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썬크림을 싫어했다.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 날이나 소풍 날이면 엄마는 항상 나에게 썬크림을 바르게 했다. 썬크림의 질감은 찐득찐득하고 갑갑했다. 그러나 엄마는 나의 의견을 묵살한 채, 썬크림은 많이 발라야 한다며 용기를 듬뿍 짜낸 다음 얼굴에 반죽하듯 문질렀다. 다 바르고 나면 나의 얼굴은 흡사 주온에 나오는 귀신처럼 허여멀건해졌고, 피부 위에 미끄럽고 진득한 것이 잔뜩 범벅된 느낌을 받았다. 그 끔찍한 느낌에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볼기짝을 얻어맞기 싫었기에 가까스로 참아내었다. 갑갑하다는 이유로 로션을 바르는 것조차 싫어했던 나에게 썬크림은 형벌이었다.
이런 성향 탓에 소풍이나 운동회 따위에 엄마가 신경쓰지 않는 중학교 때부터는 전혀 썬크림을 바르지 않았다. 이는 내가 다닌 남중의 문화와도 관련이 깊었는데, 남중의 거친 사내들은 썬크림 따위는 전혀 알지 못했고 썬크림 이야기를 하면 그저 웬 생크림 이야기냐는 동문서답만 돌아왔다. 만약 태양의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썬크림을 바르는 학우가 있다면 즉시 그를 화장품 바르는 게이로 취급하며 흉을 보았다.
그렇게 나의 썬크림 기피는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교까지 이어졌다. 이런 생각이 180도 바뀐 것은 군대에서였다. 군대에는 다양한 직업 군인들이 있었고, 그들 중 다수를 차지하는 부사관들은 대개 야외에서 낫을 들고 잡초를 베거나 병사들을 데리고 작업을 했다. 그들 중 몇몇은 주로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으며 태양에 그을린 피부는 검고 주름졌다. 나는 그들의 액면가를 보고 최소 40대일 것이라고 짐작하였다. 개중에는 넉넉하게 40대 후반까지 바라볼 만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커피를 마시다 우연히 그들의 나이를 들을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40대 후반도, 중반도, 초반도, 30대 후반도 아닌 , 30대 초~중반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사회에서 갖고 있던 나이 관념이 박살나는 것을 느꼈고, 동시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때문에 내 표정은 뜨거운 커피에 혀를 덴 탓이라고 변명을 지껄여야만 했다.
그들은 마치 썬크림을 배척하던 남자 중학생들이 그대로 나이를 먹은 것 같았다. 그들은 선글라스와 챙 넓은 모자로 모든 자외선을 차단하려 했고, 올인원 스킨+로션을 제외한 무언가를 얼굴에 바른다면 즉시 여자아이 혹은 게이로 취급했다. 이와 달리 사무실에서 일하는 장교들이나 썬크림을 잘 바르는 부사관들의 얼굴은 본래 나이대로 보였다. 나는 그것을 보고 자외선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이대로 간다면 나 또한 얼마 안 있어 그들처럼 폭삭 늙을 것이라는 공포가 엄습했다. 벌벌 떨던 나는 휴가를 나가자마자 황급히 썬크림을 사서 발랐다. 얼굴에 썬크림을 범벅시키는 나의 손아귀에서 엄마의 손길이 느껴졌다. 다 바르자 마치 보호막을 쓴 것 같이 안전한 기분이 들었다. 만약 어쩌다 썬크림을 깜빡하고 밖으로 나온 날에는 흡사 햇빛에 노출된 뱀파이어마냥 비명을 내지르며 그늘속으로 숨어들었다.
썬크림의 중요성을 재차 체감한 것은 몇 년 후 제주도 여행에서였다. 2018년 여름, 2주일의 제주도 여행을 계획한 둘째 날, 나는 오전에 일어나 얼굴에 썬크림을 바르고 함덕의 바다로 나갔다. 처음에는 그냥 물만 구경하려 했으나, 함덕의 에메랄드빛 바다는 도저히 나를 참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자리에서 윗옷을 벗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바다에서의 물놀이는 즐거웠다. 하지만 간과한 것은 내가 얼굴에만 썬크림을 발랐다는 사실이다. 하나 더 간과한 것은 2018년 여름은 기록적인 폭염으로 유명했다는 점이다.
물놀이 이후 함께 놀던 친구는 숙소에 와서 찬물로 샤워를 한 다음 어깨와 등에 알로에를 바르니 마니 하면서 난리를 쳤다. 하지만 나는 상남자였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보고 껄껄 비웃으며 그저 찬물 샤워로 열을 식힐 뿐이었다. 어깨가 좀 뜨끈한 것 말고는 전혀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나는 호들갑을 떠는 친구를 질책하였다. 어리석게도 진짜 고통은 다음날에 찾아온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다음날의 일정은 서핑 강습이었는데, 서핑을 배우기 위해서는 검고 두꺼운 서퍼 슈트를 입어야 했다. 그때부터 어깨가 아프고 따가운 것이 영 예감이 좋지 않았으나, 어차피 바다 안에서 노는 것이기 때문에 더 나빠지지는 않겠거니 하였다. 예감을 무시하고 배운 서핑은 재미있었다. 내가 열심히 노는 사이 검고 두꺼운 서퍼 슈트는 뜨뜻한 물과 함께 한여름의 폭염을 내 등짝에 골고루 전달했다. 전날 직사광선에 의해 초벌구이가 된 어깨는 바닷물 속에서 중탕되어 잘 익은 수육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서핑 수업이 끝나고 슈트를 벗을 때 나는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깨는 시뻘개졌고 무언가 닿기라도 하면 새된 비명이 절로 터져나왔다. 나는 뒤늦게 알로에를 사서 어깨에 바르기 시작했지만, 이미 내 어깨는 미디움 웰던으로 골고루 익은 상태였다. 숙소에서 얼음찜질과 찬물사워를 반복하며 어깨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이미 구워진 소고기를 찬물에 담근다고 죽은 소가 살아나랴? 결국 고통에 몸부림치다 못한 나는 계획했던 여행을 모두 끝마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고, 허물을 벗는 뱀처럼 어깨 피부의 껍질을 모조리 벗겨내고 나서야 고통은 진정되었다.
그렇게 자외선 공격으로 여행까지 취소해버린 이후, 나는 자외선의 무서움을 다시금 실감하였고, 매일 꼬박꼬박 썬크림을 잘 바르고 있다. 물론 아직도 선크림을 바르는 것이 영 갑갑하고 꺼림칙하지만, 훌륭한 피부를 위해서 이정도쯤은 잘 참을 수 있는 상남자가 되었다. 탄력있는 피부와 노화 방지를 위해 모두 썬크림을 꼼꼼히 바르자. 다만 썬크림을 잘 지우기 위해서는 클렌징 오일이 필요하다고 하니 모두들 올리브영 세일때 클렌징 오일을 구비해 두는 것을 명심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