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월. 만 삼세가 되었다.
두 돌이 지나도 걷지 못하자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그 자체만으로도 중증장애등급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영원히 잃어버린 한쪽 눈 실명 때문에 어차피 장애등급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한쪽 눈 실명은 경증장애이다) 아이에게 장애아라는 낙인을 찍는 것 같은 미안함과 씁쓸함도 들었지만 그건 아주 찰나였다. 언제나 누구에게나 통하는 진리 중 하나는 부모의 부정적인 감정들은 아이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장애혜택은 사실 크게 와닿을 정도로는 받지 못하다가 최근에서야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이가 특이한 부류에 속함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것이 아이를 보호하는 사회적 장치였다는 걸 최근에 어린이집을 알아보면서 알게 되었다. 신생아중환자실에 입원해 있던 당시에 담당 교수님께서 어린이집을 보낼 거면 36개월 이후에 보내라고 하셨던 처방을 잘 기억하고 있었고, 그동안 가정보육을 한 덕에 자주 안 아프고 클 수 있었다. 하지만 발달을 많이 따라잡은 두 돌 이후시기 내내 재활치료사선생님들이 이제는 어린이집에 가서 또래를 만나 배울 시기라고 하셔서 올해부터는 어린이집에 보내보기로 했다. 현재 대근육의 경우는 재활졸업을 했고 소근육과 언어발달이 부족한데, 전체적으로 보면 21년 1월생인 우리 아이가 21년 11월 생정도의 발달지연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과거 병력 때문에 일반어린이집은 부담스럽다는 말을 들어야 했고 다행히 장애등급으로 장애통합반이 있는 어린이집 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신생아중환자실 퇴원 후에도 한 달에 외래를 열개씩 가던 아기가 세돌이 되자 일 년에 네다섯 번으로 바뀌었다. 모든 과를 사실상 졸업했고, 좀 더 자라는 걸 지켜보고 싶어 하시는 교수님들만 만나기로 했다. 잃은 부분은 도와줄 수 없는 부분이라 포기라는 표현이 어울리고 도움받을 수 있던 부분은 모두 도움받고 정상화되었다.
생후 돌까지는 정말 생존을 여전히 걱정하는 시기였다. 생후 두 돌까지는 우리 애가 다른 미숙아들을 비교해서도 많은 이벤트를 갖은 아기라는 걸 받아들이는 시기였는데 생후 세돌이 되니 그냥 마냥 기쁘다. 우리 애가 이렇게 대단하게 또 한해를 잘 살아주었구나. 매 순간 쉬지 않고 발버둥 쳐서 살아온 아이답게 집에 와서도 매 순간 쉬지 않고 스스로 교육하고 움직여서 발전하고 있다. 말하기는 돌 수준으로 아주 낮은 발달상태지만, 숫자와 글자에 관심이 많아서 일반 아이들보다도 높은 발달상태를 보여준다. 숫자와 글자만 특별히 잘하는 것도 부담스러워서 의사 선생님들과 상의해 봤었는데 자스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상호작용이 안 되는 거라고 해서 그 부분을 염두해두고 있다.
병증 부분은 이렇고 생활적인 면은 아주 편안하고 즐거운 한 해였다. 재활치료를 많이 다녀보기도 하고 산으로 바다로 공원으로 놀러 다니는데 시간을 많이 쏟아보기도 하고 우리 애처럼 어린이집을 안 다녀서 감염걱정이 없는 미숙아 친구들과 자주 만나고 놀았다. 키즈카페에 갔다가 감염되어서 오기도 했고, 그 때문에 장마비가 와서 많이 굶고 밥을 잘 안 먹은 시기도 있었지만 쉽게 해결가능한 수준에서 마무리되었다. 그만큼 아기가 단단해졌다는 뜻이다. 웃을 때 보조개가 있는, 가족 어느 누구도 닮지 않고 본인 그 자체인 우리 아이가 올 한 해 어린이집 가서 자주 아프지 않고 커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입원 수준으로 자주 아프면 언제나 다시 가정보육으로 되돌릴 수 있다는 마음으로 어린이집을 도전해보려고 한다. 그 길에서 도와주고 응원해 주는 모두에게 감사한 마음뿐이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나의 글과 인스타그램을 보는 비슷한 경험이 있고 있었던 부모님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꼭 살아남아달라는 말이다. 슬픔과 우울의 차이는 원인의 유무에 있다고 했다. 분명한 이유가 있는 슬픔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흐려진다. 우리는 분명한 원인이 있으니 나아질 것이다. 시간을 길게 끌어서 슬픔을 우울로 전환시키지 않길 바랄 뿐이다. 슬픔을 이겨내는 방법이 남이 보기엔 정신승리라고 하더라도 나를 위한 승리라면 상관없다. 꼭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살아남아서 승리하시라