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생일이 1월 초인 덕분에 한해를 쭉 둘러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지난 일 년간은 규칙적이고 예상가능한 날들이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순조롭게만 흘러갔다는 뜻은 아니다. 생후돌이 지나자마자인 1월에는 니큐에서 해결하지 않고 나온 탈장수술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2박 3일 정도면 퇴원이라던 탈장수술은 15일간 입원을 하고서야 겨우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실시간으로 아이 상태가 나빠지고 있는 걸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마음이 요동쳤지만 중환자실로 안 보내는 걸 보면 이 정도는 일반적으로 아픈 수준이라는 걸로 위로 삼았다. 동시에 이렇게 계속 아프다고 울부짖는데도 일반병실 수준이면 신생아중환자실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그걸 옆에서 모두 보고 이해했다면 보호자가 먼저 실신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었다. 예상보다는 좀 오래 있게 되었지만 일반병실 수준정도로 끝날만큼 성장한 것이. 그리고 일반병실에서 여러 아이들을 만나보니 그동안 모든 걸 미숙아라서 생긴 일들이라고 연결 짓는 나의 시선이 조금 넓어졌다. 원인이 무엇이던 그 과정이 어땠던 결론은 나는 아픈 아이를 둔 부모일 뿐이다. 어떤 이유로 아프게 되었나는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들을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자료일 뿐이다. 같은 자료로 같은 결과가 나오지 않고, 같은 과거로 같은 미래가 오지 않는다. 이 생각은 내가 조산트라우마를 벗어나게 해 준 기회였다. 설령 내가 조산을 하지 않았다고 치자, 어차피 아기가 지금과 같은 상태라면 무엇이 다른가?
그 바로 다음에는 친정엄마의 암 오진사건이 있었는데, 무조건 4기 수준의 암이라는 의사말에 어찌어찌 사는 것부터 수술대 위에서 곧바로 죽는 것까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엄마와 머리를 맞대고 신변정리를 하는 몇 개월간의 기간이 있었다. 애는 아픈데 엄마까지 잃게 된 나는 앞으로 어떤 힘으로 살아가야 하지? 내가 모두의 생명을 빨아 당기고 있는 원흉인 건가? 별 생각을 다 하는 와중에, 애가 아플 때도 울고불고 안 한 모습이 아주 믿음직스럽고 마음에 든다며 엄마에게 신변정리 도우미로 지목당했다. 애를 아기띠로 매고 이 사무실 저 사무실 쏘다니며 자문을 구하는 내 모습이 처량했지만, 애는 어리고 부모는 죽어가니 내가 집안의 어른이구나 어른이 되어버렸구나 어른이 할 일을 하게 되었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엄마와 나 둘 다 눈물 한번 안 흘리는 모습에 스스로 소름 끼친 순간들도 있었지만, 여러 가지 미래에 대한 대비를 하고 인생방향을 짜느라 바빴다. 그리고 두 달 정도 기다려서 받은 수술에서 내핵에서도 암이 발견되지 않아 암이 아닌 것으로 종결되었다. 허무하게. 오진한 의사를 마냥 탓할 수 없는 건 종양의 위치, 모양, 크기 모두 위험한 수준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엄마 쪽 가족들 중에 암에 걸리신 분이 아무도 안 계셔서 유전자적으로 괜찮은 부분이라 겨우 피해 간 거라고 추측한다.
아프고 느린 내 아이는 발달이 잘 따라온다고 했지만 중간중간 정체기가 있어 쉽게 따라잡지 못했고 지금도 못하고 있다. 첫돌까지 주 1회 하던 재활치료는 두 돌 즈음엔 주 10회 정도로 늘렸다. 재활 외엔 남들과의 접촉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단순 바이러스나 유행바이러스에도 감염된 적이 한두 번밖에 없어서 그동안 내가 너무 아이를 꽁꽁 싸매고 발달을 늦추게 키운 건가 하는 후회 비슷한 걸 했는데, 이건 순전히 성장면에서 잘 크고 있기 때문에 드는 생각이지 많이 다니다가 감염되어서 응급실 여러 번 갔으면 절대적으로 후회했을만한 일이었을 걸 알기에 발달대신 생존을 선택한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다. 이렇게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으면 살아가기가 어렵다. 가지 않은 길의 베스트를 상상하며 후회하고 워스트를 생각하며 안도하는 게 인생 아닐까?
모든 길을 가는 법은 없고 이 길 저 길 다섯 발자국씩만 가며 길을 돌릴 수 없으니 내가 선택한 길이 최선이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우리 아이를 보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브런치 조회수를 보면 유난히 조회수가 높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누군가가 또 조산을 했겠구나 아니면 23주생을 낳았겠구나 짐작하곤 한다. 내가 갑자기 23주생을 낳고 마취에서 깨자마자부터 검색했던 23주생 예후글들.. 사실 많지 않아서 찾기 어려웠기 때문에 누군가가 조금은 더 빠르고 쉽게 찾길 바라는 마음으로 공유했던 나의 일기. 그 일기가 누군가에겐 '23주생에 이런 이벤트들을 겪었는데 이 정도니까 우리 애는 더 괜찮을 거야'의 희망이 되기도 하고 '이런 애도 이 정도인데 왜 우리 애는..'의 절망이 되기도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이 정도면 희망이 있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과 '이런 거라면 나는 자신 없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모두 이해한다. 당연하다.
낳은 아이가 죽네사네하는 극한의 상황에서 드는 모든 생각과 모든 희망과 절망은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 혹은 의료진 혹은 (가장 중요한) 아이에 의해 어떤 결정이던지 나게 되어있고, 그 결과를 통틀어.. 어쩌면 나쁜 결과일수록 더더욱 '운명'이라는 단어에 욱여넣고 삼켜야 하는 삶이 아닐까 싶다.
나는 나에게 아주 편리한 뇌구조를 갖은 인간이기에 현재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아이의 상태, 또 아이를 감당할 수 있는 나의 상황에 감사해하고 만족하며 여전히 육아를 즐기고 있다. 한 달에 열흘도 집에 못 들어가고 편집실 의자 위에서 자던 시절에 비하면 집에서 씻고 누워서 잘 수 있는 육아가 개꿀이라고 생각하지만 안 아픈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도 힘들어하는 친구들에게 미안해서 자주 하지 못하는 말이다. 육아는 안 힘들다. 미래에 아이가 스스로에 대해 실망하는 날이 많아서 행복한 삶을 살게 되지 못할까 봐가 두렵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안갯속 같은 길은 중학생 때도 고등학생 때도 대학생 때도 걸어봤으니, 그 길은 어설프게 주변을 더듬거리면서 시간 끌지 않고 저벅저벅 걸어 나가는 게 유리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게 두 돌까지 또 일 년을 걸었다. 빨랐지만 빠른 게 하나도 아쉽지 않은 해였다. TWO FA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