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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입장정리 Jan 25. 2023

영화 '엑시트' 감상문


설날 연휴, 본가에 다녀오는 길에 영화를 보기로 마음먹었다.


지하철 타고 왕복 두시간 반이 걸리는데, 그냥 가면 지루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출발 전에 넷플릭스를 뒤져보다가 엑시트라는 영화를 발견했다. 언젠가 봐야지 생각하고 지나친 영화들 중 하나였기에 바로 저장을 했다. 이런 영화가 좀 애매한 것이, 따로 시간 내서 보기는 뭐한데 막상 ktx를 타거나 시간이 비어서 영화를 좀 보고 싶을 때는 그때 생각했던 영화가 뭐였는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 아무래도 시간이 빌 때 볼 영화들의 목록을 만들어 두어야겠다.



지하철에 타서 자리에 앉자마자 아이패드를 꺼내 시청을 시작했다. 엑시트는 조정석과 윤아가 주연인 재난 영화로, 서울 한복판에서 가스 테러가 발생한 후 벌어지는 상황을 다룬다. 두 주인공은 사회적으로 딱히 별볼일이 없으나 한때 클라이밍 동호회에 몸담았던 경력이 있다. 그때 습득한 능력을 통해 건물 벽을 타고 움직이면서 가스로부터 도망다니고, 사람들을 구하고, 결국에는 살아남는 이야기다. 재난영화이지만 쓸데없는 신파라든가, 뜬금없는 로맨스가 없는 대신 액션과 유머를 잘 섞어서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고 제법 볼만했다.


영화의 주된 빌런은 가스인데, 하얗고 뭉게뭉게 피어나는 것이 꼭 훈련소 화생방실에서 봤던 cs가스와 닮았다. 훈련 도중 정화통을 빼고 그걸 들이마셨던 때가 생각난다. cs가스를 들이마시면 마치 폐를 참빗으로 긁어내리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고, 눈과 코와 입에서 액체들이 의사와 무관하게 줄줄 흘러내린다. 가스를 마시고 고통스러워 하는 조연들을 보니 당시의 기억이 떠올라 인물들의 연기에 가슴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작중 가스는 우선 땅에 깔린 다음 점점 올라오는 성질을 지녔다. 그래서 인물들은 1층으로 내려가면 안 되고 점점 높은 곳으로, 그리고 건물에서 건물 사이를 로프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보다 보면 초등학교 때 하던 용암 놀이가 떠오른다. 바닥을 용암으로 상정하고 의자, 책상에서만 이동하는 놀이 말이다. 학교 점심시간에 교실에서 신나게 용암 놀이를 하다가 자빠져 팔이나 코를 분질러먹는 애들이 상당히 많았다. 어쩌면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이런 재난을 대비하는 고강도 훈련을 하고 있던 셈일지도 모르겠다.


영화에서 가장 긴박한 장면은 조정석이 스파이더맨처럼 외벽을 타고 옥상에 오르는 씬이다. 그때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궁금했는지 흘깃흘깃 내 화면을 훔쳐보았다. 안타깝게도 나는 환승을 해야 하는 입장이라 일어섰는데 그 아저씨의 표정이 꽤나 아쉽고 섭섭해 보였다. 아무튼 그 씬을 보고 나면 지금 당장 클라이밍을 해야 할 것 같은 충동이 밀려온다. 클라이밍을 못하면 재난 시 cs가스에 잡아먹혀 고통스럽게 죽을 것만 같은 강박이 생긴다. 그래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황급히 빨래건조대로 사용하고 있던 턱걸이 봉을 이용하여 턱걸이를 시작했다. 10개를 미처 하지 못하고 고꾸라졌다. 하루종일 앉아서 일을 하느라 앙상해진 팔과 불룩 나온 배를 보고 한탄했다. 앞으로 열심히 팔굽혀펴기부터 시작해야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그 외에도 긴박한 장면들이 많은데, 잘 보다 보면 긴급 상황에서의 대처 방법들을 알 수 있다. 개중 담요와 마대자루를 이용해 들것 만드는 장면이 인상깊었다. 꿩 대신 닭으로 필요한 것을 만드는 프론티어 정신... 문득 생각해보니 나에게 재난에 대처할 능력이 전무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년 예비군에서 로프 묶는 방법, cpr 방법 등을 배웠지만 예비군 퇴소와 동시에 기억은 냇물에 담근 솜사탕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만약 영화 속 상황에 내가 있었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 보았다. 나는 위기 상황에서 침착한 편이지만, 대비할 만한 지식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침착한 상태로 죽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간단한 재난 시 대피 요령을 찾아보기 위해 검색창을 켰다. 로프 묶는 법, 소화기 쓰는 법 등 지식의 바다에서 유익한 정보를 찾아 헤엄치다 보니 몇 시간 후에는 핵폭발 시 대처방법, 좀비 사태 시 살아남는 방법까지 능통하게 되었다. 이제 재난 시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 있는 방구석 베어그릴스가 되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해졌다. 다시 한 번 턱걸이를 해 보았다. 이번엔 4개가 한계였다.


엑시트에서는 재난 영화다 보니 몸을 쓰는 씬들이 많았는데, 지하철에서 편히 앉아 구경하는 사람이 봐도 대단히 힘들어 보였다. 옥상 위를 전력질주하고, 벽을 타고 뛰고 매달리고 다시 뛰고 기는 등 감독이 주연들이랑 사이가 틀어졌나 걱정될 정도로 제대로 굴렸다. 영화 특성상 한번 찍었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여러 각도에서 각종 테이크로 찍었을 것을 생각해 보면 영화배우도 쉽게 하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감독도 헥헥거리는 주연 배우들의 몰골을 보면 쉽게 NG사인을 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흥행이 잘 되었다니 두 주연 배우에게는 다행인 일이다. 개처럼 뛰고 고생했는데 쪽박을 차면 영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므로.


정리하자면, 엑시트는 손에 땀을 쥐는 긴박한 영화였기 때문에 다한증에 걸린 사람마냥 손이 흥건해졌지만, 덕분에 수월하게 집에 다녀왔으며, 재난 시 대피요령까지 습득했다. 흥행에도 성공했으니 아마 감독과 주연들도 행복했을 것이다. 따라서 엑시트는 모두에게 좋았던 영화인 것으로 마무리짓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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