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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에 미친 세상

거짓 공감과 패션 우울증에 대하여

by 진하린


1. 거짓 공감에 대해서.


대략 10여년 전에 아직 페이스북이 인기가 있던 시절, 수많은 공감 시리즈들이 있었다. 물론 요즘도 MBTI로 그룹을 나누어 공감대를 공유하지만...


그 당시에 내가 봤던 공감 시리즈중에 가장 눈에 들어왔던 것은 ‘왼손잡이 공감’이었다. 난 평생을 왼손잡이로 살아왔다보니 자연스레 해당 주제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왼손잡이라고 차별도 받아봤고, 도구를 사용할 때 불편함도 겪어보고, 사회생활할 때 손끼리 부딪히지 않도록 조심도 해본 입장에서, 나와 같은 공감대를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이 반갑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당 게시물에 있던 ‘단 한장’의 사진으로 인해서 공감대는 와르르 무너지게 되었다. 그 내용은 ‘왼손잡이는 그림 그릴 때 손날에 흑연과 수채화 물감이 묻어서 불편하다’였다. 디테일을 모르는 사람들은 의아할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림을 그리는 행위에는 왼손과 오른손의 구분이 없다. 굳이 글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릴 필요가 없으니까. 그야말로 억지 공감을 위해서 무리수를 던진 ‘가짜’의 게시물이었던 거다.


앞서 얘기한 왼손잡이 공감 게시물에 달린 베스트 댓글은 ‘나 미대생인데 왼손잡이라 물감이랑 흑연 엄청 묻어서 종이 더러워지고 난리났었음 ㅋㅋ’라는 내용이었는데 수 백개가 넘는 좋아요를 받았었다. 순간 어이가 없어 ‘그림 그릴 때는 왼손이든 오른손이든 원래 다 묻어요’라는 대댓글을 쓰다가, 분위기 파악 못하고 팩트만 얘기하는 ‘찐따’ 취급 받을까봐 지우고 말았다.

왼손잡이인데다가 미대까지 나온 내 입장에서는 거짓부렁으로 점철된 글이 그렇게 많은 공감을 받는 것을 보며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2. 우울증까지 관심끌기의 소재가 되는 걸까?



사회적인 동물인 사람의 특성상 누군가에게 공감을 받고,
공감해주는건 참 중요한 요소긴 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관심을 너무 받고 싶은 나머지 거짓 공감을 하는 모습을 보면 다소 병적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특히 과거에는 없었던 일명 ‘패션 우울증 환자’들의 등장이 병적인 공감유도의 가장 나쁜 사례라고 생각한다.



대략 10~15년 전만 해도 우울증은 정신적으로 나약한 사람들이나 겪는다고 생각했고, 치료해야하는 질병으로 보는 사람도 많이 없었기에 ‘나 우울증이에요’라고 말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었다. 정신이 이상하고 나약한 사람 취급 받는 것이 두려웠으니까. 나도 과거에 극심한 우울증을 겪어서 생을 포기하려던 적이 있었으나, 사회의 인식 때문에 타인에게 알리지도 못하고 꾹꾹 눌러참으면서 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우울증이라는 질환을 결코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다. 난 현재의 삶을 2번째 기회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고, 이걸 가벼운 농담거리로 여기고 싶지 않다.

그러나 요즘은 사람들의 인식이 개선되면서 우울증을 병으로 인정해주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했고, 정신과 의사들도 적극적으로 위해 힘을 쓰고 있기 때문에 위로의 시선과 관심의 시선이 많이 늘어났다. 그러다보니 우울증을 조기에 발견하고 치료를 받는 긍정적인 사례가 많이 늘었으나, 반대로 우울증을 특별한 ‘특성’이나 ‘개성’쯤으로 생각하고, 이걸 활용해서 사람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받으려는 ‘패션 우울증 환자’들도 함께 생겨나버렸다.


‘나 정신적으로 아프니까 건들지마’라던가, ‘난 우울증이 있어서 가끔 오락가락하니까 여러분이 이해해요’라던가, 본인의 문제를 가지고 마치 협박처럼 휘두르는 사람도 생겼고, 매일같이 하소연 글을 올리면서 오늘 죽을래, 내일 죽을까 떠드는 글로 공감 및 위로 댓글을 받느라 취해있는 패션 우울증 환자들의 모습을 보자면, 마치 과거에 결핵에 걸리고 싶어서 안달났던 빅토리아 시대의 상류층이 떠오른다. 단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고 싶어서 결핵에 걸렸던 멍청이들 말이다.

낭만주의가 팽배했던 19세기 유럽, 특히 빅토리아 시대에는 창백하고 병약한 모습이 미의 기준으로 여겨지는 기이한 유행이 있었다. 알렉상드르 뒤마의 『동백꽃 여인』, 그 작품을 원작으로 한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등에서는 결핵으로 서서히 죽어가는 비련의 주인공을 숭고하고 아름답게 그렸으며, 단테 가브리엘 로세타의 『축복받은 베아트리체』라는 작품에서는 라우다눔 중독으로 죽어가는 아내를 고통스러운 환자의 모습이 아닌 초월적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로 승화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작품들에 매료된 일부 상류층은 그 주인공처럼 보이고 싶어 창백한 피부를 연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식사를 거르거나, 독성 물질인 비소를 섭취하거나, 결핵에 걸리려고 일부러 환자와 접촉했다. 비련의 주인공이 되어 사람들의 동정과 관심을 한 몸에 받고자 일부러 스스로를 훼손하기까지 하는 모습은 지금의 ‘패션 우울증 환자'들과 소름돋게 유사하다.

질병의 본질적인 고통은 외면한 채,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만을 소비하며 동경했던 그들의 어리석음이 오늘날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 같아 참 씁쓸한 기분이 든다.








3. 도둑맞은 가난에서 도둑맞은 우울증까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영국부터 지금의 온라인까지, 이런 사람들이 계속 생겨난다는 것은 결국 앞서 말한 모든 사례들처럼 공감과 관심에 목이 말라서가 아닌가 싶다.

그 방법이 다들 하나씩 잘못 되어있지만, 벗어나기 힘든 인간의 본성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사례들이기도 하고 말이다. 왼손잡이가 아닌데도 왼손잡이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서 가짜 사례를 지어낸 페이스북 게시물이든, 우울증 환자들이 받는 공감과 위로를 가로채고 싶어서 열연을 펼치는 패션 우울증 환자든, 모두들 공감에 목이 말라있다.

사회적인 동물이라는 저주를 받고 태어나서 어떻게든 남들에게 자신을 어필하려는 모습이 자못 처량하기까지 하다.


물론 여기서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나는 본인이 돋보이고 싶어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 힙스터처럼 구는 것 자체에 대해서 뭐라고 하려는 것은 아니다. 분명 관심은 돈이 된다. 요즘은 SNS 등에서 인기몰이를 하면 ‘인플루언서’라고 불리면서 그 자체로 직업으로 인정받는 세상이니까, 그야말로 힙스터가 직업이 되는 세상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남들의 고통을 자신의 훈장으로 삼으려는 '선을 넘는' 시도만큼은 아무리 관심에 눈이 멀어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라는 거다.


과거 박완서 작가의 『도둑맞은 가난』이라는 작품의 제목처럼 이제는 ‘도둑맞은 우울증’이라는 단어도 쓰여야하나 싶다.

이 질병은 ‘살면서 누구나 해봄직한 성장의 경험’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잔혹하고 힘들다. 고통받는 이들의 경험을 마치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풍부하게 만들기 위한 레주메 정도로 생각하고 연기를 하는 사람들은 그 행동이 얼마나 해악을 끼치는지 모르겠지만, 거짓 공감을 유도하는 행위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이 생겨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 항상 고려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진짜들이 받아야할 관심과 공감을 패션우울증 환자가 가로채가면, 가짜가 받는 관심의 양만큼이나, 진짜들이 받아야할 관심의 양은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관심의 총량은 한정되어 있으니 되도록이면 올바른 곳에 관심이 향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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