윅 프랜차이즈의 맛을 잘 살려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밀도있게 꾹꾹 눌러담은 고봉밥 액션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은 지금이라도 당장 극장을 가보길 바란다. 흥행에는 실패했는지 상영관이 몇 개 안 남았거든...

keyword
작가의 이전글눈치문화 정말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